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스쿨 인문교양특강]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주제 ① 인생 설계를 위한 철학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한 지는 백 년 정도밖에 안 됐습니다. 갑오개혁(1894) 전까지만 하더라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어떻게 살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고민할 이유가 없었죠.”

‘진로고민’은 ‘행복한 고민’이다. 서울 중동고 교사이자 철학자인 안광복 박사는 ‘부모가 농부면 자식도 농부, 부모가 상인이면 자식도 상인’으로 살아야 했던 직업 세습의 시대에 비하면 자신이 주체적으로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지금은 무엇이든 가능한 시대라고 말했다. 20세기 이후, 인류는 역사상 최초로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시대를 살게 됐다. 그러나 오늘날 젊은이들은 진로 선택의 자유를 행복이 아닌 불행에 가깝게 느낀다. 안 박사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 오늘날은 직업이 세습되지 않는 열린 가능성의 시대지만 진로 선택의 자유를 불행으로 느끼는 사람이 많다. 안 박사는 행복한 인생 설계를 위한 자신만의 '핵심가치'를 강조한다. ⓒ 이대용

조기 진로교육이 가능성을 좁힌다

첫째는 ‘교육’이다. 그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말한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해 인간만이 가진 특징을 강조했다. 망치로 태어나면 망치로, 송아지로 태어나면 송아지로밖에 살 수 없는 물건이나 가축과 달리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 때문에 인류 역사상 모든 고등교육은 자유인을 만들기 위해 행해졌다. 한 인간이 가진 가능성을 넓게 보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게 교육이었다. 지금의 교육은 정반대로 간다. 조기 진로교육을 통해 가능성을 최대한 좁힌다. 안 박사는 이에 대해 “자유를 반납하고 노예 상태로 돌아가려는 역설적인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자유인을 ‘망치’로 만드는 진로교육 앞에서 진로 선택의 자유는 불행이 된다.

또 다른 이유는 ‘인생 진도표’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미국의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리드 타임’(Lead Time)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제품 생산 준비부터 대기∙공정 등의 과정을 거쳐 제품이 소비자에게 전달되기까지 각각의 소요시간을 설명했다. 리드 타임을 알면 현재 상황에 따라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각 소요시간은 대략 정해진 범위가 있어 소비자에게 제품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언제 제품 생산을 시작해야 할지를 예상할 수 있다.

리드 타임은 과거 인간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었다. 삶의 형태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약관(弱冠: 20세)에는 진학, 이립(而立: 30세)에는 취업과 결혼, 불혹(不惑: 40세)에는 육아와 직장 등과 같이 각 나이대에 따른 진도와 평가치가 정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 과거의 인생진도표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30세 무렵에 취업과 결혼에 모두 성공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70세였던 평균 수명이 100세까지 늘어나면서 인생진도표 자체가 길어졌기 때문이다.

▲ 70세였던 평균수명이 100세까지 늘어나면서 과거의 '인생진도표'에 맞춰 살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진도표에 인생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 안광복

문제는 그럼에도 우리가 여전히 과거와 같은 인생진도표에 맞춰 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다는 데 있다. 그러다 보니 편의점 아르바이트 자리를 두고 청년과 노인이 경쟁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다. 정해진 인생진도표가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하나의 수단이 된 것이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것 

“변화를 읽지 못하고 관성대로 살아간다면 99% 이상은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을 주체적으로 설계하기 위해 안 박사가 강조하는 것은 ‘관점을 바꾸는 것’이다. 그는 성능이 나날이 발전하는 스마트폰이 아이콘을 여전히 19세기 물건의 모양새인 통화는 전화기, 연락처는 수첩 등으로 표시하는 것을 지적하며, 관점의 관성을 바꾸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설명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어떻게(How)’가 아닌 ‘왜(Why)’를 물으며 사회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을 바꿔나간다.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는 게 과연 맞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생은 의외로 거의 비슷해요. 조지프 캠밸(Joseph Campbell)이 지적했듯이 전 세계 신화들은 비슷한 패턴을 가집니다. 할리우드 영화도 마찬가지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주인공이 어느 날 닥쳐온 위기를 스승의 도움으로 극복하고 결국 행복한 결말을 맞는 식이죠.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는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

안 박사는 지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인생진도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인생의 디폴트 포인트(Default Point) 즉, 출발점이다. 신화나 영화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행복한 어린 시절’이 우리 모두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소중하고 남과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을 인생 초반에 가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 기억이 앞으로 살아갈 인생 전반의 가능성을 높이는 자존감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 안 박사는 실수와 실패를 인정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을 통해 상처를 극복하고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 이대용

“‘학벌’은 태어나서 15세 이후 무너졌던 디폴트 포인트를 20세에 찾으려는 치열한 노력입니다. 명문대학에 진학함으로써 자존심을 세우고 디폴트 포인트를 높게 유지하게 되죠.”

