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김혜영 기자

▲ 김혜영 기자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한다. 가난한 여주인공이 더 이상 부와 권력에 대한 열망을 고고한 자존심으로 숨기지 않듯, 주인공을 일방적으로 괴롭히기만 하는 악역의 전형도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악함에도 눈물이 있고, 선함에도 욕망이 개입한다는 사실을 브라운관 속 세상도 솔직히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인물의 심리를 다룬 작품들이 범람하는데도 꿋꿋이 주인공의 비범함과 인간승리의 여정에 주목하는 드라마도 있다. 사극(史劇)이다.

10월 22일 종영한 MBC <불의 여신 정이>는 조선 최초 여성 사기장(沙器匠)인 '정이'의 신분을 초월한 일과 사랑의 성공담을 다뤘다. 후속으로 방송되고 있는 <기황후> 역시 원나라로 끌려간 고려 공녀가 제1황후로 등극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의 역정을 따라가고 있다. 왕을 비롯한 귀족과 관료들의 업적에만 주목하던 때보다 신분과 배경은 다양해졌지만 사극은 여전히 ‘너무 위대하고, 뛰어난 주인공’에게 집중하는 영웅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역사에 대한 단편적 시각의 한계다.

역사는 길 위에 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말했지만 현실의 길 위에서 우리가 얼마나 과거와 '대화'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우리의 역사는 때로는 너무 뜨겁고, 때로는 너무 몰상식하다. 삼일절, 광복절, 5ㆍ18이 되면 의례히 나라를 위해 헌신한 독립투사와 국가유공자의 공을 찬양하지만, 한쪽에서는 버젓이 그들을 상식 이하 언어로 깎아내리고, ’5ㆍ18 북한군 개입설’ 따위를 진지하게 거론한다. 몰상식에는 끝이 없어 역사적 사실에 이념의 잣대를 들이밀고 색깔을 덧칠한다. 아예 역사 교과서를 바꿔버리려는 세력도 있다.

위인전과 교과서로 학습한 역사는 현실의 가치판단에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때도 있다. 지나치게 엄숙하고 거룩한 태도는 역사적으로 대립해온 나라로부터 ‘민도’(民度)를 의심받고, 생각하지 않고 외우기만 한 지식들은 오히려 생각을 방해하고 반감만 키우게 했다. ‘좌파와의 역사전쟁’이란 해괴한 언어가 대두된 지금이야말로 '역사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할 때다.
 
역사적 관점에 중립이란 없다. 중립의 기준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술자마다 가진 역사적 통찰력이 다르고 시야도 제각각이니 그들이 그려낸 역사 역시 일치하기 어렵다. 이것이 '역사를 가르친다'는 것의 특수성이다. 조지 오웰은 소설 <1984>에서 "현재를 지배하는 자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지배하는 자 미래를 지배한다"고 했다. ’지배’를 강조한다면 현재의 권력이 과거를 재구성해 미래 또한 소유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진짜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은 과거∙현재∙미래를 관통하는 역사의 힘이다.

"사실이란 자루와 같아서, 그 속에 무엇인가를 넣어주지 않으면 일어서지 않는다"는 카의 말처럼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자루를 세우는 '사고'의 힘이다. 역사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거기서 시작돼야 한다. 사실에 대한 명확한 가치 판단을 가지고, 나름대로 역사의 내러티브를 구성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친일 미화와 특정인에 대한 찬양으로 도배된 교과서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될 뿐이다. 문제는 생각을 가로막는 가르침과 우리가 생각하기를 바라지 않는 '현재를 지배하는 자'들이다.

역사는 취향이 될 수 없다. 현재를 바탕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선행되어야 할 것은 헌법적 가치의 정립이다. 독일 공영방송 ZDF의 드라마는 파시즘 치하에서 저항한 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대의 야만 속에서 변해가는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를 다룬 드라마는 사회적 공론과 세대간 대화를 끌어내는 매개체가 됐다. 이는 독일이 내린 나치시대에 대한 뚜렷한 가치평가의 결과다. 사실이 분명해질수록 서사는 다양해진다. 우리는 언제까지 온갖 고난과 역경을 극복한 위인의 삶을 통해 역사를 배워야 하는가?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지나치게 뜨겁고 영웅시하는 역사는 현실과 거리가 멀다. 역사는 오늘과 만나야 한다.

어설픈 이념논쟁으로 역사를 호도하려는 수작이 판을 친다. 위로가 되는 것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거나 때로는 거꾸로 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역사는 정방향으로 진보한다는 사실이다. 지나온 길을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대한 정답을 강요할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이 역사이듯 우리 모두가 역사의 주체인 까닭이다. 시간은 쉼 없이 흐르고, 우리는 길 위에 있다. 살아있다면, 생각은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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