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칼럼]

▲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장

8년 전쯤 영국 케임브리지에 살 때 소방관들이 파업을 했다. 아니 소방관이 파업하다니! 불 나면 어쩌라고? 더욱 놀란 것은 파업을 대하는 시민들 태도였다. 소방관들이 소방서 앞 드럼통에 장작불을 피워놓고 파업을 하는데 지나가는 운전자들이 지지 경적을 울리는 게 아닌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이도 있었다.

유럽에서 파업은 일할 힘밖에 없는 노동자가 막강한 자본가와 툭하면 자본가 편을 드는 정부에 맞서 노동의 가치를 일깨우는 수단으로 정착된 지 오래다. 그러나 우리 철도파업에는 보수신문과 방송이 늘 ‘시민 불편’ 프레임을 들고나온다. 실은 파업의 목적 자체가 일시적으로 업무 효율을 떨어뜨리고 시민 불편을 가중시켜 자본가와 공기업을 협상 테이블로 이끌기 위한 것이다. 대체인력 투입은 노조의 협상력을 떨어뜨리기에 불법으로 규정한 나라가 많다. 유럽의 대중은 시민인 동시에 노동자임을 자각하고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불편을 감수하고 연대한다.

노동운동에 대한 보도태도를 비교해보면 보수가 주류인 미국 언론도 우리와 비슷하다. 노동운동이 미국 주류 언론의 지지를 받은 사례는 거의 없다. 같은 노동자이면서도 노동조합 결성 시기가 가장 늦었던 집단이 언론인이다. 1930년대 결성하기 시작한 미국 언론사 노조들은 스스로를 ‘노동조합’(Union) 대신 ‘길드’(Guild: 동업조합)라 불렀다. 문선공과 정판공 등 수많은 블루칼라가 함께 일했고, 도심에 대형 기계설비를 갖춘 거의 유일한 제조업체가 언론사인데도 ‘구별 짓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미국 노동운동에 가장 큰 타격을 가한 두 사건이 헤이마켓과 풀먼 파업이다. 독점기업이 국가권력과 결탁해 노동자를 착취하던 시절이었다. 1886년 5월 시카고 헤이마켓 집회에서 노동자들이 주장한 것은 8시간 노동, 동일노동 동일임금, 유·청소년 노동 폐지 등 지금 기준으로는 너무나 당연한 요구였다. 그러나 평화적인 집회에 경찰이 발포해 6명이 숨지고 이튿날 항의집회에서 누군가 투척한 폭탄으로 경찰 7명이 사망하자 경찰이 구경꾼까지 사격해 200여명이 죽고 다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당시 현지신문 시카고트리뷴은 ‘시카고가 유럽의 사회주의자, 무신론자, 알코올중독자의 집결지가 됐다’고 왜곡했고, 워싱턴포스트는 ‘시카고가 폭도들의 화염 속에 있다’며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을 매도했다. 폭탄 사고 당시 1명 말고는 근처에 있지도 않았던 파업주동자 5명이 ‘급진사상을 가졌다’ 하여 사형에 처해졌다. 언론은 사형선고까지 환영했다.

 

 

소방관이 파업했는데도 
지지 경적 울리는 
케임브리지 시민들

미국과 다름없는 
주류 언론의 
철도파업 매도

손해 보는 이는
뒤틀린 유리창을 통해 
세상을 보는 국민들

풀먼 파업은 풀먼객차회사가 종업원의 절반이 넘는 3000명을 해고하고 임금을 대폭 삭감하자 철도파업으로 번진 사건이다. 사주인 조지 풀먼은 불황 탓이라고 변명했지만 거액의 비축자금이 있었고 주주배당금은 더 올린 사실이 밝혀졌다. 풀먼은 대화를 피한 채 휴가를 떠나버렸다. 그런데도 신문의 왜곡보도가 심해지자 배달소년들이 신문을 몰래 버리기도 했다. 결국 군대가 투입돼 70명의 사상자를 내고 파업이 진압됐다. 악덕자본가와 정부가 강경조처를 연발하고 신문이 편들어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음모론이 제기됐지만, 이들 사건을 계기로 미국 노동운동은 현저히 쇠락하게 된다.

