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특강] 김효순 리영희재단 이사장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은 미디어와 저널리즘의 주요 현안에 관해 현직 언론인과 전문가들이 강연과 토론에 나서는 '저널리즘특강'을 매년 가을학기에 개설한다. 2022년 특강은 ‘21세기 언론인과 리영희 정신’부터 ‘인공지능 저널리즘의 도전과 응전’까지, 언론의 영혼과 도구를 아우르는 7개 주제로 구성됐다. <단비뉴스>는 강연과 문답 내용을 기사와 영상으로 독자들에게 배달한다.(편집자)

 

“유신정권이 들어선 후인 1974년 재야의 시민들이 모여 ‘민주회복국민회의’라는 단체를 결성합니다.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이 시작된 거죠. 당시 단체의 대표를 맡았던 이병린 인권 변호사는 정권에 의해 바로 구속됩니다. 죄명은 간통죄. 이 변호사를 구속하기 위한 중앙정보부의 터무니없는 계략이었죠. 약 한 달간 수감됐던 이 변호사가 감옥에서 나올 당시 손에 들고 있던 책 한 권이 있습니다. 바로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입니다. 당시 40대이던 리영희 선생의 책은 이미 내로라하는 법률가들이 찾아볼 정도로 화제였죠.”

김효순 리영희재단 이사장은 지난 15일 충북 제천시 세명대 민송도서관에서 열린 저널리즘특강에서 리영희 선생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의 실상과 사회주의 중국의 동향 등 국제 정세를 예리하게 비평한 이 책은 철저한 반공교육으로 눈과 귀가 가려졌던 당시 학생과 지식인들에게 지적 충격을 안겼다. ‘21세기 언론인과 리영희 정신’을 주제로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이 마련한 이날 특강에서 김 이사장은 독보적인 탐사보도 기자이자 비판적 지식인이었던 리영희의 삶을 다양한 예화를 들어 소개했다. 김 이사장은 <동양통신>과 <경향신문> 기자를 거쳐 <한겨레> 도쿄 특파원, 편집인 등을 지냈으며 리영희 선생이 <한겨레> 비상임이사 겸 고문 등을 맡았던 시절 선후배로 교류했다.  

누구도 믿지 않고 진실을 탐구했던 비주류 청년

김효순 이사장이 '21세기 언론인과 리영희 정신'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김은송 기자
김효순 이사장이 '21세기 언론인과 리영희 정신'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김은송 기자

김 이사장은 리영희 선생의 삶을 ‘비주류’로 정의했다.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자란 리 선생은 경성공업학교와 해양대학교를 나와 안동공립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통역장교로 입대했다. 그는 종전 후 미군이 거제 포로수용소 건물 등을 한국군에 인도하면서 낡은 기자재에 높은 금액을 매겨 군사원조 금액을 부풀리려 하자 계약서 서명을 거부했다. 그러나 미군이 그를 무시하고 계약을 강행하는 등 부조리한 행태를 보이자 ‘앞으로 그 누구도 믿지 않고 직접 진실을 밝혀내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7년 동안의 군 복무를 마친 1957년, 리 선생은 우연히 변소에 들고 간 신문지에서 합동통신 외신기자 채용 공고를 보고 장교복을 입은 채 시험을 치르러 간다. 그는 단번에 합격했는데, 당시 합격자 중 유일하게 서울대 출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김 이사장은 “많은 전문가들이 리영희 선생의 ‘사상의 뿌리’를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특정 인물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 몸소 겪은 한국전쟁과 자유당 말기의 극단적 반공 보수 체제를 보며 사상을 키워나갔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북괴가 아니라 북한’ 고집했던 외신부 기자

리 선생의 기자 생활은 범상치 않았다. 24시간 뉴스를 다루는 통신사에서 세계적 대변혁의 현장을 시시각각 외신으로 접했던 그는 연차가 낮은 평기자였음에도 옳다고 믿는 일에 고집스러웠다. 예를 들어 당시 국내 언론은 북한이 중국과 소련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라는 뜻에서 ‘북괴’라고 표기했지만 그는 북한이라는 표준 명칭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영어 기사 원문에 ‘북한’(North Korea)만 있고 ‘괴뢰’(puppet)가 없는데 북괴라고 쓰면 계약 위반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가 북한이라고 쓰면 부장이 북괴로 고쳐서 내보내곤 했다고 한다.

