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고쿠분 고이치로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얼마 전 종영한 티비엔(tvN)의 드라마 <미생>은 직장인의 애환을 현실적으로 다뤘다고 해서 인기를 모았지만 어찌 보면 판타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실제 회사생활에서 피해갈 수 없는 ‘지루함’이 전혀 다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에게 오늘은 어제와 별 다르지 않은 하루의 반복이다. 같은 사무실, 같은 사람, 같은 업무. 그래서 지루함이란 현대인에게서 떼어낼 수 없는 고질병 같다고도 할 수 있다.

17세기 프랑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블레즈 파스칼은 사교모임에 나가 스트레스를 받거나 도박으로 돈을 잃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비판하며 "인간의 불행은 먹고살만한 돈이 충분해도 방에 꼼짝 않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말했다. 그는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인간의 운명을 비참하다고 여겼다. 도대체 인간은 왜 지루함을 느낄까. 정말 지루함은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가. 일본 다카사키경제대학의 40대 철학교수인 고쿠분 고이치로(國分功一郎)는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를 통해 이 같은 질문을 던진다.

유목민이 정착하면서 시작된 지루함의 역사

저자는 지루함의 원인을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는 현실’에서 찾는다. 지루함의 시작은 인간이 유목생활에서 정착생활로 옮겨가는 시점과 관련이 있다. 유목민은 매일 수렵이나 채집을 통해 먹을거리를 구해야 했고, 추위나 야생동물의 위협을 피해 안전하게 머물 곳을 구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모든 감각과 능력을 총동원해 돌발 상황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 하지만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모든 것이 전보다 수월해졌다. 농업기술 개발로 식량의 안정적 공급이 가능해졌고, 건축기술 발달로 오랜 기간 살 수 있는 집을 가질 수 있었다. 할 일은 줄어들고 여유 시간이 많아졌다.

육체적·심리적 측면에서 여유로워진 인간은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토기에 장식을 그려 넣고, 그림이나 문자를 이용해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지루함과 함께 문명이 시작됐다는 게 저자의 해석이다. 이후에도 문화와 예술은 지루함을 많이 느끼는 계층, 즉 한가한 계층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미국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이 말한 유한(有閑)계급이 이에 속한다. 금전적 여유와 한가한 시간을 가진 이들은 노동을 하지 않고 소비생활을 즐기는 계층이다. 하지만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사회 구성원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계층은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지루함을 느끼게 됐을까.

 

▲ 일본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는 저서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를 통해 현대인의 고질병과 같은 지루함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 flickr

산업혁명 이후 늘어난 여가를 ‘소비’로 착취한 자본

그것은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노동시간이 점진으로 줄어든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19세기 영국 사회주의자 윌리엄 모리스는 장차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이후 찾아올 지루함에 대해 미리 걱정했다. 그는 “혁명 이후 여유를 얻은 사회, 한가함을 얻은 사회에서 우리들은 매일의 노동이 아니라 도대체 무엇을 향해야 할 것인가?”하는 질문을 던졌다. 노동시간이 줄어드는 만큼 늘어날 한가한 시간을 어떻게 견딜지 걱정한 것이다. 동시대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지금 수백만에 달하는 유럽 사람들은 지루함으로 죽어버릴 지경"이라고 말했다. 산업혁명이 진전되면서 이제 지루함은 소수의 유한계급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니라 다수가 느끼는 고민이 됐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루함을 왜 고민해야 하는가? 유한계급이 그러하듯 노동자의 지루함도 문화를 발달시킬 동력이 될 수 있지 않나? 저자는 유한계급과 노동자의 지루함은 성격이 다르다고 말한다. 유한계급은 애초에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계층이었지만, 노동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자본은 노동시간이 줄고, 일을 통해 노동자를 착취할 여지가 줄어들자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다른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자본은 늘어난 여가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노동자들을 노리고 ‘즐거움’을 대량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들어진 즐거움’을 팔았다. 그렇게 해서 소비문화 산업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여가는 ‘노동을 정지하는 시간’이 아니라 ‘비생산적 활동을 소비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바로 자본이 노동자의 노동을 넘어 여가까지 착취하는 현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충족되지 않는 소비욕구

