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난민이 아닌가요] ④ 이집트

프롤로그: 죽을 고비를 넘어 한국에 왔지만

전편: ①독재에 저항한 교사 수민우

② 내전의 아비규환에서 탈출한 티기스트

③ 정부 탄압에 맞선 소수 민족의 청년 아웅사

하산 무스타파는 이집트에서 쿠데타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난민이 됐다. 박시몬 기자
하산 무스타파는 이집트에서 쿠데타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난민이 됐다. 박시몬 기자

[고국] 쿠데타로 물거품이 된 행복

하산 무스타파(Hassan Moustafa·38)가 결혼하기 한 달 전, 이집트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하산은 이집트 북부 다칼리야 주, 만수라에 살았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페인트 자재를 유통하고 판매하며 안정적인 생계를 꾸렸다. 그곳에서 생화학자로 일하던 아내를 만났다.

2013년 이집트에서 군부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줄을 이어 행진하고 있다. 아흐마드 제공

아내와 결혼을 약속할 무렵인 2013년, 군부 세력이 당시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를 끌어내렸다. 쿠데타였다. 시민들이 쿠데타에 반대하자 경찰과 군인은 무력을 사용했다. 하산과 아내도 거리로 나서 군부 쿠데타에 반대하고 항의했다.

군부에 밀려난 무르시 대통령은 이집트 내 민주 정당인 자유정의당 소속이다. 자유정의당의 모태는 이집트에서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을 펼쳐온 정치세력 ‘무슬림 형제단’이다. 무르시 대통령은 2011년 ‘아랍의 봄’으로 30년간 지속되던 군사독재가 끝난 뒤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었다. 2년간 불었던 짧은 민주화의 바람은 2013년 7월, 다시 군부에 짓밟혔다. 무르시 대통령의 복귀를 촉구하던 시위대 가운데 사망자가 천 명을 넘어섰다.

자유정의당의 지방 지회에서 활동했던 하산도 2014년 7월 체포됐다. 쿠데타에 반대한 대가는 징역 10년형이었다. 판결이 나온 2015년, 하산은 수단으로 도주했다. 이집트에서는 삶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산은 가족과 생이별했다.

[이주] 민주주의 찾아 한국에 왔지만

수단에서의 망명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수단 정부가 이집트에서 망명한 난민들을 강제 출국시켰다. 2017년 하산은 수단을 떠나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말레이시아로 향했다. 말레이시아에서 비자 없이 머물 수 있는 기간은 최장 3개월이었다. 석 달이 지나면, 그는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옆 나라 인도네시아에 갔다. 그렇게 두 나라를 반복해 오갔다. 그러나 고국에 두고 온 가족과 함께 살려면, 정착할 수 있는 나라를 찾아야 했다.

하산은 고국에 있던 아내와 아이들을 말레이시아로 불렀다. 재회한 가족은 함께 살 곳을 탐색했다. 가장 가깝고 민주적인 나라, 한국을 택했다. 군부 독재를 이겨내고 민주화와 경제 성장을 이룬 나라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들은 2018년 3월, 한국에 왔다.

하산이 지난해 8월 자택에서 와 인터뷰하며 이집트에서 한국으로 오는 이주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김은송 기자

입국 직후,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에 난민인정 신청을 했지만, 하산과 가족은 일주일 동안 공항에 머물러야 했다. 이후 영종도에 있는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로 옮겼다. 난민신청자 가운데 영유아를 보육 중인 경우는 센터에 입주할 수 있었다. 하산 가족은 그곳에서 6개월간 숙식하며 한국 문화와 언어를 배웠다. 그러나 무슬림이 먹을 수 있는 ‘할랄’ 음식은 제공되지 않았고, 외부 출입과 구직 활동은 제한됐다. 직업 교육도 전혀 받지 못했다. 한국에 정착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을 센터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센터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 하산은 이렇게 말했다. “6개월의 센터 지원 기간이 끝나면, 난민신청자들은 한국 사회로 그냥 던져집니다.”

