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사전] '헤게모니'

▲ 남건우 기자
점심시간에 뭘 할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놀 만하면 끝나버리는 쉬는 시간과 달리 한참 놀 수 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을 주도하는 사람이 곧 우리 반 리더이다. 우식(右式)이와 나는 교탁을 사이에 두고 점심시간에 뭘 할지 다퉜다. 나는 왼쪽에 우식이는 오른쪽에 섰다.

우식이는 축구를 좋아한다. 언제나 축구를 하자고 했다. 우식이는 ‘다른 반을 이기자’며 친구들을 설득했다. 특히 우리와 사이가 좋지 않은 ‘윗반’ 이야기를 자주 했다. 같은 4학년이지만 우리 반보다 한 층 위에 있는 윗반은 쉬는 시간마다 뛰어다녀 시끄럽게 하거나 칠판지우개를 창문 밖에 털어 아랫반인 우리 반에 분필 가루를 날렸다. “연습 안 하다가 우리가 윗반이랑 축구해서 지면 어떡할래”는 우식이 단골 멘트였다.

우리 반은 그렇게 둘로 갈렸다. 나는 축구 하기 싫은 친구들에게 강요하지 말고, 못해도 욕하지 말고, 공격수는 돌아가면서 하자고 했다. 우식이 역시 이에 동감해 잘하건 못하건 누구나 축구를 할 수 있고, 못하는 친구 연습을 잘하는 친구가 도와주기로 약속했다. 결국 리더는 우식이 됐다. 우리 반은 점심시간마다 축구를 했다. 축구를 싫어하는 몇몇 친구들은 하지 않았지만, 우식이는 특별히 그 아이들에게 뭐라 하진 않았다.

한 달 전 진우(眞右)라는 아이가 전학을 왔다. 진우는 축구를 정말 좋아한다. 전학 오자마자 축구 이야기만 했다. 이 반에서 누가 제일 축구를 잘하느냐며, 자기와 겨뤄보자고도 했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긴 진우는 그렇게 우리 반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진우 앞에서는 우식이도 축구를 덜 좋아하는 아이가 돼버렸다. 우식이와 달리 진우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점심시간에 축구를 하자고 강요했다.

진우는 윗반 얘기를 더 많이 했다. 윗반 아이가 “아랫반은 우리에게 상대도 안 돼”라고 말했다는 진우 말에 아이들은 흥분했다. 우리 복도 앞에서 윗반이 축구연습을 하고, 윗반 공격수가 찬 공에 우리 반 연평이 안경이 부서지는 사건이 일어나자 진우는 더욱 인기를 얻었다. 나와 우식이가 그랬던 것처럼 우식이와 진우는 교탁을 사이에 두고 점심시간 주도권을 가지려고 다퉜다. 우식이가 왼쪽, 진우는 오른쪽에 섰다. 이번에는 진우가 리더가 됐다.

진우는 윗반은 물론 전교 어느 반에도 축구로는 질 수 없다며 무한경쟁 시스템을 도입했다. 모든 아이를 주전과 후보로 나눴다. 후보는 자기 축구화를 주전이 원할 때 빌려주고, 연습할 때 물을 떠 오거나 간식을 사오는 등 잘하는 친구가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했다. 후보에게는 알아서 연습해서 주전이 되라고 했다. 우식이는 불공평하다며 팽팽히 맞섰다.

이제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축구 이야기만 한다. 축구를 더 좋아하고 덜 좋아하고 차이일 뿐 모두 축구다. 진우와 우식이는 오늘도 오른쪽과 왼쪽에 서서 다툰다. 진우가 온 이후 나는 설 자리를 잃었다. 아무도 내 얘기를 듣지 않는다. 진우는 심지어 축구 말고 다른 걸 하자는 나를 ‘윗반 스파이’라고 놀렸다. 내가 윗반과 짜고 우리 반 축구연습을 방해한다고 했다. 윗반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는 평강이나, 점심시간을 이용해 화분에 물을 주고 싶다는 초록이 역시 ‘윗반 스파이’로 매도되어 ‘왕따’를 당했다. 제발 축구 말고 다른 얘기도 하고 싶은데……


보들레르가 ‘모든 능력들의 여왕'이라고 말한 상상력이 학문 수련 과정에서 감퇴하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과 예술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옥죄는 논리의 틀이나 주장의 강박감도 벗어 던지고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상상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튜토리얼(Tutorial) 과정에서 제시어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여러분만의 ‘상상 사전’이 점점 두터워질 겁니다.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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