지난해 말 기준 노조조직률, 곧 노조에 가입한 비율은 미국이 11.2%에 불과하고 우리는 그보다도 낮은 10.3%이다. OECD 국가 평균은 미국과 한국이 그렇게 끌어내렸는데도 30%이고, 복지선진국인 스웨덴·덴마크·핀란드는 70%대이다. 또 유럽 노동자들은 자기 목소리를 대변할 ‘노동당’이나 ‘사회민주당’을 갖고 있지만, 우리 현실은 민주당마저 유럽 기준으로는 보수당 수준 목소리를 낸다. 그런데도 기업·정부·언론은 툭하면 ‘강성노조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고 비난하며 엄벌을 촉구한다. 너무 무리한 주장을 하는 노조도 있지만 기업이 협상 테이블을 걷어차는 사례도 많다. 노사가 현실을 감안하며 성실하게 협상에 임하는 곳은 자본주의는 물론 민주주의를 위해 표창이라도 해야 한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지만 현실권력은 언론에 의해 창출되는 측면이 강하다. 대중은 언론을 통해 세상을 볼 수밖에 없는데 언론 지형이 현저히 기울어 있다면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없다. 철도를 민영화하면 손해 볼 사람들이, 민영화에 반대하는 철도노조 파업을 강경진압하길 원한다. 외국 사례를 보면 철도 민영화는 엄청난 요금 인상과 적자노선 폐지 등 공공성 약화를 가져오는 게 명백하다.

서민이 많이 이용하는 무궁화호와 새마을호 서비스가 줄어들 것이라는 사실은 이번 파업으로 운행횟수를 줄인 순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KBS 경제부장은 ‘데스크분석’에서 “파업 때문에 시민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값이 더 비싼 KTX를 타고 있다”며 “막연한 국민 불편 정도가 아니라 가시적 국민 손실”이라고 분석했다. 쪼개진 KTX는 장차 쉽게 민영화할 수도 있어 시민이 영원히 울며 겨자 먹기를 할 수도 있다는 장기분석은 불가능했을까?

정부와 코레일은 ‘민영화가 아니고 적자 해소를 위한 경쟁체제 도입’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민 54%, 여야 국회의원 65%가 민영화로 본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불신을 자초한 것은 대선공약까지 수없이 뒤집은 박근혜 정권이다. 박 대통령은 프랑스 순방 때 “도시철도 분야 진입 장벽도 개선될 수 있다”고 말해 철도 부문 민영화와 개방에 대한 소신을 드러냈다.

굳이 경쟁체제를 도입하려면 민간에 넘기지 않고 민간기업들처럼 사업부제를 시행해도 된다. 그것이 철도의 중복투자를 피하는 길이기도 하다. 독점을 해소하겠다고 하지만 철도는 가스·유선전화·상수도·전력처럼 지역과 설비가 독점될 수밖에 없는 자연독점 상태에 있어 경쟁체제를 도입하기 힘든 분야이다.

코레일을 쪼개지 않아 적자가 커진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인천공항철도를 민자로 건설했다가 엄청난 손실이 발생하자 코레일에 떠넘겼고, 정권의 강요로 용산국제업무지구 사업을 추진하다가 또 큰 손실을 봤다. 전문성 없는 대선공신들을 낙하산 사장으로 밀어 넣은 정부가 ‘경쟁력’을 걱정하는 것은 위선이다. 경찰청장 출신 허준영씨가 사장으로 투입된 적이 있는데, 코레일과 관련한 전문성이 철도경찰 운용 빼고 무엇인지 궁금했다. 노조탄압을 위한 포석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최연혜 사장은 원래 전문성이 있었지만 KTX 분리에 반대하던 소신을 꺾었다는 점에서 전문성이 없는 것보다 못한 인사였다. 그는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출마했고 박근혜 캠프에서 일한 경력으로 미루어 정치적 입지를 위해 소신을 꺾을 수 있는 인물인 듯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16일 오전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노사 간 협상을 통해 해결해달라”고 ‘우아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날 오후, 파업주동자 체포영장을 청구하고 이튿날 노조본부를 압수수색했다. 그런 정부의 ‘민영화 않겠다’는 약속을 믿을 수 있을까?

최 사장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몇몇 네티즌이 가족 신상을 인터넷에 올려 걱정”이라며 감정이입을 했다. 직위해제된 8000명과 해고되고 구속될 수백명, 그리고 그 가족의 ‘안녕’은 왜 걱정이 안 될까?


 

* 이 기사는 <경향신문>과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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