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김선기 기자
우리에게 익숙한 말 한마디 해보자.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 빌 클린턴은 1992년 대선에서 이 한마디 구호로 아버지 부시를 이기고 미국 42대 대통령이 되었다. 클린턴 선거본부가 남긴 이 구호는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경제가 모든 문제를 좌우하기 시작한 시대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삶에서 겪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돈 문제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조부모와 친척들 손에 자란 것도 돈, 학창시절 단짝 친구가 다단계에 빠진 것도 결국 돈 때문이었다. 우리 삶을 아우르는 문제들, 10명 뽑는 서울시 사회복지사 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자만 2500명이 넘고, 비정규직으로 부당해고 당하며, 얼마 안 되는 월급 때문에 상사의 성추행을 눈감고, 월세가 없어 일가족이 자살하는 문제 역시 돈이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돈을 벌고 싶다는 말이 흔해진 세상이다. 내 생활이 불안정하니 주변이 보이질 않는다. 일단 나부터 잘 살고 볼 일이니까. 적당히 돈 벌고 편안한 생활을 누리는 건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당연한 욕망인데, 그러질 못한다.
정치는 이런 개인의 욕망을 잘 이용한다. 사회의 다양한 갈등이 ‘경제를 살리자’는 식의 외마디 앞에 논쟁을 해보지도 못하고 묵살된다. 코앞에 닥친 경제부터 해결하자고 말하면, 당장 내일 밥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에 그 말을 곧이들을 수밖에 없다. 정치꾼들은 “세월호 참사가 전 국민에게 슬픈 일이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하기에 소비를 늘리자”고 말한다. 그리고 대중에게 민생문제라 우긴다. 그런데 아무것도 바뀌는 것이 없다. 일상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법치를 수단으로 작동하는데 새누리당 김을동 최고위원은 5일 기업인을 포함한 대사면을 하자고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대통령의 사면은 사법권 침해일 뿐 아니라 군주가 자비로움을 과시하기 위해 베푼 은전의 유물인데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공연하게 논의된다. ‘국민대통합’을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공정한 법 집행과 유전무죄의 악습에서 벗어나는 것이 국민통합의 기초임을 왜 모를까?
박근혜 대통령은 새해 기자회견에서 점차 달궈지던 개헌 논의가 블랙홀이 될 것을 우려하며 찬물을 끼얹었다. 실상은 경제가 한국사회의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산낭비와 국부유출로 지목되는 4대강사업과 자원외교도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제도가 마련돼 있었더라면 치르지 않을 비용이었다.
박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표였던 2005년에도 참여정부에 대해 “정부•여당은 경제 살리기에 매진해야 할 때인데, 반대로 권력구조 개편 얘기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후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제도 개편 논의는 힘을 잃었고 10년 전 모습 그대로 오늘까지 왔다. 보수당 주장대로라면 경제 살리기의 골든 타임이 아니었던 때가 있었던가? 선학태 전남대 명예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양당체제로는 더 이상 한국사회를 지탱하기 어렵다”며 “거대 정당 위주 양당제에서 다당제로 가야 복지•교육•의료나 양극화 해소 같은 국가적 아젠다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잘 먹고 잘 살려면 결국 정치가 문제다. 우리는 고작 선거날만 민주주의의 주인 행세를 하는 바보인가? 우리가 바보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정치를 살려야 한다.
단비뉴스 환경팀
발은 가볍게, 손은 무겁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