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김선기 기자

▲ 김선기 기자

우리에게 익숙한 말 한마디 해보자.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 빌 클린턴은 1992년 대선에서 이 한마디 구호로 아버지 부시를 이기고 미국 42대 대통령이 되었다. 클린턴 선거본부가 남긴 이 구호는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경제가 모든 문제를 좌우하기 시작한 시대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삶에서 겪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돈 문제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조부모와 친척들 손에 자란 것도 돈, 학창시절 단짝 친구가 다단계에 빠진 것도 결국 돈 때문이었다. 우리 삶을 아우르는 문제들, 10명 뽑는 서울시 사회복지사 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자만 2500명이 넘고, 비정규직으로 부당해고 당하며, 얼마 안 되는 월급 때문에 상사의 성추행을 눈감고, 월세가 없어 일가족이 자살하는 문제 역시 돈이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돈을 벌고 싶다는 말이 흔해진 세상이다. 내 생활이 불안정하니 주변이 보이질 않는다. 일단 나부터 잘 살고 볼 일이니까. 적당히 돈 벌고 편안한 생활을 누리는 건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당연한 욕망인데, 그러질 못한다.

정치는 이런 개인의 욕망을 잘 이용한다. 사회의 다양한 갈등이 ‘경제를 살리자’는 식의 외마디 앞에 논쟁을 해보지도 못하고 묵살된다. 코앞에 닥친 경제부터 해결하자고 말하면, 당장 내일 밥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에 그 말을 곧이들을 수밖에 없다. 정치꾼들은 “세월호 참사가 전 국민에게 슬픈 일이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하기에 소비를 늘리자”고 말한다. 그리고 대중에게 민생문제라 우긴다. 그런데 아무것도 바뀌는 것이 없다. 일상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 제각기 다른 모양인 퍼즐조각을 맞추어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듯, 다수 정당제로 사회의 다양한 모습과 가치를 반영할 때 비로소 민주사회를 완성할 수 있다. ⓒ flickr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법치를 수단으로 작동하는데 새누리당 김을동 최고위원은 5일 기업인을 포함한 대사면을 하자고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대통령의 사면은 사법권 침해일 뿐 아니라 군주가 자비로움을 과시하기 위해 베푼 은전의 유물인데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공연하게 논의된다. ‘국민대통합’을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공정한 법 집행과 유전무죄의 악습에서 벗어나는 것이 국민통합의 기초임을 왜 모를까? 

박근혜 대통령은 새해 기자회견에서 점차 달궈지던 개헌 논의가 블랙홀이 될 것을 우려하며 찬물을 끼얹었다. 실상은 경제가 한국사회의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산낭비와 국부유출로 지목되는 4대강사업과 자원외교도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제도가 마련돼 있었더라면 치르지 않을 비용이었다. 

박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표였던 2005년에도 참여정부에 대해 “정부•여당은 경제 살리기에 매진해야 할 때인데, 반대로 권력구조 개편 얘기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후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제도 개편 논의는 힘을 잃었고 10년 전 모습 그대로 오늘까지 왔다. 보수당 주장대로라면 경제 살리기의 골든 타임이 아니었던 때가 있었던가? 선학태 전남대 명예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양당체제로는 더 이상 한국사회를 지탱하기 어렵다”며 “거대 정당 위주 양당제에서 다당제로 가야 복지•교육•의료나 양극화 해소 같은 국가적 아젠다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잘 먹고 잘 살려면 결국 정치가 문제다. 우리는 고작 선거날만 민주주의의 주인 행세를 하는 바보인가? 우리가 바보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정치를 살려야 한다.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