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박동국 기자

▲ 박동국 기자

나는 호모 데데쿠스(homo dédĕcus). 비행(非行)하는 인간이다. 어린 나이에 말썽쟁이 소리를 들으며 동네방네 사고를 치고 다녔다. 어머니 회초리로도 막을 수 없던 짓궂은 장난은 결국 도를 넘고 말았다. 초등학교 3학년에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에는 ‘비행 청소년’ 용문이 형이 있었다. 형의 당시 나이는 17살. 고등학교 1학년 나이였다. ‘대포집’ 입간판 내건 허름한 막걸리 집에서 할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다. 용문이 형은 재미있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야한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으니 우리에겐 ‘이거(최고)’였다. 형을 따르는 동네 또래 아이들이 다섯. ‘단구동 카르텔’이었다.

맹랑한 짓도 많이 했다. 복도식 아파트 16층 꼭대기의 난간 벽에 매달린 채 누가 오래 버티나 내기하며 놀기도 했다. 형의 지시가 떨어지면 아파트 각 복도층을 잽싸게 뛰며 복도에 비치된 분말형 소화기를 온 벽에 뿌리기도 했다. 누렇던 아파트는 그날만은 새하얬다.

형과 덩달아 나도 학교에 가지 않은 날이었다. 오락실 옆에 주차해놓은 파란색 봉고 트럭 위에 음료수 ‘카프리 썬’이 박스째 놓여있었다. 형은 갖고 달아나라고 지시했다. 트럭 가까이 갔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잽싸게 가지고 튀었다. 훔쳐온 음료수는 형과 반반 나누어 가졌다. 다음날 담임 선생님이 무서운 얼굴로 몽둥이를 들고 어제 일을 이실직고하라고 했다. 내가 훔쳐 가는 것을 같은 반 친구가 본 모양이었다. 울고 불며 모두 자백했다. 그날 이후 형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경찰에 붙잡혀갔던 걸까? 아무도 모른다. 아직 소식을 듣지 못 했다. ‘형’이라는 중심을 잃자 단구동 카르텔은 해체됐다.

그 날 이후 내게 병적인 윤리적 규범이 생겼다. 더 이상 ‘비행하는 인간’이 되지 않기로 했다. 길거리에 쓰레기 하나 버리기 두려울 정도로 ‘삐딱선’을 경계하는 후유증이 생겼다.

나는 호모 라보르(Homo Labor). 노동하는 인간이다. 일하는 것을 즐긴다. 힘든 일을 하고 흘리는 땀은 성취감이라는 마약이 돼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까닭이다. ‘노동’의 시작은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부터였다.

'군고구마'를 팔기로 마음을 먹었다. 동업자로 반 친구 한 명을 영입했다. 친구와 모은 푼돈으로 ‘고구마 구이통’을 샀다. 추운 겨울 호호 불며 먹는 군고구마가 인기일 거란 예상은 날카로운 강원도 바람 앞에서 빗나갔다. 보름 가까이 지났지만 매출은 2만 원에 불과했다. 텅텅 빈 겨울 거리만큼이나 우리의 ‘전대’도 텅텅 비어갔다. 통과 고구마를 사는 데 들어간 투자금이 얼만데, 애썼지만 돈은 돈대로 날리고 군고구마 장사는 ‘부도’ 수순을 밟고 있었다.

배를 곯고 궁지에 몰리면 번뜩 ‘생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별안간 떠오른 생각에 집에서 자전거와 A4종이를 가져왔다. 매직 펜으로 적어나갔다. [군 고구마 배달. 4개 3천 원. 8개 5천 원. 전화:011…] 전단지를 인근 아파트에 붙였다. 30분 뒤 전화가 왔다. “5천 원어치 배달 좀 해주세요.” “네 그러믄요. 금방 갑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친구와 하이파이브. 그리고 시작된 자전거 배달. 밤안개마저 얼어붙은 겨울바람에 손이 어는 줄도 모르고 페달을 밟고 달렸다. 배달을 완수하고 손에 쥔 아직 타인의 온기가 남아 있는 5천 원. 그 돈을 ‘핫 팩’으로 삼고 다시 돌아왔을 때, 친구는 주문이 3개나 더 밀렸다며 배달을 재촉했다.
그날은 한파가 몰아치던 날이었지만, 페달을 밟으며 흐뭇하게 웃는 내 얼굴만큼은 봄기운이 서려있었다. 그날 이후 평균 매출은 하루 9만 원이었다.

노동은 그렇게 나를 매료시켰다. 앞으로 내가 갖게 될 직업이 무엇일지 가슴이 설렜다. 어떤 노동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호모 비블로스(Homo Biblos). 기록하는 인간이다. 내 하루를 블로그에 기록할 뿐만 아니라 사회를 기록하고 인간을 기록한다. 기록은 기억보다 오래가는 까닭이다.

세월호 참사로 아이를 잃어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희생자 유족들이 지난 7월 안산에서 서울 광화문까지 백리 길을 도보행진했다. 이들은 하늘나라로 수학여행을 떠나야만 했던 아이들의 억울한 사고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한걸음 한걸음마다 세월호 특별법의 염원을 담기로 했다.

1박 2일 일정을 영상에 담아 4부작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3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는 [세월호 100일 다큐 - 2반의 빠삐용들]이라는 제목으로 유튜브와 인터넷 등지로 퍼졌다.

이들은 서로를 빠삐용이라고 부른다. 대한민국을 비탄 그 자체로 만들었던 4월 16일. 아이들이 영화 빠삐용의 주인공처럼 자유를 위해 세월호를 탈출했어야 한다는 마음에 아쉬움을 담은 이름이다.

술기운 없이는 잠을 이룰 수 없다는 그들이들과 맥주를 한 잔을 같이 하며 구구절절한 사연을 들었다. 아이들이 있는 팽목항의 차가운 바닷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수없이 담배를 태웠다는 세영이 아빠는 술만 먹으면 눈시울을 붉혔다.

2반의 반장 서우 아빠는 자신의 이름을 잊기로 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서우 아빠'라고 불러줌으로써 아이를 평생 가슴에 담고 싶어 했다. 하영이 엄마는 도보 행진 간 휴식 시간마다 딸아이의 생전 흔적이 남아있는 페이스북을 연신 들여다봤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밤, 광화문 광장에 빽빽이 들어선 경찰이 유족의 길을 가로막았다. 들고 가던 영정이 비에 젖자 그들은 오열했다. ‘바닷가에서도 그렇게 물먹었는데, 내 새끼 비를 맞게 해.’ 소정이 엄마는 주저앉아 울었다.

유족들은 내게 간절히 부탁했다. '진실만을 보도해주는 기자가 돼 주세요. 더 이상 우리 같은 사람 만들지 말아주세요.' 그때 저널리즘은 인간을 향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사회를 기록하고, 인간을 기록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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