저자는 이런 소비문화의 또 다른 문제가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는 소비의 특성’에 있다고 말한다. 소비는 만족을 느끼는 한계가 없다. 소비는 점점 과잉으로 발전하며, 그럴수록 만족에 대한 갈증이 더욱 커진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란 '관념론적 행위'라고 말했다. 인간은 소비할 때 상품 자체를 받아들이거나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에 부여된 개념과 의미만을 소비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휴대폰 최신 기종이 이전의 기종보다 더 잘 팔리는 이유는 인간이 그 모델 자체를 원하는 게 아니라 '새 모델로 바꾸었다'라는 관념을 소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고쿠분 고이치로의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표지. ⓒ 한권의책

그렇다면 소비사회에서 자유를 빼앗기지 않을 방법은 무엇인가? 저자는 ‘즐기라’고 말한다. 채워지지 않는 관념적 만족감을 좇지 말고 물건 자체를 취하고 즐기라는 것이다. 이는 훈련을 통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식도락을 즐기는 사람은 ‘먹는 것’에 대해 사고하게 된다. 맛있는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어떤 식재료가 필요한지 생각한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점차 영화에 대해 사고하게 된다. 영화 연출자의 의도나 인상 깊었던 장면을 곱씹어 생각한다. 이 과정을 통해 영화 관람은 단순히 남는 시간을 때우는 소비 차원에서 영화 자체를 즐기는 차원으로 이동한다. 이 둘 사이는 ‘선택의 자유가 있느냐’ 여부에 따라 구분된다. 내가 이 영화를 정말 보고 싶어 영화표를 구매한 것인지, 혹은 영화보기라는 관념을 소비하기 위해 영화표를 산 것인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인간은 즐기는 행위를 배워가면서 생각하는 행위까지 배울 수 있다. 자신이 정말 원하는 상품을 취하고 즐긴다는 것은 ‘선택의 자유’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운명과도 같은 지루함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가’에 대한 저자의 답은 ‘인간임을 즐기며 동물되기를 기다리라’는 다소 생경한 처방이다. ‘동물되기’란 충동에 사로잡혀  하나의 대상에만 몰입하는 상태다. 몰입의 대상은 유명인의 스캔들이 될 수도 있고 예술 작품이나 연인이 될 수도 있다. 유명인의 스캔들에 흥미를 느껴 하루 종일 관련 뉴스만 검색하거나 갤러리에서 한 작품에 빠져 그 앞에서 몇 시간이고 머문다거나 사랑에 빠져 연인만 생각하는 상태다. 물론 경험하기 전까진 어떤 상황이 자신을 사로잡는지 모른다. 몰입할 대상을 찾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 대상이 명확해지면 그 사람은 여가를 관념적 소비 대신 자신이 진정 원하는 대상에 몰입하는 시간으로 채울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영화나 그림을 좋아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미술관과 영화관을 찾는 이유에 대해 “나는 기다리고 있다”라고 답했다. 그가 사용했던 ‘기다린다(être aux aguets)'라는 표현은 동물이 먹잇감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동물은 어디에 가면 먹잇감을 얻기 쉬운지 알고 있다. 본능에 의해, 그리고 경험에 의해 안다. 들뢰즈의 경우에는 미술관이나 영화관이 바로 ‘동물이 되는’ 순간이 일어나는 장소였다. 

‘자본으로부터의 자유’는 가능할까

저자는 이 책에서 ‘지루함’이란 단어를 빌려 ‘자유’를 말한다. 언제부턴가 자본은 노동자의 노동은 물론 여가시간까지 착취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 중 연간 노동시간이 2위로 여전히 장시간근로가 문제가 되고 있지만, 그래도 주5일 근무가 정착되는 등 이전보다는 여가가 늘어나고 있다. 그 틈을 타고 수많은 신종 소비산업이 노동자의 여가시간과 지갑을 공격하고 있는 것도 저자의 지적과 맥을 같이 한다.

기업은 다양한 매체와 화려한 광고를 동원해 소비를 권하고, 노동자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관념적 소비’를 반복한 뒤 더 큰 공허감을 느낀다.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삶’이 아닌 ‘능동적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행위’가 필요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지루함조차도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해소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만큼은 온전히 내 것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지루함에 대한 고민은 빼앗긴 시간을 되찾으려는 노력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저자는 지루함을 거론하면서 ‘노동자 개개인이 자본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운 사회’라는, 혁명에 가까운 변화를 꿈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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