리 기자는 독자적이고 집요한 취재로 여러 특종 보도를 했지만 이로 인해 고초를 겪었다. 1961년 ‘23억 달러 요구 백지화’ 보도가 그중 하나다.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미국에서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했을 때, 방미단은 미국의 정치적 승인과 군사·경제적 원조를 얻은 것처럼 발표했다. 다른 수행 기자들은 모두 공식발표대로 보도했으나 리 기자는 <워싱턴포스트> 간부의 도움으로 미 국무부 고위관료를 직접 접촉해 ‘숨겨진 진실’을 취재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하루속히 공정한 선거를 통해 권력을 민정으로 이양할 것’ ‘조속한 한일국교 정상화’ 등을 요구했으며 민정 이양까지 모든 경제원조를 연기하기로 했다는 등의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는 이 보도로 방미 수행취재 중 국내로 소환됐다.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학생들이 김효순 이사장의 강연을 경청하고 있다. 김은송 기자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학생들이 김효순 이사장의 강연을 경청하고 있다. 김은송 기자

베트남 전쟁에 관한 비판적 보도는 리영희 기자의 독보적 과업이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약 32만 명을 파병한 한국은 약 50만 명을 파병한 미국 다음으로 많은 전투 병력을 보낸 나라다. 정부는 베트남전이 ‘국제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막기 위한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외신을 통해 민간인 학살 등의 ‘다른 사실’을 접했던 리 기자는 군사정권 아래에서 베트남전의 진실과 파병의 문제점을 알릴 방법을 찾느라 고심했다. 김 이사장은 “저서 <대화>에서 리 선생은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취했어도 고통받는 베트남인들을 생각하며 기도하지 않고 잠자리에 든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고 썼다”고 소개했다.

아홉 번 연행, 다섯 번 구속, 1000일의 수감

1965년 ‘미쓰야 계획’ 보도는 리영희 선생 스스로 ‘특종 기자’의 자부심을 내비친 기사다. 태평양전쟁 패전국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2년) 후 주권을 회복한 일본은 1963년 북한의 남침에 대비한 군사작전인 ‘미쓰야 계획’을 극비리에 마련했다. 한국에 자위대를 파병해 평양까지 밀고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사회당 의원이 이 계획을 폭로하면서 일본 내 양심적 지식인들이 ‘식민 지배를 사과하지 않은 일본이 한국에 또 군대를 보낼 생각을 한다’며 반발했지만 국내에선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조선일보 외신부장이었던 리 선생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가 방한하자 그를 찾아가 인터뷰하면서 미쓰야 계획을 보도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즈음 기자로서 리영희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1968년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복귀한 선우휘는 리 선생의 비판적 성향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를 조사부장, 심의부장 등 한직으로 발령 내며 노골적으로 배척했다.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된 리 선생은 결국 사표를 냈다. 신문사를 나온 그는 책 외판원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다 1972년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교수로서 그는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등 저서를 잇달아 출간했다.

기자로서 광범위한 조사와 치밀한 취재를 바탕으로 기사를 썼고, 지식인으로서 양심에 따라 진실을 추구하며 책을 썼던 그는 그런 활동으로 인해 아홉 번의 연행, 다섯 번의 구속, 1000일이 넘는 수감생활을 겪었다. 1964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기사로 반공법 위반,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출판으로 각각 반공법 위반, 1980년 광주항쟁 배후조종 혐의, 1989년 <한겨레> 창간기념 방북취재 기획에 따른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이다. 김 이사장은 “리영희의 진실보도는 엄밀한 조사와 심층 취재로 이뤄낸 탐사보도의 표상”이라고 말했다. 권력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집요하게 취재해 성역 없는 보도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전달에만 급급한 ‘기능적 직업인’ 넘어서야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 오동욱(30) 씨는 “진실은 규정할 수 없는 것이라며 ‘사실 전달에만 충실하자’는 주장도 있는데, 리영희 선생이 말한 진실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김 이사장은 “진실과 사실 간에는 분명한 격차가 있다”며 “그 둘을 구분하지 않고 (표면적) 사실에만 집중해 상대주의에 빠지게 되면 인용 저널리즘의 위험이 생긴다”고 답했다. 그는 “사실 전달에만 급급해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을 잊고 기능적인 직업인으로만 남지 않도록 스스로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강연에 이어 진행된 질의응답 시간에 김효순 이사장이 현장의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과 줌 화상회의로 참여한 외부 청중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은송 기자
강연에 이어 진행된 질의응답 시간에 김효순 이사장이 현장의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생과 줌 화상회의로 참여한 외부 청중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은송 기자

윤재영(29) 씨는 “후배 언론인들이 리영희 선생에게 가장 배울만한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김 이사장은 “리 선생은 엄혹하던 시절에도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의지로 기사를 쓰고 저서를 집필했다”며 “요즘 기자들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낮아져 어려움이 있지만, 역사의 기초 자료를 남긴다는 마음으로 취재하고 기사를 쓰면 좋겠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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