[비자] 대물림되는 난민 지위

하산과 아내, 아이들은 모두 G-1-5 비자 소지자다. 하산 가족은 한국에 머물기 위해 주기적으로 체류 기간 연장을 신청하고 있다. G-1-5 비자 소지자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불안정하다.

막노동 말고는 직업을 구할 수 없도록 제한을 두고 있어 가족의 생계유지가 힘들다. 게다가 아이들이 병원에 가거나 학교에 가야 할 때도 제약이 생겼다. 하산에게는 2명의 딸과 1명의 아들이 있다. 한국에서 태어난 막내딸은 두 살배기다. “지위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 몹시 힘들다”고 하산은 말했다.

갓 태어난 막내딸이 많이 아팠던 적이 있다. 예방접종 주사를 맞은 뒤, 열이 펄펄 났다. 하산은 아픈 딸을 인하대병원으로 데려갔다. 치료비로 700만 원이 청구됐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저히 낼 수 없는 금액이었다.

출입국·외국인청은 아무것도 지원해 주지 않았다. 고민 끝에 소셜미디어로 라이브 방송을 했다. 딸의 병원비를 도와달라는 하산의 호소에 응답해 주는 이들이 있었다. 이집트에 있는 동생과 한국이주인권센터 ‘와하 커뮤니티’도 돈을 보탰다. 난민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면, 열이 나서 치료받은 비용을 마련하는 일조차 벅차다.

지난해 8월 자택 인터뷰에서 하산이 번역기를 통해 한국은 난민 아동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김은송 기자

현재의 비자로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방과후 교육을 받기도 힘들다. 다른 외국인은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교육을, G-1 비자 소지자인 하산의 아이들은 돈을 내고 받아야 한다. 하산의 벌이로는 방과 후 수업까지 부담할 수 없다. 아이들이 더 배움을 얻을 수 없는 상황에 그는 가슴 아프다.

“저와 아내는 이집트에서 온 난민이 맞지만,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들까지 왜 난민이 되어야 합니까?”

[한국] 또 다른 감옥처럼 느껴지는 나라

6개월 간 숙식한 외국인 지원센터를 나온 뒤, 하산은 고정적인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기에 거의 매일 인력사무소에 갔다. 4~5개월 동안 일용직 일자리를 구해 생계를 이어갔다.

일용직을 전전하던 어느 날, 한국에서 처음 살 집을 소개해준 부동산 중개업자로부터 호텔의 일자리를 제안받았다. 인천 영종도에 있는 대형 호텔이었다. 1년 반 동안 하산은 손님을 응대하고 객실 침구류를 교체하는 일을 했다. 만족스러운 일자리였다. 동료들과 고용주는 그를 인간적으로 대해주었고, 일하다가 다쳤을 때는 유급휴가로 한 달 동안 쉴 수도 있었다.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하산은 다시 일용직 노동자로 돌아갔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호텔을 찾는 관광객이 급격히 줄었다. 고용주는 대부분의 호텔 직원을 해고했다. 하산은 일자리를 찾으러 다시 인력사무소에 갔다. 매일 다른 일을 하고 일당을 받고 있다. 고된 육체노동을 감당하는 게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특히 다리가 많이 아프다. 오랜 시간 고통을 버텨온 하산은 비싼 병원비를 무릅쓰고 지난해 11월 수술을 받았다.

지난해 8월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하산이 아들과 함께 시위하고 있다. 김은송 기자

하산은 정착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한국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한국에 들어온 지 5년이 지난 지금, 하산에게 한국은 또 다른 ‘감옥’처럼 느껴진다. 징역형 10년을 선고받은 판결문을 포함해 고국에서의 상황을 증명할 수 있는 모든 증거를 제출했지만, 하산과 그의 가족은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하산과 아내는 법무부의 결정에 항의하기 위해 지난해 7월 3일부터 정부과천청사 정문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하고 있다.

