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조수진 기자

▲ 조수진 기자
정말 완벽한 날에,
우리는 공원에서 샹그리아를 마시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함께 집에 가지.

정말 완벽한 날에,
우리는 동물원에 가서 먹이를 주고
영화도 보고, 그리고 집에 가지.

지난 10월 세상을 떠난 루 리드의 히트곡 ‘완벽한 날(Perfect Day)'의 가사다. 그에게 완벽한 날이란 ‘너’와 함께하는 일상이다. 근처 공원에 가고, 동물원에 가고, 영화관에 가는 평범하고 반복적인 하루에 너와 내가 포함되는 것만으로 ‘우리’의 삶은 완벽해진다. 나 역시 그랬다. 수많은 지난날 중 완벽했던 하루를 떠올리면 그 날은 ‘무엇’ 때문이 아니라 ‘누구’ 때문에 행복했다. 노랫말은 너만 있으면 된다는 거지만, 너만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네가 없어도 안 되지만 네가 아닌 다른 사람도 함께한다면, 루 리드의 ‘완벽한 날’에 제3자가 낀다면, 노랫말이 내게 구구절절이 다가오지는 않았으리라.

곡이 만들어지고 15년이 지난 지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불특정 다수와 공유하고 싶어 안달이다. ‘너’는 나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가고, 함께 집에 들어가는 존재가 아닌, 온라인 상으로 내 일상을 관찰하는 ‘그들’이다. 어떻게 보면 리드의 관점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이 함께 해줘야 내 하루는 행복해지니까.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화에 대한 내 느낌과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린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좋아요’ 횟수가 늘어나고 댓글이 달리면 그 날은 내게 더할 나위없이 행복한 날이다. 그들이 ‘좋아요’와 댓글로 인정해주기 전까지는 그 날이 내게 완벽한 하루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도 없다.

나 역시 그들의 일상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페이스북 친구가 게시물을 올릴 때마다 ‘좋아요’를 누르고 서로 ‘너의 오늘은 행복했구나’라며 인증을 주고받는다. 페이스북 친구들 반응이 시원찮다면 그 날은 그리도 외롭고 우울할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나만 느낄 수 있는 ‘누구’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무엇’에 집중한다. 프러포즈를 받은 날, 내게 남아있는 삶, 곧 ’너’로 채워질 완벽한 나날들이 행복할 거라는 기대보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다이아반지를 받은 사실, 곧 ’무엇’으로 채워진 것이 더 중요하다.

한국정보화진흥원 조사에 따르면, 지난 2012년 50세 미만 스마트폰 이용자 1만683명 중, 스마트폰 중독률은 11.1%로 2011년보다 2.7%포인트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도박이나 마약, 알코올뿐 아니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또한 중독 대상이 됐다. 페이스북 가입자수는 올 4월에 11억명을 넘어섰다. 이토록 많은 이들이 SNS에 빠지는 이유가 뭘까?

독일 베를린자유협회 달 메시 연구팀은 실험참가자들 뇌를 측정하는 실험을 했다. 참가자들은 자신에 대해 긍정적 피드백을 받았을 때 측좌핵이 활발해지는 경향을 보였다. 또 그들에게 페이스북 친구수와 하루 페이스북 사용시간 등을 설문조사했더니 측좌핵이 활동적인 사람일수록 페이스북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곧,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과 관심을 받기 위해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리거나 트윗을 한다는 것이다.

SNS에 빠지는 세대는 비디오세대이다. 어릴 때부터 또래들과 놀이를 하는 것보다 비디오 학습자료로 공부하고, 비디오게임을 하고 만화영화를 봤다. 그러니 직접 사람들과 대면해 대화를 하는 것보다 휴대폰이나 컴퓨터 같은 화면을 통해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편하고 친숙하게 느낀다.

그렇다면 오프라인 아닌 온라인에서 친구를 사귀어 내 삶을 공유하는 게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분명 인간관계는 SNS나 인터넷이 발달하기 전보다는 지금이 훨씬 더 확장됐다. 하지만 직접 사람과 만나 대화할 때 상대방은 나로부터 덜 걸러진 정보를 얻는다. 다양한 방식으로 상대방과 소통하기 때문이다. 눈빛, 손짓, 목소리 떨림 등의 비언어적 표현과 서로의 반응에 따라 미묘하게 변하는 과정을 함께 겪으면서 상대방으로부터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이와 달리, 온라인으로 타인과 대화할 때 상대방은 나로부터 걸러진 정보만 얻는다. 텍스트와 이미지 방식만 가능하고 때에 따라서는 수정도 할 수 있다. 제공되는 정보가 제한돼 있으니, 상대방이 나를 이해하는 깊이 역시 제한돼 있다. 지금 이 순간 키보드를 두드리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나보다 훨씬 멋진 외모에 행복한 내가 모니터와 휴대폰 화면 안에 살고 있다. 상대방은 그 안에 있는 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려 할 뿐이다.

폴란드 의사 자멘호프는 1887년 국제공용어 에스페란토를 만들어 발표했다. “언어의 다름이 민족들 간 차별과 적대감을 낳는 본질적인 요소”라며 에스페란토로 민족과 종교를 초월해 하나의 공동체가 되자는 사상을 퍼뜨렸다. 에스페란토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인류 공통어로 모든 사람이 형제처럼 가까워지고, 사회악도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SNS를 에스페란토의 새로운 형태로 보는 이도 있다. 그들은 SNS가 민족과 종교를 초월한 소통을 가능하게 해 인류가 평등해지고 세계 평화가 도래할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그들이 놓쳤거나 얘기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정보 불균형이 그것이다. SNS는 온라인에서 우리를 하나로 뭉쳐주겠지만 바깥 세상에서는 우리를 더욱 외롭게 만들지 모른다.

모든 인류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던 적이 있다. 바벨탑을 쌓은 이들은 내 삶 속에 존재하는 ‘누구’가 아닌, 눈으로 확인되는 ‘무엇’을 찾으려 했다. 신이 그들에게 내린 형벌은 서로 말이 안 통하도록 언어를 뒤섞어 모든 인간을 외롭게 만든 것이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도 내가 직접 느낄 수 있는 가치 대신 보이는 ‘무엇’에만 집중해 마음 속의 바벨탑을 쌓는다면 지금보다 훨씬 외로워지는 형벌을 받을지 모른다. ‘완벽한 하루’도 영영 갖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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