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밀양구술프로젝트 '밀양을 살다'

책장을 덮으니 ‘할매들’의 음성이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다. 경남 밀양에서 송전탑 가설 반대투쟁을 벌이고 있는 마을 노인들의 이야기를 구술 받아 기록한 책 <밀양을 살다>에는 질박한 경상도 사투리가 넘쳐났다. 

“오만 전쟁 다 봐도 이렇지는 안 했다. 이건 전쟁이다. 이 전쟁이 제일 큰 전쟁이다. 내가 대가리 털 나고 처음 봤어...근데 이거는 밤낮도 없고, 시간도 없고. 이건 마 사람을 조지는 거지. 순사들이 지랄병 하는 거 보래이. 간이 바짝바짝 마른다. 못 본다 카이, 못 봐.” (김말해 할머니) 

“이 선산밑에 선조 조상님 다 누버 계신 여게 철탑이 들어선다면 말도 아이거든. 그러니 나는 참 시아버지한테 받은 말이 있어서, 그래서 내가 어예 해도 막아야 하는데 못 막고 (저승에) 가면은 시아버지가 나를 안 봐요.” (희경 할머니)

▲ 밀양구술프로젝트 지음, <밀양을 살다> 표지 ⓒ 오월의봄

지난 4월 도서출판 오월의봄에서 펴낸 이 책은 인권운동가 미류, 르포작가 희정 등 17명의  활동가로 구성된 ‘밀양구술프로젝트’팀이 지난해 12월부터 주민 17명을 공들여 인터뷰한 결과물이다. 노부부가 함께 한 경우를 포함해 모두 15편의 글로 정리됐는데, 구술에 참여한 주민은 대부분 70~80대의 할머니들이다. 구술프로젝트팀은 정부와 한국전력이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이는 송전탑 공사가 중단되길 바라면서, 무엇보다 힘든 싸움을 벌여온 이들의 아픈 역사가 잊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록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할매들은 왜 투사가 되었을까

‘밀양이 전하는 열다섯 편의 아리랑’이라는 부제처럼 책에 담긴 할머니들의 인생은 ‘한스러움’ 그 자체였다. ‘여자는 배워서 써먹을 데가 없다’는 말을 들으며 학업을 포기했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살라고 해서 아무 연고도 없는 동네로 떠나오기도 했다. 자식 먹이고 기르느라 자기 인생은 늘 뒷전이었다. 세월이 흘러 남편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가고, 자식들은 외지로 나가 저희들 삶을 산다. 촌에 남겨진 할매들은 외롭고 아프다.

“참 많이도 내를 써뭇다(나를 써먹었다).” (조계순 할머니)

외로움도, 육신의 고통도 견디는 그녀들이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 손발톱 뭉개지도록 일하며 가꾼 터전에서 쫓겨나게 됐다는 사실이다. 평생 농사짓고 살아 온 논밭과 집 근처 등에 765킬로볼트(kV)의 ‘신고리-북경남’ 고압송전탑 건설이 추진되면서 주민들은 쥐꼬리만한 보상금과 삶의 터전을 맞바꾸라는 압력을 받게 됐다. 2005년 환경영향평가로 주민들에게 알려진 뒤 지난 10년 동안 주민들은 저항했고, 송전탑 건설을 몸으로 막았다. ‘서울 등 대도시에 전기를 보내기 위해 못사는 지방에 원자력발전소와 송전탑을 짓느라 주민들의 삶을 파괴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도 싸우면서 더욱 굳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항의해도 고압적인 정부와 한전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으니 너무나 억울해서 마을 주민 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도 벌어졌다. 

할매들은 절박하다.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데도 매일같이 마을 뒤편 화악산을 오른다. 젊은이들이 1시간이면 오르는 야트막한 언덕이지만 그녀들에게는 2시간, 3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오른다. 송전탑 공사를 저지하기 위해 세워둔 움막에서 번갈아 가며 한나절, 혹은 하루 종일을 보낸다. 냉기가 흐르는 흙바닥이 고스란히 살갗에 느껴지고, 한 몸 누이기도 불편할 만큼 좁아도 옹기종기 모여 서로를 다독인다.

그 작은 움막 속에서 할매들은 꿈꾼다. 그저 밀양에서 계속 사는 것. 늘 그래왔듯이 이웃들과 새참을 나눠 먹으며, 죽는 날까지 이대로 사는 게 그녀들의 마지막 꿈이다. 하지만 현실은 가혹하다. 주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송전탑 공사는 강행되고 있고, 경남지방경찰청과 밀양시는 주민들이 세운 농성장과 움막을 11일 행정대집행을 통해 철거하겠다고 통고했다. 공사를 막아보겠다고 이리저리 다니는 할매들의 몸은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힘이 없다.

“따라다니다가 너무 힘이 들어, 한 군데 너무 힘든 자리에 하루에 세 번 가면 눈물밖에 안 나온다. ‘왜 여기 따라 댕기야 되나…’ 그래 그카고 (용역이) 우리보고 부릅니다. 따라오라고. 그것들이 날로 고생시킬라고. 용역 저거 따라와 가 막아달라고. 나무 베는 거 막으라고. 그래 부릅니다. 우리를 개 부르듯이.”(곽정섭 할머니)

▲ 지난 1월 6일. 113~115번 송전탑이 가로질러 지나가는 고답마을에서 생긴 충돌. 여경과 밀양 주민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 날만 해도 할머니 한 분이 손등에 상해를 입기도 했다. 공권력과의 대치는 할머니들에게 일상이다. ⓒ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이들을 덮친 시련 

세월호와 밀양, 그리고 해군기지 건설이 강행되고 있는 제주 강정은 닮았다. 남에게 피해 줄 줄 모르고 착하게 살아온 사람들,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덮친 참사와 불행이다. 밀양 할매들은 지난 3일 송전탑 공사 현장의 움막 농성장에서 지원자들과 함께 ‘세월호 추모 촛불 문화제’를 열었다. 남의 일 같지 않다는 마음에서였다. 집회에 참가한 이들은 “위험한 줄 알면서도 수명 연장을 했다는 점에서 고리 원전이나 세월호나 마찬가지다”, “국가가 국민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세월호와 밀양이 닮았다”고 입을 모았다. 개발주의, 성장지상주의를 앞세워 약자들의 삶을 황폐화시키는 정부의 행태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피해자는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절망 속에서도 손을 맞잡은 시민들의 연대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월호 추모 촛불문화제에서 송전탑 반대 주민들은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와 그 가족들에게 공개편지를 보냈다. 함께 힘을 모은다면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담아. 편지의 첫머리는 밀양 주민들의 절규 같기도,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 같기도 했다.  

“우리 함께 손을 잡고 이 끔찍한 시간을 견뎌내십시다.”

▲ 지난 3일 밀양 송전탑 반대 주민들이 세월호 참사 관련해 추모 촛불 집회를 열었다. ⓒ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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