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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과 뉴스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까
[마음을 흔든 책]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The News : A User’s Manual)
2014년 09월 08일 (월) 19:42:41 조창훈 기자 nakedjochang@gmail.com

글을 쓸 때 어느 작가도 ‘우리는’이란 주어를 쉽게 쓸 수 없다. ‘우리는’은 작가와 작가가 상정하는 독자가 이해관계가 일치하거나 동일한 방향성을 가질 때 가능하다. 그러나 독자층은 계층, 나이, 성별, 정치적 관점 등에 따라 매우 다양하기에, 이들을 아우르는 글을 쓰기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알랭 드 보통은 ‘우리는’이라는 주어를 자주 사용한다. 그가 말하는 ‘우리’는 ‘현대인’쯤으로 읽힌다. 선진자본주의 국가에 살며, 일하고, 사랑하고, 결혼도 하는 이들이 ‘우리’들이다. 알랭 드 보통의 글 특징은 현대인과 외부환경 사이의 갈등을 예리하게 포착하는데 있다. 개인의 내면상황에 집중하는 심리학, 구조적 문제만을 들추는 사회학을 넘어 개인의 구체적 삶에서 시작해 그 개인의 고민에 공감하고, 변화를 위한 사색을 이끌어낸다. 한국에서 20만 부 이상이 팔린 <불안>은 불확실한 현대사회 내에서의 속물근성, 능력주의, 사랑결핍 등에 빠진 개인의 고뇌를 다뤘고,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는 낭만화된 사랑과 현실 사이의 딜레마를 풀어냈다. 이밖에도 그는 건축, 일, 섹스, 여행, 종교 등 현대인들이 고민하고 있는 다양한 소재들에 대해 책을 써왔다.  

뉴스에는 맥락이 빠져있다 

   
▲ 알랭 드 보통의 <뉴스의 시대> 표지. ⓒ 문학동네

이번에는 뉴스다. 시작부터 도발적이다. 그에 따르면 현재의 뉴스는 ‘최소한 예전의 신앙이 누리던 것과 동등한 권력의 지위’를 차지했다. ‘우리’는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하듯, 아침뉴스와 저녁뉴스를 보고, 뉴스를 통해 누가 착하고 누가 악한지를 알게 된다. 그는 이번 책에서 뉴스와 ‘우리’의 삶 사이에 어떤 간극이 있는지, 어떻게 뉴스를 소비하면 좋을지에 대해 알려준다.  

“독자를 긴 이야기 속 아무데나 빠뜨렸다가 다시 재빨리 꺼내면서도 사건이 전개돼온 더 넓은 맥락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언론이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중요한 사건들을 기사화할 때 상습적으로 벌이는 일이다” (p25-26) 

지난해 세상의 주목을 끌었던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사건’은 참 지리했다. 계속해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중요한 뉴스로 다뤄지는데, 도무지 관심이 가질 않았다. 국정원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은 NLL을 포기 했다며 남북협상내용을 공개하고, 국회특별결의로 국가기록물을 공개한다는 관련 뉴스들을 많이 접했지만 왜 이 논란이 시작됐고, 어떻게 전개돼 왔는지 이 사안에 대한 전체적인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국정원이 새누리당에 대선 전 몰래 대화록을 유출했을 가능성에 대한 맥락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이 사건은 내게 ‘여야 간 정쟁’으로만 남을 뻔 했다.  

언론사가 쏟아내는 뉴스들은 세계의 단편적인 모습만을 보여준다. 세계라는 모자이크 작품이 있다면 뉴스는 모자이크를 구성하는 한 조각이다. 알랭 드 보통에 따르면 어떤 한 조각은 ‘몇 달, 혹은 심지어 몇 년에 걸쳐 다듬어진 안목을 통해서만 그 진짜 형태와 논리 구조를 대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야기의 극히 일부’다. 독자가 모자이크 한 조각을 받더라도 그 조각을 작품의 어디에 붙여야할지 알 수가 없다. 지금 언론은 모자이크 작품의 전체인 그림을 보여주기보다 실시간으로 나온 모자이크 조각인 단편적 뉴스만을 던져주기에 바쁘다. 흔히 신문기사는 중학생이 읽을 수 있도록, 방송기사는 초등학생이 이해할 정도로 쉽게 쓰라고 한다. 아무리 쉬운 단어로 쓴 글이라도 맥락이 없다면 독자는 읽을 수 없다.  

검열보다 훨씬 교활하고 냉소적인 힘  

“권력을 공고히 하길 소망하는 당대의 독재자는 뉴스 통제 같은 눈에 뻔히 보이는 사악한 짓을 저지를 필요가 없다. 그 또는 그녀는 언론으로 하여금 닥치는 대로 단신을 흘려보내게만 하면 된다. (중략) 현상태는 뉴스를 통제하기보다 오히려 흘러넘치게 할 때 오래도록 충실하게 유지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정치적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진을 빼는 데 검열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냉소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알랭 드 보통은 극단적으로 독자를 무지하게 만들고 싶다면 언론사들이 닥치는대로 단신기사를 쓰면 된다고 말한다. 언론사들이 맥락을 빠뜨리는 이유는 ‘이미 지난 기사로 흐름을 알려줬으니’, 혹은 ‘해석은 독자의 몫’이라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지난 기사를 잊어버렸고, 뉴스를 보고 해석할 만큼의 여력과 통찰력이 없다. 결국 뉴스는 따분하고 지루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의 문제는 ‘우리들’이 정치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이다. 불과 100일 전만 해도 ‘우리들’ 중 세월호 특별법이 표류할 것이라고 예상한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맥락 따윈 없이, 폭력적으로 쏟아진 세월호 뉴스들은 ‘우리들’의 정치적 현실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줬고, 남은 것은 피로감이었다. 급기야 ‘세월호 이야기 그만하자’는 이야기가 나오는 파국이다.  

