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남건우 기자

▲ 남건우 기자

많은 한국인들이 재벌을 선망한다. 대중의 ‘판타지(공상)’를 담아내는 드라마에는 이를 반영하는 ‘멋진 재벌’이 자주 등장한다. 에스비에스(SBS)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현빈 분)은 큰 키에 조각 같은 외모, 그림 같은 집에 출중한 경영능력까지 갖췄다. 게다가 연인을 위해 목숨을 던지려 할 만큼 헌신적이다. 인터넷 공간에서도 재벌은 종종 열광의 대상이 된다. 삼성가의 상속녀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의 사진에는 외모에 대한 칭송과 함께 이들이 걸친 옷과 가방의 가격 등 재력을 부러워하는 댓글이 주렁주렁 달린다. 대중매체에 투영된 재벌은 많은 사람이 동경해 마지않는 ‘스타’의 모습이다.

반면 대중의 심리에는 재벌에 대한 반감도 잠복하고 있다가 가끔 폭발한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맏딸인 그가 기내 서비스 부실을 이유로 승무원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하고, 활주로로 향하던 비행기를 돌려 사무장을 내리게 한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재벌의 ‘안하무인’ 행태에 분노했다. 하지만 대중의 분노가 오로지 ‘재벌왕국’의 ‘버르장머리 없는 공주’ 하나에만 쏠리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 일은 한 족벌경영인의 월권이라는 문제를 넘어, 우리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를 멋대로 ‘회항’ 시킨 재벌들의 구조적 문제를 함께 드러낸 사건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법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지 못하고 ‘재력’에 따라 처벌이 달라지는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다. 수천억원대의 배임과 횡령을 저질러도 징역형을 선고하지 않는 ‘정찰체 판결’과 잊을 만하면 다시 등장하는 재벌기업인에 대한 ‘사면・가석방’ 주장이 그 예다. 재벌은 지난 수십 년간 정책적으로 엄청난 특혜를 받으며 성장해왔다. 역대 정부는 독점사업의 기회와 금융자원을 몰아주며 재벌을 키웠고 감세, 규제 완화, 민영화 등으로 경제력집중이 가속화하는 것을 돕거나 방임했다. 이 때문에 중소기업과 자영업자 등 경제적 약자는 설 자리를 잃고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가 극심해졌다. 그 폐해로 인해 대통령 선거 때면 ‘재벌개혁’ 논의가 불을 뿜지만, 집권 후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재벌 입맛에 맞는 ‘규제 완화’가 대신 자리를 차지했다. 

▲ 땅콩 회항으로 무리를 일으킨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검찰에 출두하고 있다. 땅콩 회항은 조현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재벌들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 YTN 뉴스 人 화면 갈무리

재벌은 이처럼 국민경제를 왜곡시켜온 한편 내부적으로는 ‘아무도 못 말리는’ 총수일가의 독단적 경영, 즉 ‘황제경영’을 통해 불법·편법으로 경영권을 세습하고 노동자의 인권을 짓밟았다. ‘땅콩 회항’은 많은 재벌기업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횡포의 한 극적인 사례일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 재벌의 이런 전횡 배경에는 전근대적인 지배구조가 있다. 총수일가는 계열사 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순환출자 등을 통해 아주 적은 지분으로 수십 개 계열사의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총수가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쫓겨나지 않는 구조이니, 재벌은 수많은 외부 주주가 있는 상장회사까지 ‘내 재산’으로 여기며 월권을 저지른다. 조 전 부사장의 일탈도 ‘대한항공 비행기 안에서는 뭐든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탓이라고 볼 수 있다. 경영을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사외이사는 총수 일가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구성되고, 외부의 소수 주주나 노조가 감시할 제도적 여건이 갖춰지지 못한 것도 재벌의 횡포가 지속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재벌의 실상이 이런데도 국민들이 냉정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선망과 동경에 머무른다면 현실은 나아질 수 없다. 재벌이 적은 지분으로 과도한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순환출자와 같은 제도적 구멍을 철저히 차단하고 소수 주주를 대표하는 사외이사를 뽑을 수 있도록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는 등 경영감시장치를 강화해야 한다. 노조의 설립과 활동을 보호함으로써 내부감시자의 역할을 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재벌일가의 상속・증여세를 엄정하게 과세하고 하도급착취, 일감 몰아주기 등과 같은 불공정 행위에 대해선 부당이익의 몇 배를 토해내는 징벌적 배상제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재벌이 국민경제에 많은 부분을 기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들이 무슨 짓을 해도 금방 잊어버리고 ‘맹목적 사랑’을 쏟는 것은 곤란하다. 거대광고주의 입맛에 맞추느라 그들의 비리는 감추고 옹호논리만 전파하는 언론, 재벌의 지원금을 받아 쓰고 친재벌 이데올로기를 퍼뜨리고 있는 학자들은 대중을 이처럼 ‘우민화(愚民化)’한 데 대해 반성해야 한다. 사랑을 믿고 방종하는 애인에게 밀당(밀고 당기기)이 필요하듯, 이제는 쓴소리도 할 줄 아는 ‘분별 있는 사랑’으로 재벌과 사회가 함께 발전할 길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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