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김혜영 기자

▲ 김혜영 기자

2013년 재계순위 38위였던 동양그룹의 현재현 회장이 지난달 28일 구속 기소됐다. 부도 날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업어음(CP)과 회사채를 마구 발행해 4만여 개인투자자들에게 1조원 넘는 손해를 끼치고, 횡령·배임·분식회계 등 불법을 저질렀다는 이유다. ㈜동양 등 주요 계열사 5곳이 법정관리에 넘어간 동양그룹 사태는 계열사들을 줄줄이 엮어 놓은 순환출자, 그룹 금융사를 사금고처럼 활용한 ‘금산결합’, 대주주 일가가 전 계열사를 좌우한 ‘황제경영’ 등 우리나라 재벌의 문제점을 다시 한 번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래서 야당은 물론 여당인 새누리당 일각에서도 ‘동양 사태를 계기로 재벌개혁 등 경제민주화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각성이 나왔지만 청와대와 정부의 분위기는 딴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경제활성화와 민생안정을 위해 국가적 역량을 집중해 나갈 것”이라며 ‘경제활성화’에 방점을 찍었다. 이어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는 “기업투자와 관련된 규제를 백지상태에서 전면 재검토하겠다”며 규제완화 의지를 피력했다. 경제사령탑인 현오석 부총리는 “투자 많이 한 기업인은 업어드려야 한다”는 대통령의 말을 실천하듯 사진기자들 앞에서 실제로 한 기업인을 업어주었다. 그가 지휘하는 경제부처들은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크루즈산업육성법 등 규제완화를 골자로 하는 경제활성화 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 따르면 박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경제민주화 과제들은 겨우 22%의 이행률을 기록한 채 정부의 ‘개혁 리스트’에서 지워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박 대통령이 “재벌뿐 아니라 중소기업과 자영업자, 노동자도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경제민주화를 꼭 이루겠다”며 대선에서 표를 호소하던 모습과 너무 대조적이다. 당시 박 후보는 “대기업의 경제력집중을 막고 경제적 약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경제민주화는 모든 국민이 100% 행복한 나라를 위한 첫 걸음”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취임 후 ‘모든 노인에게 기초노령연금 20만원 지급’ ‘4대 중증질환 의료비 완전보장’ 등 주요 복지공약을 퇴보시킨 데 이어 경제민주화 약속마저 저버리는 대통령의 모습은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라는 자화상을 몹시 무색하게 만든다.

지켜지지 않는 약속은 국민들의 고단한 삶에 비극을 더한다. 동양증권 창구에서 그룹 계열사의 기업어음과 회사채를 팔았던 한 여직원은 “(회사를 믿은)직원들에게 이럴 수는 없다”는 유서를 현 회장에게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금산분리, 즉 산업재벌이 금융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원칙을 강화하고 정부가 제대로 규제했다면 이런 참담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희생자를 낸 동양 사태에도 불구하고 경제민주화 약속을 팽개치는 정부의 행보는 또 다른 동양 사태와 또 다른 중소기업·자영업자·노동자·개미투자자의 비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대통령이 공약한 ‘모든 국민이 100% 행복한 사회’ 대신 ‘재벌만 100% 행복한 사회’가 고착되는 것을 막으려면 길 잃은 경제민주화를 당장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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