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현장] 서울 도심에서 열린 ‘923기후정의행진’

“기후위기가 일자리와 거주 공간을 위협하고 생명의 위기로 닥쳐오는 동안 정부는 스스로의 역할을 포기했습니다...윤석열 대통령은 온실가스 뿜어대며 미국까지 날아가서는 유엔(UN)기후정상회의에 참석도 안 했습니다. 당치도 않은 부산엑스포 구걸을 했다고 합니다. (이에 앞서) 문재인 정권은 그 엑스포 핑계로 (부산) 가덕도신공항 건설을 추진해, 돌이킬 수 없는 생태계 파괴의 문을 열었지요.”

지난 23일 오후 2시 서울 시청역과 숭례문 일대에서 ‘923기후정의행진’이 열렸다. 지난해와 비슷한 3만여 명(주최 측 추산)의 시민이 모인 가운데, 권우현 923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이 개회 발언을 통해 전·현 정부를 비판했다. 정부가 기후대책을 마련하는 대신 개발에 몰두하며 환경파괴를 방치한다는 것이다. ‘위기를 넘는 우리의 힘’을 표어로 한 이번 행사에는 노동, 농민, 여성, 장애인, 동물권, 환경, 종교 등 다양한 분야의 600여 시민단체가 함께 했다. 이 행사는 2018년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의 ‘기후파업’을 계기로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매해 열리는 시위의 하나다. 이날 서울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은 현 정부의 기후정책 퇴행을 비판하며 ‘기후재난으로부터 안전할 권리’ ‘핵발전과 화석연료 중단’ ‘정의로운 전환’ ‘공공교통 확충’ ‘생태파괴 사업 중단’ 등을 소리 높여 요구했다.

‘자본에 잡아먹힌 정부’ 등 기후정책 퇴행 비판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에 모인 시민들이 ‘자본에 자바(잡아)먹힌 정부’ ‘화석연료, 핵발전 중단하고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라’ 등 구호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923기후정의행진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맨 앞줄 바닥에는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투기를 비판하는 ‘버려진 것은 오염수인가, 우리의 미래인가’ 현수막이 놓여 있다. 박세은 기자

정규석 녹색연합 사무처장은 집회 발언을 통해 개발을 앞세워 국토환경을 훼손하는 정부와 기업을 성토했다. 그는 “아직 끝나지 않은 4대강 사업으로 우리는 여전히 신음하고 있다”며 “케이블카부터 공항까지 우리 국토는 무수히 파헤쳐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 처장은 또 “우리 바다의 회복탄력성은 그 어느 곳보다, 그 어느 때보다 취약하고 위험한 지경에 놓여있다”며 신공항 건설과 국립공원 개발사업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923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시민들이 각자 만든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이번 행사의 주제인 ‘위기를 넘는 우리의 힘’ 등 시민의 단합된 의지를 강조하는 구호도 있었다. 전나경, 박세은 기자
923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시민들이 각자 만든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이번 행사의 주제인 ‘위기를 넘는 우리의 힘’ 등 시민의 단합된 의지를 강조하는 구호도 있었다. 전나경, 박세은 기자

송민 한국노총 공공노련 탈석탄일자리위원장은 정부가 ‘2050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에서 노동계 위원을 제외했다며 “탈석탄으로 가족이 삶의 무너질 노동자들의 의견을 배제하는 차별적 구조를 만들어 놓았다”고 비판했다. 김영훈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한전KPS 비정규직지회장도 “환경과 사람을 희생시키는 전환은 이제 있어서는 안 된다”며 “그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정의로운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각계 대표의 발언이 끝난 뒤에는 923기후정의합창단의 노래가 이어졌다. 청소년, 시민활동가, 종교인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개사해 함께 불렀다. “위기가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생명이 신음하는 곳, 그곳으로 가네” 등의 가사가 기후행진에 참여한 시민의 마음을 대변했다. 이어 페미니스트기후정의네트워크, 전국여성농민총연합, 푸른꿈고등학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행진 결의문을 함께 낭독하며 본 집회를 마무리했다.

923기후정의합창단이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부르기 전, 사회를 맡은 YWCA 유에스더 씨와 이서영 보건의료단체연합 활동가가 합창단을 소개하고 있다. 강민정 기자
923기후정의합창단이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부르기 전, 사회를 맡은 YWCA 유에스더 씨와 이서영 보건의료단체연합 활동가가 합창단을 소개하고 있다. 강민정 기자

‘그린워싱’ 기업과 ‘오염수 배출’ 일본 규탄

참가자들은 오후 3시부터 두 개의 경로로 나눠 행진을 시작했다. 첫 번째 대열은 서울시청에서 종로구 율곡동 일본대사관을 거쳐 세종로 정부종합청사로 향했다. 두 번째 대열은 숭례문에서 서울역을 거쳐 용산 대통령실로 행진했다.

첫 번째 행렬은 종각역 부근 영풍문고 앞에서 잠시 멈춘 뒤 그린워싱(친환경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환경파괴) 기업을 성토했다. 안동기후위기비상행동의 서옥림 활동가 등은 영풍문고의 관련사인 영풍석포제련소가 50년 넘게 낙동강에 카드뮴, 비소, 등 위험 중금속을 배출해 강 인근을 오염시켰다고 고발했다. 서 활동가는 “(영풍석포제련소가) 낙동강을 중금속으로 오염시켜 온 결과 다슬기도 살지 못하는 강을 만들었다”며 “그런데도 윤석열 정부의 환경부는 영풍석포제련소를 100가지 조건을 붙여 허가해 주었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영풍석포제련소 폐쇄하라’ 등의 구호를 함께 외쳤다.

