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이성훈 기자

▲ 이성훈 기자

지난 11월 서울시립미술관 <귀신, 간첩, 할머니> 전시회에 들른 적이 있다. 도대체 ‘귀신’과 ‘할머니’ 사이에 ‘간첩’이라니! 제목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도슨트는 세 단어가 한국 근현대사의 기억과 아픔을 표상한다고 말했다. 간첩은 일제와 냉전, 독재체제에서 첩자로 내몰린 희생자들, 귀신은 억울한 죽음, 할머니는 그 아픈 역사들을 간직한 채 세월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어르신을 상징한다.

슬픈 역사와 귀신이라는 개념으로 조형·영상·그림 등 다양한 표현물이 전시됐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방방곡곡에서 벌어진 굿판의 속사연을 담은 벽화였다. 하나하나가 가슴 아팠다. 30년대 일제에 징용되어 숨진 아버지께 바치는 진혼제, 6.25 때 간첩으로 몰려 맞아 죽은 보부상 위령제, 4.19의거 당시 총격에 숨진 학생들 위령제. 그리고 넓은 마당에서 굿판을 둘러싸고 함께 눈물 흘리는 마을사람들의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굿판은 근대사 속 희생자들을 기리는 ‘광장’이었다. 입장할 때만 해도 ‘굿판은 미신이 판치는 사이비종교 아니냐’ 싶어 코웃음을 쳤었는데, 나올 때는 코끝이 먹먹했다. 많은 굿판들은 ‘미신‘이 아니었다. 굿판은 역사와 속죄, 반성이 담긴 한마당이었고, 귀신은 안타깝게 죽어간 실존인물들이었다.

전시회장을 나서면서 문득 우리네 ‘굿판’과 서양의 ‘아고라‘를 견주어봤다. 같은 광장이라도 의미는 크게 다르다. 서양의 광장인 아고라는 ‘이성’이 지배하는 무대였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근현대 시민운동에 이르기까지, 아고라는 시민들이 모여 무언가를 주장하고 토론하며 권력에 저항하는 ‘정치의 무대’였다. 한편 마당에서 펼쳐진 위령제의 굿판은 ‘위로와 기원의 무대’다. 상다리 휘게 제사상을 차려주어 억울한 귀신을 달래고, 마을사람들이 한마음으로 폭력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기원하는 장소다. 딸랑딸랑 울리는 무당의 방울소리는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청중의 가슴을 울린다. 아고라는 정치의 현장이고, 굿판은 개인의 비극을 ‘집단기억’으로 되살려내는 감성의 한 마당이다.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덧 광화문광장에 이른다. 세월호 농성장에는 아직도 노란 리본을 흔드는 바람이 매몰찬데 그 많던 경찰마저 몇 명 남지 않아 더욱 스산했다. ‘선량한 이웃의 원혼’이 가득한 그곳에는 굿판을 접은 마당처럼 이젠 찾는 이가 없었다.

▲ 광화문광장은 ‘감성의 굿판’ 구실을 했다. 하지만 ‘이성의 아고라’로 거듭나지 못했다. ⓒ flikr

광화문광장은 ‘감성의 굿판’ 구실을 했다. 많은 국민이 TV, 인터넷, 신문을 통해 만난 유족들과 함께 울었다. 죽어간 아이들을 가엾게 생각했고, 내 아이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숙연해졌다. 하지만 세월호 농성장은 ‘이성의 아고라’로 거듭나지 못했다.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밝히고 재발을 막기 위한 정치∙제도적 결실을 맺는 데는 실패했다. 야당은 절규하는 유족들을 전면에 내세워 ‘성역 없는 진상규명’과 ‘정권심판 보궐선거’를 내세웠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세월호3법이 타결되기까지 무려 205일이 소요됐다. 세월호는 처음에 국민 모두의 슬픔이었지만 정치로 수렴되지 못하고 피곤한 ‘남의 일’이 되어버렸다.

어째서 유족들은 심정적으로는 위로받으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반감을 사는 ‘이율배반적 상황’에 처한 것일까? 보수언론은 정치인에게 욕설을 퍼붓는 유족들에게 ‘무례하다’ 비난했고, 대리기사와 실랑이가 붙자 ‘건방져졌다’고 손가락질했다. 유민이 아빠 김영오씨는 ‘이혼아빠’로 몰리며 ‘신상털이’를 당했다. 개인 차원에서만 보면 술주정도 원망 섞인 욕설도 피붙이를 잃은 ‘넋두리’로 봐줄 법도 했건만, 정치판에 올려놓으니 봐줄 수 없는 폭언이 되고 오만한 행태로 낙인 찍혔다. 정치가 앞에 나서지 않고 유족들 뒤에 숨어버린 탓이다.

야당은 세월호 유족을 돕겠다고 나섰지만 제 구실을 못했다. 야당의 임무는 유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었지, 비통한 그들에게 ‘마이크’를 넘기는 게 아니었다. 정치판에는 ‘정치용 매너’가 있다. 민주주의의 제도적 절차가 있고, 언론과 대중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아무리 부당할지라도 아고라에서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 흥분하면 어떤 대안도 빛이 바랜다. 단련된 ‘꾼’만이 정치적 광장에서 매끄럽게 주장을 내세울 수 있다. 세월호 유족은 대부분 공업단지 노동자이지 ‘정치꾼’이 아니다. 게다가 크나큰 슬픔을 겪었다. 유족에게 ‘아고라’에 어울리는 이성과 인내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그런 유족 뒤에 숨은 야당은 무책임했다.

여당의 태도는 마치 ‘정치를 모르는 아이’ 다루는 듯했다. 유족은 정치에서 물러나 넋두리나 하라는 투였다. 여당은 진상규명위원회 구성에 참여할 권리, 그리고 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달라는 유족의 요구를 ‘사법권 침해’라는 그럴듯한 말 한마디로 일축해버렸다. ‘사법권 침해’란 말은 그런 용도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일찍이 사법체계를 정비한 나라들은 입법자의 승인 아래 피해자가 소추·기소할 수 있는 제도를 두고 있다. 여기서 입법자란 ‘사법권 침해’ 운운한 이완구 원내대표 등 의원들을 이른다. 설마 국회의원 스스로 삼권분립을 무시하고 사법권 아래로 기어 들어갈 리는 없을 테니, ‘사법권 침해’는 아고라에 등 떠밀린 유족을 무시하는 ‘현학적 수사’라고 해야겠다.

집에 돌아와 전시회 팜플렛을 뒤져봤다. ‘박정희 정권 말기...무속 말살정책’이 눈에 들어왔다. 권력은 굿판을 모조리 ‘미신’으로 매도하고 파괴했다. 세월호 유족의 슬픔도 마찬가지다. 세월호는 권력의 입맛대로 유린당했다. 일제, 독재,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권력은 민중의 한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특별조사위가 꾸려졌다지만 출석거부 과태료도 적은데다 공무상 기밀은 수사할 수 없으니 큰 기대는 할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민중의 한풀이는 굿판에서나 가능한 걸까? 광화문 광장에는 노란 리본들만 힘없이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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