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특강] 조항제 KBS 공론조사위원장

“50년의 역사를 헤아리는 공영방송에서 정말 극단적인 갈등의 양상이 나옵니다. 어떤 분은 이걸 복수혈전(復讐血戰)이라고 해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복수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게 그냥 공영방송 한 부분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비극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거죠. ‘이게 우리 한국 민주주의의 아주 적실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고요.”

지난 14일 충북 제천시 세명대 학생회관 세미나실에서 조항제(62) 부산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가 이렇게 말했다.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의 2023년 저널리즘특강 첫 순서로 ‘민주주의와 공영방송’에 관해 강연한 그는 한국방송(KBS) 수신료 분리징수 결정과 사장 해임 등 최근 사건들을 비판적으로 조명했다. 조 교수는 지난 7월 출범한 KBS 공론조사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KBS의 공적 책임과 서비스 범위, 적절한 재원 모델 등을 도출하기 위해 국민 의견을 수렴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한국언론정보학회장을 지냈으며 <한국의 민주주의와 언론> <민주주의와 공론장> 등의 책을 냈다.

공영체제 50여 년 동안 ‘정치적 후견주의’ 지배

조항제 KBS 공론조사위원장(부산대 교수)이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저널리즘특강에서 ‘민주주의와 공영방송’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안소현 기자
조항제 KBS 공론조사위원장(부산대 교수)이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저널리즘특강에서 ‘민주주의와 공영방송’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안소현 기자

조 교수는 “한국 방송의 고질(난치병) 중 하나는 반세기 역사를 헤아리는 공영방송이 아직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있고, 항상 극단적인 제로섬(한쪽이 이익을 보면 다른 쪽이 손해를 보는 구조) 갈등의 온상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단적으로 한국 공영방송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 43년째 금액을 인상하지 못하면서 최근 분리징수까지 강요당한 KBS 수신료와 정권이 바뀌면 따라 바뀌는 사장 및 집행부의 지위라고 그는 지적했다.

조 교수는 최근 넷플릭스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약진하면서 시청률이나 매출액 측면에서 KBS, 문화방송(MBC), 와이티엔(YTN) 등 공영방송의 위상이 하락했다고 짚었다. 그러나 정치권의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공영방송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경향은 여전해서 ‘정치적 후견주의’(political clientelism)가 유지된다고 말했다. 정치적 후견주의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집권층이 공영방송의 인사권을 좌우하고, 이렇게 임명된 경영진은 정파적 보도로 부응하는 현상을 말한다. 정치권력이 바뀌면 공영방송 역시 집행부가 바뀌므로 ‘엽관제’(spoil system)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그는 덧붙였다.

조 교수는 “정치적 후견주의에서는 합리적・법적 권위보다 이익의 당파적・사적 수수관계가 우위에 놓인다”며 “공영방송이 권력의 정치공학 일원으로 도구화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KBS는 노조나 보도국마저 분열되어 있으므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송 내외부에서 복수혈전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권력을 잡고 있는 당이 자신의 권력을 양보하는 규칙을 만들어야 하는데, 아무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며 “앞으로 공영방송의 미래는 불투명하다”고 내다봤다.

‘팬덤 정치’ 속에서 더욱 중심을 잡아야 할 방송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들이 조항제 교수의 강의를 경청하고 있다. 이날 특강에는 줌 화상회의로 연결한 외부 청중을 포함, 40여 명이 참석했다. 안소현 기자