성인이 되는 시점에 명문대학에 진학해 부모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 좌절감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다. 매년 신학기가 되면 문제가 되는 지나친 신입생 신고식 문화 등도 디폴트 포인트를 높게 유지하기 위해 만드는 과도한 진입 장벽이다. 리츄얼(Ritual), 곧 신고식은 이것을 쉽게 얻은 것이 아니라는 의식을 재확인하는 절차다. 안 박사는 우리 입시제도 자체가 대학에 대한 지나친 프라이드를 갖게 하는 리츄얼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서울대에 입학하는 학생은 전체 수험생의 0.4%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나머지는 20세 때 디폴트 포인트 형성에 실패하며 인생의 패배자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안 박사는 “인생에서 성취를 인증하는 토큰(Token)은 지적, 정서적, 도덕적으로 여러 방면에 존재하지만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지적인 토큰(학벌)에만 의미가 몰리고 있다”며 “가치 있는 인생을 만들 수 있는 자기만의 토큰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상처를 통해 무엇을 배웠나

의미를 찾는 리츄얼이 필요하다. 안 박사가 강조하는 것은 실수와 실패를 인정하고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진정한 리츄얼(Ritual)이다. 그는 “역사상 전쟁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지만 유독 미군들에게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많이 나타나는 이유는 적절한 리츄얼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부분 나라에서는 전쟁 후 귀환한 병사를 종교 사제들이 맞이해 “당신들은 역사발전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희생양 역할을 한 것”이라며 의미를 부여하고 고통을 치유하는 시간을 갖는다. 반면 미국은 전쟁 후의 모든 문제를 의료적으로만 접근해 고통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부여받지 못하기 때문에 더 큰 문제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 갇혔다 살아난 빅터 프랭클(Viktor E. Frankl)도 같은 맥락에서 로고테라피(Logotherapy)라는 심리요법을 창조했다. 로고테라피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건으로부터 의미를 찾아 이를 극복하게 하는 치료방법이다. ‘패배자에서 승리자로’ 인식을 전환하는 일종의 프레임을 만드는 것이다. 안 박사는 이처럼 “삶의 잣대는 단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빅터 프랭클 박사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모진 고문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자서전적 체험수기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썼다. 그 당시의 체험을 바탕으로 독특한 정신분석 치료법인 '로고테라피'를 만들기도 했다. ⓒ 김혜영

“일본군 병사는 잔인한 학살 당시의 기억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이는 그들이 가지는 명예에 대한 사회적 프레임 때문입니다. 만행을 저지를 때 희생자 대신 자신을 보는 동료들의 시선에만 집중하는 거죠.”

하나에 몰입하면 다른 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터널 효과’다. 안 박사는 사격 후에 5분 정도 시선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게 하는 것을 예로 들며 몰입 후 다시 몰입하기까지는 관점을 전환하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학교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사이에 소풍을 가고 축제를 하듯이 인생에서 하나의 과제를 쫓을 때는 중간중간 반드시 그것을 풀어주는 시기와 다른 관점을 찾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대로 지지 않는 사람은 욕망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스·페르시아·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원하는 것을 묻는 자신에게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달라”고 말한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보며 “내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니었더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행복의 기준을 돈이나 명예에만 두면 다른 행복을 놓친다. 모든 것을 다 가져야 행복한 왕은 햇빛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는 철학자를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래도 행복하기 위해

안 박사는 현대사회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한 자기 수양법으로 '페르소나를 갖출 것'을 주문한다. 그는 "우리는 운명이라는 대본을 연기하는 배우일 뿐"이라는 로마제국의 16대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인용하며, 사회생활은 곧 다중인격을 갖춰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기 역시 강연할 때, 상담할 때, 수업할 때 등 각 상황에 맞는 페르소나를 쓴다는 것이다.

▲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 안광복
지난해 10월 <경향신문>에 따르면 서울대 지역균형·기회균형 전형으로 선발된 학생들의 평균 졸업학점이 졸업생 전체 평균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균형 전형은 지역 인재를 대상으로, 기회균형 전형은 기초생활수급자·차상위계층·농어촌학생 등을 대상으로 선발한다.

안 박사는 이런 현상을 '인정욕구'로 설명한다. 그는 원하는 걸 얻기 위한 공부, 누군가를 위한 공부보다 인정받기 위한 공부를 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진짜 경쟁력은 '나만의 위대한 욕망'을 갖추는 것이라 강조했다. 사회생활을 위한 여러 가지 페르소나를 쓰더라도 삶에 대한 목적의식, 핵심가치가 있는 사람은 결코 내적인 혼란을 겪지 않는다는 것이다. 통합된 인격은 자아를 지탱한다. 

저급한 욕구는 삶도 저급하게 만든다

그는 '돈 많고 높은 자리에 있으면 '존경'받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관용'으로 상징되는 프랑스처럼, '인정'받기 위해서는 뚜렷한 자신만의 색채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색채가 분명한 사람은 인생의 '핵심가치' 역시 분명하다며 그가 강조한 것은 ‘버츄 프로젝트’(Virtue Project)라는 52가지 미덕의 보석들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미덕은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뚜렷한 가치와 목적의식을 가진 사람만이 흔들림 없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사랑, 관용, 헌신, 용기… 당신 인생의 '핵심가치'는 무엇인가?

▲ 전 세계 모든 문화권에서 소중히 여기는 360여 가지 미덕 가운데 52가지를 선별한 '버츄 프로젝트'는 우리에게 자신의 마음 속 보석(핵심가치)을 믿고 스스로의 인생을 가치롭게 여기며 살아가기를 주문한다. ⓒ 안광복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특강은 <인문교양특강I> <저널리즘특강> <인문교양특강II> <사회교양특강>으로 구성되고 매 학기 번갈아 가며 개설됩니다. 저널리즘스쿨이 인문사회학적 소양교육에 힘쓰는 이유는 그것이 언론인이 갖춰야 할 비판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의 토대가 되고, 인문사회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학기 <인문교양특강I>은 정희진, 진중권, 안광복, 주일우, 천정환, 이상수, 이택광 선생님이 강연을 맡았습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강연기사 쓰기 과제는 강의를 함께 듣는 지도교수의 데스크를 거쳐 <단비뉴스>에 연재됩니다.

* 이 기사가 유익했다면 아래 손가락을 눌러주세요. (로그인 불필요)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