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난민이 아닌가요] 에필로그 – 1%의 벽을 뚫지 못한 사람들
프롤로그 : 죽을 고비를 넘어 한국에 왔지만
전편 : ① 독재에 저항한 교사 수민우
어려울 난(難), 백성 민(民). 재난이나 박해 따위를 당해 곤궁에 빠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종교나 정치적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박해받고 차별당한다. 한국 사회도 난민들을 마주했다. 2018년에는 내전을 피해 500여 명의 예멘인이, 2021년에는 무장 단체 탈레반의 탄압을 피해 390여 명의 아프가니스탄인이 한국을 찾아왔다. 어떤 이들은 예멘인을 ‘가짜 난민’이라 불렀다.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인을 ‘특별 기여자’라고 불렀다. 그 명칭 아래 난민이라는 단어는 사라졌다.
이들은 우리 눈에 드러난 일부에 불과하다. 1994년부터 지난 1월 말까지 한국 정부는 86,249명의 난민 자격을 심사했다. 그 가운데 난민으로 인정받은 ‘진짜 난민’은 1.6%인 1,343명뿐이었다. 이들이 ‘진짜 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바늘구멍 같은 난민 인정률을 뚫어야 한다. 하지만 난민 인정을 받기 위한 방법과 그 기준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목숨까지 위협받는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얼마나 어떻게 입증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단비뉴스>는 지난해 5월부터 11월까지 7개월간 전국에 흩어져 사는 6명의 난민을 만났다. 난민이지만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1994년부터 2021년까지 한국에서 난민 지위 또는 인도적 체류 허가를 가장 많이 받은 나라 출신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고국을 떠나온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낯선 한국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물었다. 많은 대화를 통해 ‘난민’이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 분투해온 이들의 삶에 가닿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의 취재에도 해소되지 않은 중요한 물음이 남았다. ‘나는 왜 난민이 아닌가요?’ 그들 모두 기자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한국 사회가 내놓아야 한다. 연재를 마무리하며 6명의 이야기를 사진으로 전한다.
독재에 저항한 교사 수민우
군부독재에 저항했던 수민우(Su Myint Oo·38)는 군의 체포 위협을 피해 지난해 4월, 어린 딸과 함께 한국에 왔다. 수는 난민 신청자에게 부여되는 G-1-5 비자를 받았지만, 다시 연장하지 않으면 더는 한국에 살 수 없는 상황이다. 불안한 마음으로 난민 심사를 기다리는 수는 지난해 9월부터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며 한국에 적응하고 있다. 어려운 형편임에도 미얀마의 시민불복종운동 단체를 후원하고 있다. 매일 아침 수는 남편, 딸과 함께 미얀마로 돌아가 살 수 있기를 신에게 기도한다.
내전의 아비규환에서 탈출한 티기스트
에티오피아의 암하라 부족 출신인 아스퍼 티기스트 타디시(Asfaw Tigist Tadesse·35)는 집권 부족인 오로모족의 탄압을 피해 2019년 7월 한국에 왔다.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고국으로부터 도망쳐 왔지만, 한국은 티기스트를 난민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난민심사과정은 오히려 더 많은 상처를 남겼다. G-1-5 비자를 받은 티기스트는 김치 공장, 가구 공장 등을 전전했다. 그래도 이곳에서는 안전하게 살 수 있어 감사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티기스트는 언젠가 고국의 평화가 찾아오면 그리운 가족들과 재회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정부 탄압에 맞선 소수 민족의 청년 아웅사
아웅사(Aungshapru Marma·41)는 방글라데시 소수 민족인 ‘마르마’ 부족 출신 줌머(Jumma)인이다. 방글라데시 정부와 다수 민족인 벵골족의 탄압을 피해 10년간 학생 신분으로 스리랑카, 태국에 몸을 숨겼다. 2019년 5월 한국에 온 그는 박해의 증거와 함께 난민 신청을 했지만, 한국 정부는 그에게 ‘난민 불인정’ 결과를 통보했다. 천막 제조공장에서 힘들게 일하며 지내던 그는 얼마 전 뇌종양 증세로 수술을 받았다. 그는 난민 인정을 받아 미래에 대한 불안 없이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민주주의를 찾아온 하산
2013년 7월 이집트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하산 무스타파(Hassan Moustafa·38)의 결혼식을 한 달 앞둔 때였다. 반군부세력 활동에 참여했던 하산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도망쳤다. 갑작스럽게 이별을 마주한 하산과 가족들은 우여곡절 끝에 2018년 3월 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군부독재를 딛고 민주화를 이룬 한국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기를 하산은 꿈꿨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아픈 몸을 이끌고 낯선 타국에서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나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하산은 세 아이와 아내를 생각하며 오늘도 정착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내전으로 가족과 이별한 하산
하산 아흐메드 바탈(Hasan Ahmad Batal·25)은 시리아 내전을 피해 쌍둥이 동생과 함께 2015년 9월 한국에 왔다. 하산은 난민 불인정자 중 인도적 체류 허가자에게 주어지는 G-1-6 비자를 받았다. 19살 소년 하산은 7년간 하루 12시간씩 주 6회 택배 상·하차작업을 했다. 꾸준히 한국어 공부를 했고 음성 외국인자율방범대원으로 활동하며 한국에 적응했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는 고국이 아닌 이집트와 레바논에 가야 한다. 하산은 내전이 끝나 평화로워진 시리아에서 가족과 만나길 원한다.
죽음이 기다리는 고국을 떠나온 이스마일
예멘의 수도 사나에서 나고 자란 알파란 이스마일 모하메드 알리(Alfarran Ismail Mohammed Ali·32)는 예멘의 내전이 격화되며 2018년 1월 한국에 왔다. 대학에서 정보통신(IT)을 전공한 이스마일은 계속 공부하고 싶었지만, G-1-6 비자로는 유학생 비자를 받을 수 없었다. 제주, 구미, 서울에서 고된 육체노동을 하다가 현재는 그의 네 번째 직장인 전남 영암의 조선소에서 일한다. 다시는 가족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미래를 계획할 수 없는 불안정한 이 상황의 끝이 어디인지 이스마일은 알지 못한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가족을 꾸려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이스마일의 작은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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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콘텐츠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됐습니다.
단비뉴스 지역사회부, 시사현안팀 박시몬입니다.
누군가 환대할 수 있는 마음 간직하며 살겠습니다.
단비뉴스 환경부, 시사현안팀 김은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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