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겁먹기'와 '겁주기'

▲ 배상철 기자

나는 ‘오줌싸개’였다. 빨아놓은 이불이 마르기 무섭게 지도를 그렸다. 오줌을 쌀까 두려워 밤에는 물 한 모금 마음 편히 마시지 못했다. 나에게 가장 무서운 훈계는 ‘불장난하면 밤에 오줌 싼다’는 거였다. 불장난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했지만 혹시 이불에 실례할까 두려워 불장난을 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린 시절 내게는 분명 효력 있는 어른들의 처방이었다.

그 경고가 아이들 버릇을 가르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꿈과 현실을 명확하게 구분할 줄 아는 나이가 되면서 불장난과 한밤중에 오줌 싸는 일 사이에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근거가 없거나 거짓임을 알면서도 속설을 믿고 싶어 하는 경우는 여전히 있다. ‘이건희 없으면 삼성이 망한다’, ‘대기업 때리면 한국 경제가 흔들린다’는 속설이 대표적이다.

재벌 총수가 수사를 받거나 구속될 때쯤이면 이런 가설이 등장한다. 그룹총수가 병이나 구속으로 자리를 비우면 얼마 지나지 않아 예외없이 “오너 공백에 따른 경영상의 차질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보도가 쏟아진다. 이런 보도를 접하는 대중은 ‘오너가 없으면 그룹에 큰일이 나나 보다’, ‘내가 투자한 펀드가 그 회사 주식에 투자해 손해를 보지 않을까’라는 식의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지난 연말에도 ‘재벌총수 사면·가석방론’이 떠올랐다. 황교안 법무부장관이 가석방 가능성을 암시했다는 첫 보도가 나온 뒤 재계와 보수언론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석방 담론을 확대재생산한 결과였다. 법무부는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건’ 등으로 여론이 악화하자 ‘특혜 없는 공정한 법 적용’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주요 기업인들이 구속 상태에 있으면 투자결정에 지장을 줄 수 있다”고 거들면서 특혜 논란이 더 커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가석방은 법무부가 판단하면 될 것”이라고 말해 여론이 가라앉으면 가석방이 다시 추진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이는 ‘경제 살리기’를 명분으로 한 국민 겁주기에 지나지 않는다. 재벌총수가 없어서 기업이 어렵다지만 실상 재벌총수의 공석은 기업의 경영 악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배임·횡령 등으로 감옥에 있지만 두 그룹의 영업실적은 오히려 좋은 편이다. 총수가 구속될 때마다 그룹의 '경영 마비'를 우려한 재계 주장과는 다른 결과다.

▲ 경영악화를 근거로 한 재벌총수의 가석방은 명백한 특혜다. ⓒ wikimedia

경제를 인질 삼아 겁을 주려는 시도는 이제 잘 통하지 않는다. 최근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여론조사에 따르면, 재벌총수 가석방이나 사면·복권에 대해 ‘경제 살리기에 도움이 될 수 있으므로 찬성한다’는 의견은 23%에 그쳤다. 반면 ‘특혜 없는 공정한 법집행이 이뤄져야 하므로 반대한다’는 응답자가 69%였다.

‘불장난하면 오줌 싼다’는 속설은 그것을 믿는 아이뿐 아니라 불장난을 막으려는 어른에게도 쓸모가 있다. 속아도 억울할 것 없는 속설이다. 반면 ‘재벌 총수의 부재로 경제가 돌지 않는다’는 속설은 효용보다 사회적 해악이 크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잘못된 관행이 용인될 수 있고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마저 무너지게 된다. 이제 정부와 재계, 언론도 이런 담론을 되풀이할 게 아니라 경제를 볼모로 한 국민 겁주기를 그만둬야 한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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