조 교수는 정연주 전 KBS 사장 해임 관련 재판과 MBC노조 파업 관련 판결 등을 통해 우리 사회에 ‘공영방송 사장 인사와 보도·제작에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해서는 안 되며, 방송노조는 보도의 공정성을 위해 집단행동을 할 수 있다’는 합의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이는 정치적 후견주의를 해체하는 일이 시대적 과제임을 드러낸 것이라고 그는 해석했다. 조 교수는 “이를 위해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등을 위한 방송법 개정이 필요했으나, 탄핵으로 집권해 기회가 있었던 문재인 정부가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부가 바뀌면 또 그 안에서(공영방송 체제에서) 누리는 혜택이 있기 때문에 안 바꾼다는 게 문제”라며 “당대의 권력이 일정하게 자기 권력을 양보하고 영속적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야 하는데,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현재의 디지털 공론장에서는 정치적 양극화를 조장하는 팬덤(열광적 추종)이 팽배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또 반대가 반대를 낳는 공격적・자해적 팬덤이 비토크라시(vetocracy), 즉 ‘상대에 대한 공격이나 반대가 정치행위의 전부가 되는 것’을 조장하면서, 합리적 협상과 온건한 절충을 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제1당과 제2당의 극단적인 권력투쟁이 정치양극화의 주된 원인인 만큼 양자의 대화를 촉진하는 중립적·평화적 공론장이 절실한 요소지만, 그 적임자인 공영방송은 현재 위기에 처해있다고 우려했다. 조 교수는 “또 다른 공론장인 신문도 정당과 보조를 같이하는 ‘정치병행성’을 보인 지 오래됐다”고 덧붙였다. 

조 교수는 특히 미디어 시장 변화에 따라 공영방송의 힘이 약해지고 광고수입도 반토막이 난 상황에서 KBS 수신료 분리징수는 큰 타격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1인 가구가 늘면서 ‘TV를 안 보는데 수신료를 왜 내야 하나’ 등의 불만이 커져, 분리징수를 지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반면 스위스는 연간 50만 원이 넘는 수신료 납부를 두고 2018년 국민투표를 실시한 결과 72%가 찬성표를 던졌다. 공영방송의 필요성에 관한 국민적 지지를 보여준 것이다. 조 교수는 “(수신료 분리징수 결정은) 1986년 체제저항의 성격으로 시작된 ‘KBS 시청료 거부 운동’ 당시 KBS가 처했던 위기를 연상케 한다”고 말했다.

‘내가 시청하지 않아도 그 가치를 인정하는 방송’

조 교수는 공영방송에 관해 “내가 시청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가치를 인정하고, 남이 시청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도움이 되는 방송”이라며 “가치재의 성격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핵심적 요소의 하나가 대중미디어인데, 정치가 미디어를 통해 왜곡된 정보를 공유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을 막기 위해서도 공영방송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진 질의답변 시간에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 정호원(26) 씨 등이 공영방송을 지킬 대안을 묻자 조 교수는 ‘대통령의 결단’을 강조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공영방송을 만들기 위해 당대의 권력인 대통령이 결심해야 한다”며 “방송을 중립적인 영역, 비무장지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복수혈전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굉장히 사치스럽고 비현실적인 생각처럼 들리지만, 이를 위한 사회적 논의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같은 대학원생 이선재(26) 씨는 영국 공영방송 비비시(BBC)와 일본 엔에이치케이(NHK)의 지배구조에서 배울 점을 물었다. 조 교수는 “NHK의 특별다수제(과반이 아닌 3분의 2 찬성으로 사장 선임) 등 참고할 만한 제도가 있으나 나라마다 역사와 환경이 달라 한국에서도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고 답했다.

수강생 이선재 씨가 BBC와 NHK 등 외국 공영방송의 지배구조에 관해 질문하고 있다. 안소현 기자
수강생 이선재 씨가 BBC와 NHK 등 외국 공영방송의 지배구조에 관해 질문하고 있다. 안소현 기자

같은 대학원생 김지영(23) 씨는 ‘시민사회의 감시’라는 측면에서 KBS와 외국 공영방송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물었다. 조 교수는 BBC의 경우 2000~3000개 시민단체의 감시를 받으며, 주요 정책에 관해 이들 단체의 의견을 묻는다고 소개했다. 반면 KBS가 상시 소통하는 시민단체의 수는 많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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