일본대사관 앞에 도착한 행렬은 ‘다이인’(Die in) 퍼포먼스를 통해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규탄했다. 사회자인 조민기 환경운동연합 활동가는 “인류 역사상 핵폐기 오염물을 태평양 바다에 방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며 “해양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만 일본 정부는 오직 값이 싸고 비용처리가 편하다는 이유로 해양 투기를 전격적으로 감행했다”고 말했다. 조 활동가의 발언에 이어 사이렌 소리가 울리자 참가자들은 바닥에 죽은 듯 드러누웠다. 3분이 지나자 영국 밴드 퀸의 ‘위 윌 락 유’(We will Rock You)가 흘러나왔고, 시민들은 박자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울 종로구 율곡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항의하는 의미의 ‘다이인’ 퍼포먼스를 펼치는 923기후정의행진 참가자들. 전나경 기자
서울 종로구 율곡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항의하는 의미의 ‘다이인’ 퍼포먼스를 펼치는 923기후정의행진 참가자들. 전나경 기자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도 ‘다이인’으로 시위

두 번째 행렬도 용산 대통령실 부근에서 다이인 퍼포먼스를 펼쳤다. 오후 4시 사이렌 소리와 함께 3분 동안 죽은 듯 바닥에 누웠다가 일어났다. 전라도 광주에서 왔다는 정이어린(22) 씨는 “다이인 퍼포먼스를 하니 행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며 “환경오염이 많이 일어나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가진 폭력성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녹색당원 최진주(33) 씨는 9살 딸과 함께 참여했다. 최 씨는 “원자력 오염수 방류에 심각성을 느껴서 참여하게 됐다”며 “초등학교 급식에 오염된 수산물이 올라올 수 있다”고 걱정했다.

용산 대통령실 부근에 도착한 923기후정의행진 참가자들이 사이렌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드러눕는 다이인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주인을 따라 나온 강아지도 사이렌이 울리자 얌전히 앉았다. 안소현 기자
용산 대통령실 부근에 도착한 923기후정의행진 참가자들이 사이렌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드러눕는 다이인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주인을 따라 나온 강아지도 사이렌이 울리자 얌전히 앉았다. 안소현 기자

이날 행진 대열의 중간에서는 공연이 이어지기도 했다. 브라질리언 타악기 퍼커션팀과 풍물동아리가 사람들의 발걸음에 맞춰 악기를 연주했다. 성공회대 풍물동아리 탈도 이 공연에 참여했다. 탈에 속한 성계진(22) 씨는 “사람들이 공연에 호응을 많이 해줘서 좋았다”고 말했다. 오후 5시가 되자 참가자들은 “우리가 희망이다, 기후위기 파업하자” 등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마무리했다.

용산 대통령실을 목적지로 행진한 시민들이 각자 속한 단체의 팻말을 들고 발걸음을 맞춰 걷고 있다. 안소현 기자
용산 대통령실을 목적지로 행진한 시민들이 각자 속한 단체의 팻말을 들고 발걸음을 맞춰 걷고 있다. 안소현 기자

사전 행사에서도 다양한 활동과 의견 활짝

한편 본 행사에 앞서 이날 정오부터 다양한 사전행사가 열렸다.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를 포함한 33개의 단체가 천막 등을 설치하고 참가 시민과 교감했다. 그린피스는 ‘얼터너티브 퓨처(다른 미래)’라는 나무에 시민이 소망을 적은 카드를 거는 행사를 진행했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온 한채민(34) 씨와 용산구 효창동에서 온 한충헌(28) 씨는 ‘어차피 안 바뀐다 주의를 넘어’와 ‘생물 다양성을 위한 미래를 만들어요’를 적어 걸었다. 한채민 씨는 “어차피 안 바뀐다며 실천을 멀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가 마련한 ‘얼터너티브 퓨처’ 나무에 시민들이 다양한 메시지를 적어 걸어둔 모습. 전나경 기자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가 마련한 ‘얼터너티브 퓨처’ 나무에 시민들이 다양한 메시지를 적어 걸어둔 모습. 전나경 기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은 시민들이 직접 구호를 써서 손팻말을 만들 수 있도록 골판지, 물감, 붓 등을 갖춘 천막을 열었다. 전주에서 온 김고종호(43) 씨와 아들 고순찬(6) 군은 ‘불평등이 재난이다’를 골판지에 쓰고 지구를 그려 넣었다. 김고종호 씨는 “기후위기는 환경문제를 넘어서 미래세대의 기회까지 영향을 미친다”며 “아이가 있으니까 (기후위기를) 더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전주에서 온 고순찬 어린이가 민주노총이 마련한 골판지와 물감을 이용해 지구를 그리고 있다. 전나경 기자
전주에서 온 고순찬 어린이가 민주노총이 마련한 골판지와 물감을 이용해 지구를 그리고 있다. 전나경 기자

오픈마이크 행사에서는 다양한 시민이 자유 발언에 나섰다.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활동가는 “성장은 자본가에게 이윤을 남길 뿐, 모두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며 “상위 1%의 부자들을 위해 사람들과 새, 물살이(물고기), 비인간동물이 희생되고 있다”고 말했다. 안준후(10), 안가은(9), 김수민(8), 안온후(8) 어린이는 한명씩 돌아가며 마이크를 잡은 뒤 “기업이나 가게 같은 데도 전기를 함부로 쓰지 않아야 한다” “온실가스를 방출하는 화력발전소를 멈추고 대체에너지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공운수노조 서울시사회서비스원지부 오대희(36) 지부장은 기후위기로 인해 노인, 장애인, 어린이 등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 위기를 맞고 있다며 “국가와 사회가 돌봄을 직접 책임지고 질 좋은 돌봄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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