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보수'

▲ 황종원 기자

“나는 보수적이다”라고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젊을 때 진보가 아니면 가슴이 없고 늙어서 진보면 머리가 없다’고 믿는 사람이 내 말을 듣는다면 나에게 가슴이 없다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쩌겠나, 아무리 생각해도 난 보수인 걸.

일단, 나는 변화가 싫다. 새로운 것에 막연한 거부감이 있다. 어쩔 수 없이 변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게 좋다. 욕심 같아서는 5살에 살던 집이 50살에도 그대로였으면 좋겠고, 7살에 뛰놀던 뒷동산이 70살까지 보존됐으면 좋겠다. 어쩔 수 없이 변해야 한다면 천천히, 느릿느릿 변하는 게 좋다. 

예의범절이나 도덕도 잘 지키려 노력한다. 절제와 겸손, 성실, 의무, 신중함 등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실체가 없다 생각하면서도 ‘민족’이란 말에 흔들리고, ‘대한민국’이란 말에 가슴 끓는다. 국가를 지키면 국가도 내 가족을 지켜줄 거란 믿음으로 군복무도 성실히 이행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보수를 자처하는 세력은 이상하다. 완만한 변화를 추구해야 할 보수가 급격한 변화를 추구한다. 있는 건물을 부수지 못해 안달이고, 보존해야 할 자연에 인공물을 세우지 못해 안달이다. 덕분에 그대로이길 바랐던 옛집과 뒷동산은 7살 아이가 학업을 마치기도 전에 아파트촌이 됐다. 

이뿐이랴. 보수 세력은 자유무역협정(FTA)도 초고속으로 추진하길 원한다. 한 나라의 시장 개방이 어디 뒷간 문짝 여는 것처럼 급하고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단번에 빨리 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며 신경질을 낸다. 우리 집 현관문을 열 때도 상대방이 누군지, 무슨 목적이 있어 왔는지 따져 묻는데 보수세력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맨발로 뛰쳐나가 문을 열어주려 한다. 보수 세력에게 그 협정이 무슨 보험이라도 되나? 

얼마 전에는 우리나라 국적도 없고 다른 나라에 충성 맹세까지 한 인물을 장관후보자로 올렸다. 외국인을 국가 요직에 앉히는 것은 진보도 망설일 만한 급진적 결정인데, 우리나라 보수세력은 태연자약하게 그런 결정을 한다. 예의 없고 기품 없고 신중치 못한 언행으로 국민들을 분노하게 하고, 도덕은 고사하고 법조차 지키지 않는다. 도대체 어딜 봐서 보수라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보수세력이 군대는 왜 그렇게 안 간 건지……. 

이런 상황에서 내가 보수적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건물 부수고, 자연 파괴하고, 예의 없고, 기품 없고, 부도덕하고, 군대도 안 갈 놈’이라 선언하는 꼴이 아닌가? 그런 오해를 받고 싶지는 않다. 나는 무엇이든 오래 쓰는 걸 좋아하고, 자연도 그 상태로 두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하며, 군대는 진작 다녀와서 예비군도 끝나간다. 

그래서 나는 진보로 위장하고 다닌다. 어울리지 않는 가면을 쓰고 있는 꼴이다. 쓰고 있으면서도 불편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 나라에서는 진보라 불리는 세력이 오히려 도덕적이고, 자연 걱정하고, 나라 걱정하고, 군대까지 잘 다녀온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면은 가면이다. 보신책으로 가면을 쓰곤 있지만 평생 가면을 쓰고 살 수는 없다. ‘오페라의 유령’도 아닌데 내가 왜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나? 이런 마음을 담아, 우리나라 보수라 자칭하는 이들에게 간절히 부탁한다. “나는 ‘보수’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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