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여성 비하’

▲ 박동국 기자

'재산깨나 있는 독신남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페미니스트 여성작가인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 첫 문장에서 남성 중심 사고를 발견하는 것 뜻밖이다. 이 문장은 얼핏 '여자들은 경제력이 없으니 살아남기 위해 돈 있는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오스틴은 가부장 사회의 호된 비판에도 움츠러들지 않고 독립적 여성 캐릭터를 창조한 ‘원조 페미니스트’다. 이 문장을 쓴 이유는 마초를 찬미해서라기보다 폭력적 남성성에 맞서려는 의도였다.

스페인어로 남성다움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남자를 지칭하는 ‘마초’(macho)에게 여성은 인생 행로에서 선택권이 거의 없는 존재다. 운명을 결정하는 건 남성이고, 여성은 속수무책으로 따라가야 한다. 여성은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남성우월 사고가 깔려있다. ‘마초’는 여자한테서 아름다움과 여성적 순종을 요구하고, 대신 여자에게 자신의 힘과 권력을 함께 향유하게 한다.

‘마초’ 현상은 온라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김치녀’ 호칭과 동전의 앞뒤 면처럼 연결돼 있다. 알다시피 ‘김치녀’는 분수에 맞지 않게 사치를 일삼거나 권리만을 과도하게 주장하는 한국 여성을 일컫는 속어다. ‘된장녀’와 비슷하지만 함의는 더 노골적이다. 스페인어에서 ‘마초’가 경제력이 부족한 ‘약자’인 여성을 남성이 지켜줘야 한다는 말에서 비롯됐다면, ‘김치녀’는 속물적 이득을 바라고 남성의 보호와 경제력을 갈구하는 여성을 비하하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김치녀’는 주로 남성들이 여성 혐오의 뜻을 담아 부르는 호칭이다. 신파극 <이수일과 심순애>에서 김중배의 다이아몬드를 선택한 여자를 깔보는 남성관객의 심리와 통하는 데가 있다.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이들의 보상심리를 충족시키는 말일 수도 있겠다. ‘나는 격이 다른 사람’이란 점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여성을 남성의 하위 권력으로 설정하고 극단적 경쟁사회가 낳은 불안과 절망의 근원을 여성 전체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여성 비하 용어는 ‘마초’임을 과시하려는 남성 집단에서 더 많이 사용된다. ‘김치녀’가 ‘일베(일간베스트)'에서 많이 거론된 이유다. ‘마초’가 되지 못한 남자들이 그 열등감을 상대적 약자인 여성을 공격함으로써 만회하려 한다. 여성의 삶과 가치를 희롱하는 것은 잃어버린 남성성을 되찾기 위한 허약한 남자들의 고육지책일 수도 있다. ‘일베’라는 거대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김치녀 몰이’에 나서다 보니 특정 여자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여성성 자체에 대한 혐오로 확산됐다. 여성 비하는 진정한 남자다움을 상실한 남자들이 ‘자신의 문제’를 ‘여성의 결점’을 부각시켜 은폐하려는 비겁한 행동이다.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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