언론들은 맥락을 제공하는 것에 ‘선동자’란 낙인이 찍힐까 노심초사한다. 맥락이란 일련의 사건을 보는 해석틀에서 나오기에 정치적 관점이 개입된다. 언론은 이런 정치적 관점을 알려주는 것은 편향된 정보를 줄 가능성이 높기에, 공정하고, 객관적인 ‘사실’보도라는 명목 아래에서 몸을 사린다. 그러나 이는 언론의 직무 유기다. 절대적인 객관보도란 존재하기 어렵다. 무엇을 취재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해당 언론사의 입장과 주장이 담긴다. 알랭 드 보통은 뉴스가 편향에 좀 더 관대해져야한다고 주장한다. 편향된 시각으로 만들어진 뉴스가 더 믿을만하고 유익한 정보를 찾는 법이라는 것이다.  

   
▲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시작된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사건’은 맥락이 없는 뉴스의 전형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건을 '여야 간 정쟁'으로만 기억한다. ⓒ YTN, MBC 뉴스 화면 갈무리

유병언이 없어진다고 좋은 세상이 오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가 터지자 주요 언론사는 책임자를 찾기에 나섰다. 지목된 인물은 배를 버린 선장과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인 유병언이었다. 유족들과 진보를 표방하는 신문들은 국가 시스템의 수장인 박근혜 대통령을 책임자에 포함시켰지만 주요 언론사는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해운사와 관련자들을 악마로 만들었고, 이 악당들이 없어지면 세월호 사건이 재발하지 않을 것처럼 여론을 몰아갔다. 

그렇다면 선장과 유병언이 없었다면 세월호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세월호 사건이 상징하는 의미는 우리 사회 도처에서 세월호와 같은 대형 참사가 일어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비용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각종 안전규제를 푼 건 선박업계만이 아니었다. 언론은 자극적인 이슈가 나오거나 사건이 발생해야 비로소 주목한다. 윤일병 사건이 터지기 전에도 군대 내에서는 폭력적인 문화가 만연해 있었고, 세월호 참사 이전에도 해운업계는 안전에 무감각했다. 언론은 ‘잘 팔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단지 눈에 띄지 않는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현 체계에서 뉴스는, 어떠한 위법행위도 금품 갈취도 없이 수 천 명의 사람들을 굴욕적인 환경에서 살게 만드는 부동산 개발업자를 ‘보지 못 한다’.” (중략)

“물론 언론은 개개의 썩은 사과를 겨냥한 임무를 분명 지니고 있지만,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합의 내부에 은폐된, 눈에는 띄지 않지만 훨씬 큰 제도적 실패에도 주의를 돌리도록 우리를 이끌어야 한다는, 마찬가지로 필수적인 책무 또한 지니고 있다.” (p74-75) 

오늘의 저널리즘은 경찰서나 검찰청처럼 나쁜 사람들을 들춰내거나 흉악한 사건, 각종 비리와 부실을 밝혀내는데 정력을 쏟는다. 알랭 드 보통은 “저널리즘은 더 나은 나라를 만들 수 있는 길을 제안하려는 목적으로 국가적 삶의 모든 사안을 다루는 망명정부”가 돼야한다고 말한다. 모든 분야에 걸쳐 비교적 느리고, 지루한 뉴스라도 우리 삶과 직결된 문제라면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는 뜻이다.  

뉴스의 홍수 시대다. ‘우리’는 쉼 없이 뉴스를 갈구한다. 여기서 질문해보자. 우리는 뉴스를 본만큼 충분히 세상을 잘 안다고 말할 자신 있는가? 언론에서 목청 높여 비판한 만큼 세상은 한 걸음씩 진보했는가? 알랭 드 보통은 스마트폰에 눈을 떼지 못하는 ‘뉴스의 시대’에 뉴스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가 책에서 건드린 뉴스의 한계와 문제점은 이미 언론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언론사들은 지면상의 이유, 인력의 문제 등의 핑계를 대며 고치지 않는다. 모든 기사에 맥락을 보여주려다가 편향적이라는 비판에 자유롭지 못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뉴스를 생산하다가 재정난이 밀려올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뉴스가 ‘우리들’에게 더 의미 있기 위해서 오히려 뉴스를 보지 말라고 조언한다. 뉴스가 진리가 아님을 인식하고, 거리를 두라는 것이다. 그리고 뉴스가 채워주지 못하는 공백을 우리의 지성과 사색으로 메우는 것을 요구한다. 셀레브리티 가십성 뉴스를 보는 게 아니라 셀레브리티의 삶과 생각을 반추하며 더 나은 자신이 될 수 있는 법으로 찾는다든지, 해외뉴스를 막연하게 소비하지 말고 전혀 다른 나라의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 상황을 공감해본다는 것처럼 말이다.


 

[조창훈 기자]
단비뉴스 미디어팀 조창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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