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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커닝해도 되나
[단비발언대] 김근홍 기자
2015년 08월 13일 (목) 23:12:46 김근홍 기자 rmshddl1@hanmail.net
   
▲ 김근홍 기자

중학생 때다. 쪽지시험을 보고 나서 국어선생님이 나와 내 짝꿍을 교무실로 부르셨다. 뭔가 잘못된 듯싶어 불안하게 서있는 우리에게 선생님은 "누가 커닝했냐"고 물으셨다. 영문을 몰라 가만히 서 있는 내 옆에서 짝꿍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선생님은 짝꿍에게 "베낄 게 없어 틀린 답을 베끼냐"며 가벼운 핀잔만 주시고는 우리를 돌려보내셨다.

실상은 이랬다. 시험 전 선생님이 나눠주신 프린트에는 의인법이 ‘의린법’이라고 잘못 적혀있었다. 나는 선생님이 오타를 냈을 거라 상상도 못하고 프린트를 열심히 외웠다. 마침 시험에 의인법을 묻는 문제가 나왔고 나는 자신 있게 ‘의린법’이라 썼던 것이다. 짝꿍은 내 틀린 답을 그대로 받아 적다가 이를 이상하게 여긴 선생님에게 발각돼 망신만 톡톡히 당했다.

현재 한국 언론은 과거 우리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나는 내가 아는 한 국어의 최고 권위자인 선생님의 말을 그대로 외우느라 바빴다. 한국 언론도 마찬가지다. <한겨레>는 지난 4월 22일자에 아시아 국가 부채 문제에 대한 <월스트리트저널>의 분석과 전망을 그대로 받아 옮겼다. 아시아 전문가나 해당 국가의 견해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조선일보>는 4월 6일자에 ‘NYT가 전한 이모저모’라는 부제로 이란 핵 협상 타결을 다루며 <뉴욕타임스> 기사를 그대로 옮겨 실었다. 이러다 보니 국내 이슈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논조에 맞춰 대립각을 세우던 우리 언론들도 외국, 특히 제3세계 문제에 대해서는 '권위있다'고 생각하는 외신을 그대로 받아 적어 같은 목소리를 내는 현상이 반복된다.

선생님이 준 프린트만 보고 책이나 인터넷에서 정보를 더 찾아볼 생각을 하지 못한 나처럼 한국 언론은 서방 언론이라는 하나의 창구를 통해 세상을 내다보는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체코나 나이지리아 문제를 다룰 때도 체코 유수 언론 <CTK통신>이나 나이지리아 언론 <펀치>는 거의 인용되지 않고 <뉴욕타임스> 등이 단골로 인용된다.

한국 언론이 서방 국가에 대해 보도할 때는 그 나라 언론에 의존해서 기사를 쓰는 게 당연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외 국가를 다룰 때도 서방 언론에만 의존한다는 것이다. <조선>은 4월 1일자에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대선 결과에 대해 다루면서 ‘현지 언론’은 한 문장 언급한 반면 <뉴욕타임스> 등 서구 언론의 견해를 그대로 옮겨 적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언론이 이처럼 편중된 정보원에 기대어 기사를 쓰면 내 짝꿍처럼 '오보'를 낼 확률도 높아진다.

   
▲ 뉴스는 속보성이 중요하지만 한국 언론은 시간에 쫓긴 수험생들처럼 깊이 없는 보도를 남발한다. ⓒ Jack Hynes, flickr

우리가 본 쪽지 시험에서는 유일무이한 답이 있었다. 그러나 언론이 봐야 하는 '시험'은 답이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복잡한 사안에 대해서도 언론은 엄밀한 취재와 올바른 인식을 바탕으로 사회환경을 감시하고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언론이 서방의 이해관계에 치우칠 수밖에 없는 세계 주류 언론의 시각과 논평만 전한다면, 언론은 세계를 내다보는 창이 아니라 창에 드리운 커튼이 되고 만다. 우리가 범한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언론이 저지른다면 '핀잔'으로 끝낼 일이 아니다.

[김근홍 기자]
단비뉴스 영상부, 전략부, 미디어팀 김근홍입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나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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