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후루이치 노리토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행복하다’라고 생각한다.”

▲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표지 ⓒ 민음사

후루이치 노리토시(古市憲壽)는 갓 서른의 일본인 사회학자다. 그는 스물여섯이던 지난 2011년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펴내면서 ‘미래가 안 보이는 일본에서 청년들이 행복을 느끼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 청년들이 행복하다고? ‘잃어버린 20년’의 경기침체와 양극화, 실업, 그리고 동일본 대지진의 후유증 속에서? 그런데 한글번역판에 실린 2012년 일본 내각부 조사를 보면 진짜로 일본 20대의 생활만족도가 78%, ‘행복하다’고 답한 중고생 비율이 95%로 나온다.

국가가 외면한 청년들, ‘소소한 행복’에 안주하다 
 
후루이치 자신도 처음엔 ‘절망의 나라에 사는 일본 젊은이들이 도대체 왜 행복한가’를 궁금해 하며 답을 찾아 나섰다고 한다. ‘나라’ ‘젊은이’ ‘행복‘ 등을 키워드로 뉴스와 각종통계, 유명인 어록 등을 분석했다. 후루이치가 내린 결론은 일본이라는 국가가 도움이 절실한 자국 젊은이들을 철저히 외면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청년들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소소한 일상에 안주해버렸다는 얘기다.

후루이치는 지금껏 일본이라는 국가가 청년들의 ‘구조요청’에 응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19세기 후반 일본의 근대화 개혁이 시작된 이후 국가는 침략전쟁 등을 위해 ‘황국신민’, ‘대일본의 아들’이라 부르며 청년을 동원했을 뿐, ‘행복할 권리가 있는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의 청년세대는 국가 경제가 팽창하던 시절 ‘태양족’, ‘신인류’로 불리며 더 많은 소비를 요구받았고, 성장정체기에는 ‘게임용 뇌’, ‘오타쿠(광적으로 몰두하는 사람)’ 등으로 비난받았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는 보수언론과 지식인들이 나서서 ‘방사능 오염지역으로 청년들이 나설 때’라는 주문까지 했다고 한다.  

“국가는 전쟁, 경제성장 등 목표에만 충실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청년 한명 한명의 행복은 그저 희생대상일 뿐이었다.”

고령자도 비참한 사회, ‘세대전쟁’은 교묘한 왜곡

저자는 일본의 사회적 위기를 부모세대 탓으로 돌려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전쟁과 성장주의 아래 희생된 것은 아버지나 자식 모두 같기 때문이다. ‘일본 최대의 살인사건‘이라고 규정된 태평양전쟁(1941~1945)때는 무려 310만 명의 청년과 부모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어 현재 청년들의 부모, 조부모세대는 ‘회사의 가축’이란 뜻인 ‘사축’으로 불리며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21세기 들어서는 ‘가족복지‘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노후비용을 희생해가며 자립하지 못한 자식세대를 먹여 살리고 있다. 부모세대는 청년세대가 원망해야 할 기득권이 아닌, 함께 울어야 할 동반자라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국가는 국민의 희생을 연료삼아 성장했지만, 정작 국민이 도움을 요청할 때는 응답하지 않았다. 동일본 대지진 사태는 대표적인 국가 실패였다. 리더의 부재, 부실한 위기관리 능력, 경직된 관료조직의 폐해, 중앙과 지방의 협력 부재 등. 저자는 복지문제에서도 국가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노동자들은 ‘고용유연화‘ 구호 아래 저질 일자리로 내몰렸고, 인구감소 등의 영향으로 연기금이 부실화하고 있기 때문에 노후의 안녕도 보장받기 어렵다.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세대도 고통과 마주하고 있다. 어쩌면 ‘빈곤’과 ‘자살’이라는 한층 절실한 문제들과 직면한 세대는... 오히려 고령자 세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젊은 세대가 부모세대보다 살날이 좀 많이 남았을 뿐, 살아가는 고통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문제라고 봤다. 그런데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서도 젊은이들은 행복을 느낀다. 불경기이긴 하지만, 21세기 일본은 물질적으로 풍요롭다. 청년들은 단기고용, 계약직의 최저시급을 받더라도 ‘유니클로’, ‘자라’ 같은 중저가 옷을 사 입고, 닌텐도 등 컴퓨터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정치, 경제가 제 기능을 못해도 당장은 눈앞의 소소한 행복을 즐길 수 있다. 물론 그 행복은 당장이라도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나이 들어 시급인생 조차 살 수 없게 되면 깨지고 말 것이지만. 

그렇다면 청년들은 ‘응답하지 않는 국가’에 왜 저항하지 않을까. 저자는 일본 청년들도 고용, 복지, 저출산이라는 거대한 문제에 완전히 침묵하고 있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인터넷 미디어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매개로 ‘작은 위로의 공동체’를 만들고 그 안에서 서로 위로하고 공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슬랙티비즘(게으른 행동주의)’에 불과하다. ‘게으른 사람’을 뜻하는 슬래커(Slacker)와 행동주의(Activism)를 조합한 말이다. 이런 소심하고 게으른 저항은 세상을 전혀 바꾸지 못한다. 

▲ 이 땅을 살아가는 청년 한명 한명의 행복은 그저 희생대상일 뿐이었다. ⓒ flickr

마치 득도(得道)라도 한 것처럼 돈이나 출세에 관심 없이 살아가는 ‘사토리(さとり)세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解脫)의 경지에 이른 듯 사는 자기충족적 ‘컨서머토리(consummatory)족’ 등이 오늘날 일본 청년세대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책은 ‘왠지 행복하고, 왠지 불안하다’는 말로 끝맺는다. 저자 역시 현재의 비극을 어찌 극복할 것인지,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지 제시하지는 못했다.

남 얘기가 아닌 이웃나라의 현실

일본 청년들의 ‘자포자기’에 비하면 우리 청년들은 아직 기개가 ‘살아있는’ 편이다. 지난 연말 대학가에는 현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최씨 아저씨께 보내는 협박편지’, ‘최경환 학생, 답안지 받아가세요-F학점’ 등의 제목으로 나붙었다. 일부 대자보는 후루이치가 ‘국가권력의 책임을 교묘히 가린다’고 비판한 ‘세대전쟁론’의 시각도 드러냈지만 저항 없이 미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만은 넘쳤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정규직 과보호론’을 내세우며 일자리의 질을 점점 더 낮추려는 정부와 재계의 힘 앞에서, 사회의 첫출발을 불안한 비정규직 일자리에서 해야만 하는 ‘장그래’들이 대다수인 현실에서. ‘절망하면 행복하다’는 일본산 수입품이 어느새 우리 시장을 장악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자신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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