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방글아 기자

▲ 방글아 기자
지난여름 가족들과 강원도 정선의 래프팅장을 찾았다. 거기서 만난 안전요원은 그의 ‘촌놈’ 인생 8년째 겪은 기막힌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줬다. 그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서울에 있는 한 학교와 ‘자매결연 같은 것’을 맺고 있어서, 더러 서울애들이 학교에 교환학생으로 왔다. 그와 가까워진 서울 친구는 교환학생이 끝나고 평생 잊지 못할 선물을 하나 남기고 떠났다. 견출지에 ‘머리 감을 때 쓰는 것’이란 설명을 적어 붙인 ‘샴푸’였다.

도시에 사는 아이들에게 시골은 낯선 곳이다. 시골이 어떤 곳인지, 운이 좋아 이곳저곳 가족 여행을 다녀본 경우가 아니라면 시골에 대해 알 이유나 기회 같은 것이 거의 없는 탓이다. 반대로 시골 아이들은 커가며 자연스럽게 도시를 배운다.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는 동안 1차 산업이 죽은 탓이다.

사양산업 소리를 들은 지 반세기가 다 돼 가는 농업만 남은 시골로 사람들 관심을 돌리기란 그래서 어렵다. 도시인 시각에서 시골은 '제2의 공간‘으로 타자화해 단지 ‘유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 또는 가끔 도시를 피해 짧게 머물렀다 가는 ‘관광지’ 정도로 전락했다. 도시와 시골의 관계에서 도시가 더 ‘나은’ 곳으로 우위를 점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라즈 파텔은 저서 <경제학의 배신>에서 경제활동 참여자를 그들이 가진 힘에 따라 3단계로 구분한다. 첫째, 장시간 고단한 일에 시달리며 사회를 사실상 먹여 살리는 노동자, 둘째, 그 위에서 비교적 건전한 경쟁을 하는 사업가, 셋째 더 위에 경쟁하지 않고도 불로소득을 취하는 경지에 오른 자본가이다.

이 분석은 사람 사이뿐 아니라 공간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시골은 우선 우리 사회의 밑바닥이 됐다. 우리를 먹여 살리는 ‘농업의 신성함’이 소작농의 피와 땀에서 거대 기업농의 자동화 기계에 넘어가는 사이, 시골은 ‘밑받침’으로서 가치를 상실하고 ‘밑바닥’으로 전락했다. 같은 시기에 신식민지 국가들의 식량자급률은 급속도로 떨어졌다. 1970년 초반 80%에 육박하던 우리나라 곡물자급률은 2010년대에 들어 30%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추락했다. 우리를 먹여 살리던 농촌의 가치는 어떻게 다시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시골과 도시가 ‘상생’하는 미래를 꿈꾼다면 안타깝게도 앞이 깜깜하다는 말밖에 할 게 없다. 젊은층 유입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남아 있는 노년 인구가 하나둘 죽어나가는, 시골의 암담한 상황은 이미 1975년 쓰인 신경림의 시 <농무>에서 예고된 것이다. 고착화한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도시의 ‘살림’ 가치는 도시에 쏠린 거품으로 과대평가돼있다.

이런 상황에서 ‘도시-시골 상생’을 주장하는 것은 실상 ‘도시의 시골 기생’을 묵인하는 꼴이다. 이는 동양에서 상생 개념이 탄생한 배경을 살피면 더욱 명백해진다. 상생 개념은 노자 도덕경에 등장하는 ‘유무상생’(有無相生), 곧 ‘“있음과 없음이 서로 함께 사는 대화합의 정신’”에서 나왔다. 본래 좋은 의도가 이제 와 무색해진 탓이 크겠지만, 상생은 어원부터 ‘있고 없음의 구별’을 전제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혹자는 있고 없음을 기준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현대인이 되새길 경구라며 상생의 원리를 치켜세운다. 그러나 상생보다는 공생의 관계를 형성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처럼 권력관계가 확실한 경우, ‘상생법’은 본질적인 문제 해결은 뒤로 제쳐 둔 채, ‘호혜적 베풂’을 통한 현상적 해결에 만족하게 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상생이 오∙남용되는 것이다.

‘상생’이란 단어가 최근 정치권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것이 마뜩잖은 이유도 거기 있다. 다양한 공생관계 가운데 유독 ‘있고 없음이 화합해 살 것’을 강조하는 의도는 무엇인지 곱씹어볼 때다. 영어권에서 상생에 가까운 말은 ‘mutualism’(공생)을 들 수 있겠는데 협동조합 운동가들이 그 개념을 선점했다. 평등한 생태학적 개념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상생론’은 재벌 등 절대 강자를 인정하는 쪽으로 논의되고 있다. 자칫 상생이 ‘한국식 자본주의’의 근본적 폐해를 가려주는 위장막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협동조합을 비롯한 사회적 기업들은 공생을 추구한다.

도시와 시골 또한 공생해야 한다. 도농상생 프로젝트에 따라 농촌관광 프로그램과 특용작물 개발이 곳곳에서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체험에 머무르는 관광 프로그램은 시골을 타자화하는 시선을 더욱 강화한다. 또 도시에 공급할 작물에만 치중해서 농사를 짓는다면 시골의 도시 의존성은 계속 높아지게 된다. 상생이 아니라 공생을 강조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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