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비정규직’

▲ 강명연 기자
몇 해 전 여름, 저녁시간이 지나 카드배달을 하는 사람이 우리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새까맣게 탄 손과 팔, 흙이 잔뜩 묻은 군화와 안전모. 아버지 카드를 배달하러 온 그 중년 남성은 방금 전까지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던 인부의 모습이었다. “카드를 대신 수령하려면 주민번호 생년월일 뒷자리 3개와 주민등록증 발급 날짜를 알아야 하는데......”

그의 말투는 어눌했지만 성실하고 정직한 삶을 그대로 드러냈다. 겉모습에서 느낀 순간의 이질감은 어느새 연민으로 변했다. 낮에는 일용직으로, 밤에는 카드배달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사람. 문 앞에 나와 보지도 않고 “내일 오시라”고 소리친 엄마가 미웠다. 그에게는 건수가 곧 일당일 텐데. 필요한 정보를 문자로 보내드리겠다는 약속에 그는 감사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는 누구보다 버거울 것이다. 하루 벌어 하루를 근근이 먹고 사는 생활을 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도 그런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국가의 역할은 여기서 출발한다. 삶의 출발선에서부터 존재하는 불평등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것, 실패한 사람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고 모든 국민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 이것이 정의로운 국가의 역할이다.

한때 한국사회에 불었던 정의 열풍은 정의가 실종된 사회임을 반증한다. 정의롭지 못한 정부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4∙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 87년 6월항쟁은 불의에 저항해온 한국 현대사의 단면들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치권력이 장악한 국민주권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해온, 민주주의를 향한 진보의 과정이었다.

민주주의를 획득한 국민이 투쟁해야 할 다음 대상은 경제적 불평등이다. 분배의 정의는 경제가 고도화할수록 왜곡돼왔다. 한국사회에서 성실함은 더 이상 경제적 부의 결정적 요인이 아니다. 노동의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 노동이 경시되는 사회다. 자본은 어느새 노동의 지위를 격하시켜버렸다. 이건희 일가는 5%가 채 안 되는 지분으로 세계 초일류기업 삼성전자와 그룹 전체를 지배한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비아냥은 이미 낡은 수식어다. 자본이 곧 권력이 되어버린 대한민국에서 정의는 부자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논리인 때가 많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국민을 가진 자로 한정하곤 한다. 국민 대다수의 권리는 무시되거나 외면당하는 것이 현실이다. 성공한 부자들은 정치권력을 돈으로 산다. 이것은 경제적 불평등을 다른 영역의 불평등으로 확장시킨다.

국민의 권리는 노동 가치의 회복을 통해 정의롭게 실현될 수 있다. 국민 대다수는 노동자다. 노동자의 경제활동이 국민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동이 천대받고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한 불평등의 근원을 해결할 수 없다. 카드배달을 하는 사람이 ‘투잡’을 뛰지 않아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사회, 그것이 정의로운 사회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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