“법무부는 ‘이집트로 돌아가더라도 당신은 위험에 처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집트에서 항소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정부를 상대로 항소하여 정당한 판결을 받을 수 있다는 한국 법무부의 논리를 하산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팩트체크] 난민 때문에 유럽 등 선진국이 골머리를 앓는다? -> ‘거짓’

유럽 국가들이 난민 문제로 어려움만을 겪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이민자와 난민 입국을 배격하는 유럽의 극우정당을 중심으로 난민 수용을 거부하는 여론이 있기는 하지만, 난민 수용 정책이 성공을 거둔 사례도 있다.

특히, 독일은 적극적 이민 정책으로 인구 증가, 경제 생산성 제고를 이룬 성공적 모델로 평가받는다. 독일은 2000년대 들어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에 부딪혔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 시절인 2012년, 독일 정부는 ‘고학력자의 이민을 쉽게 하는 유럽연합 지침’ ‘전문가 이니셔티브 정책’ 등을 시행했다. 이후 독일 인구는 반등했고, 현재 전체 독일 인구의 5명 중 1명은 이민자 출신이다. 여론도 우호적이다. 2018년 독일의 통합·이민재단의 전문가협의회 조사 결과, 이민 배경이 없는 사람 가운데 60%가 ‘난민을 계속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는 왜 난민이 아닌가요]는 5회로 이어진다. ‘5회-시리아’ 편은 내전을 피해 난민이 된 시리아 소년 하산의 이야기를 담았다. 내전 상황에서 하산은 차마 자신의 지인을 향해 총을 들 수 없었다. 결국 시리아를 떠나기로 한 그는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어 가까스로 한국에 왔다.

인터랙티브: 나는 왜 난민이 아닌가요

(취재·글·사진: 이주연 이현이 김은송 박시몬 기자 / 영상 제작: 나종인 함민균 PD / 인터랙티브 구성: 김지윤 기자)

난민은 본국에 머무르기 어려워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 뜻을 보면, 어려움(難)에 부닥친 사람들(民)이다. 하지만 어떤 이는 그들을 한국을 어지럽힐(亂) 사람들(民)로 바라보기도 한다. 2018년 예멘 난민, 2021년 아프가니스탄 난민 등이 집단 입국하면서 한국인들도 난민을 더 자주 마주하게 됐지만, 많은 난민은 한국에서 법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난민을 받기 시작한 1994년부터 2021년까지 한국에 난민 지위를 신청한 사람은 7만 3384명이다. 그중 1163명만이 난민으로 인정됐다. G20에서 유럽연합을 제외한 19개 회원국 중 18번째로 난민 인정률이 낮을 정도로 한국은 난민 지위 부여에 엄격하다. 난민으로 인정되는 기준이 무엇인지, 무엇을 어떻게 입증해야 하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단비뉴스>는 지난해 5월부터 11월까지 7개월간 한국에 있는 난민을 취재했다. 난민 인정자 비자라고 불리는 F-2 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에 집중했다. 그들은 난민 신청자 신분인 G-1-5, 또는 인도적 특별체류자인 G-1-6 비자를 가지고 있다. 바라카작은도서관, 음성외국인도움센터, 피난처, 미얀마군부독재타도위원회, 재한줌머인연대 등 여러 단체의 도움을 받아,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난민을 만났다.

그 가운데서도 6개 나라 출신 난민에 집중했다.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들 가운데 출신 국적을 따져보면, 미얀마, 에티오피아, 방글라데시, 이집트 순으로 많다. 또한 인도적 특별체류 허가를 받은 이들 가운데는 시리아와 예멘 출신이 많다. 이들 6개 나라를 떠나 한국에 왔으나 아직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한 6명을 만났다.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머나먼 한국으로 오게 됐는지,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물었다. 상처 입은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 보니, 난민이라는 이름에 가려져 있던 그들의 내면에 닿을 수 있었다. 취재한 내용을 6회에 걸쳐 보도한다.

이들은 서로 다른 길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어 한국에 도착했다. 그랬어도 난민 인정률 1%의 벽을 뚫지 못했다. 그들 모두 기자에게 되물었다. 나는 왜 난민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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