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난민이 아닌가요] ② 에티오피아

프롤로그: 죽을 고비를 넘어 한국에 왔지만

전편: 독재에 저항한 교사 수민우

티기스트가 집 거실에 앉아 창가를 바라보고 있다. 박시몬 기자
티기스트가 집 거실에 앉아 창가를 바라보고 있다. 박시몬 기자

[고국] 집권 부족의 탄압에 상처 입은 몸과 마음

암하라(Amhara). 32년간 아스퍼 티기스트 타디시(Asfaw Tigist Tadesse·35)의 정체성을 규정해온 단어다. 암하라는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부족 중 하나다. 내전이 끊이지 않는 에티오피아에는 80여 개가 넘는 부족들이 함께 살고 있다.

현 집권 부족인 오로모(Oromo)족은 암하라 부족과 오랜 기간 적대적 관계였다. 권력을 잡은 후에는 노골적으로 암하라인들을 배척하고 탄압했다.

티기스트와 그 가족도 이들의 횡포를 피해 갈 수 없었다. 티기스트의 남동생은 오로모족을 피해 거주하던 지역을 떠나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삼촌은 운영하던 가게를 잃었고 티기스트는 살고 있던 집을 잃었다.

오로모족의 공격으로 무너져내려 잔해만 남은 티기스트의 집. 티기스트 제공
오로모족의 공격으로 무너져내려 잔해만 남은 티기스트의 집. 티기스트 제공

늦은 밤,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어느 날이었다. 티기스트는 기차에서 내려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길을 걷는데 한 무리의 남성들이 다가왔다. 오로모 언어를 쓰던 그들은 티기스트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에티오피아 신분증에는 출신 부족이 적혀있다. 남성들은 신분증에 적힌 ‘암하라’를 확인하자 티기스트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간했다.

이후 티기스트는 밤늦게 퇴근하는 날마다 불안에 떨었다.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었다. 사방에 오로모 사람들이 있었다. 가족에게 피해 사실을 말하기도 꺼려졌다. 오직 큰언니에게만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그 일을 기억에서 지우려 했다.

[이주] 평화와 안전을 찾아 한국에 오다

티기스트는 2019년 7월 처음 한국에 왔다. 당시 근무하던 굴착기 제조회사에서 기술교육을 위해 한국으로 출장을 보냈다. 일주일간의 업무를 마치고 에티오피아로 돌아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티기스트는 이미 다른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출장이 끝나도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더는 특정 부족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공포에 떨며 살고 싶지 않았다.

에티오피아를 떠나올 때 짐은 최대한 간소하게 챙겼다. 한국에 머물려는 계획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성경과 전통의상, 그리고 평상복 몇 벌만 들고 왔다. 티기스트는 에티오피아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쫓겨 구체적 계획도 없이 한국에 왔다. 여동생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 전통의상을 들어 보이고 있는 티기스트. 에티오피아에서는 중요한 손님을 맞이할 때 전통의상을 입는다. 박시몬 기자
에티오피아 전통의상을 들어 보이고 있는 티기스트. 에티오피아에서는 중요한 손님을 맞이할 때 전통의상을 입는다. 박시몬 기자

한국에 온 첫날의 기억 가운데 가장 또렷한 것은 덥고 습한 날씨였다. 에티오피아는 한국처럼 사계절이 뚜렷하지 않다. 짧은 우기를 제외하면 대체로 온난한 날씨가 지속된다. 티기스트가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더 있다. 숙소에서 내려다보이던 서울의 야경이다. 가족과 집, 모든 것을 버리고 도착한 도시가 반짝이고 있었다. 이 도시에서 하루빨리 정착해 안정을 찾아야 한다고 티기스트는 생각했다.

출장 일정이 끝나자, 티기스트는 난민 지원 단체인 ‘피난처’를 찾아갔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체류 만료 기간을 며칠 남겨둔 2020년 7월, 난민인정 신청을 했다.

티기스트는 체류 만료 기간을 며칠 남겨두고 난민 지원 단체 ‘피난처’의 도움을 받아 난민인정 신청을 했다. 박시몬 기자
티기스트는 체류 만료 기간을 며칠 남겨두고 난민 지원 단체 ‘피난처’의 도움을 받아 난민인정 신청을 했다. 박시몬 기자

[비자] 또 다른 상처를 남긴 난민 심사

난민인정 신청 후 1년 8개월이 지난 2022년 3월이 되어서야 인터뷰를 받았다. 심사 인터뷰는 상처만 남겼다. 범죄자를 심문하는 자리에 가까웠다. 인터뷰에서 제공되는 통역 지원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수치심만 더했다.

난민 심사관은 티기스트에게 강간당한 사실을 설명해 보라고 말했다.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배려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인터뷰를 돕는 에티오피아 통역사는 티기스트의 집을 빼앗고 고국을 떠나게 만든 바로 그 부족 출신 남성이었다.

“그 남성 통역사에게 강간당한 일을 설명하기 정말 싫었어요. 그 상황이 너무 불편했죠. 하지만, 여성 통역사가 없으니 다른 선택권이 없었어요.”

난민인정 신청 후 1년 8개월 만에 받은 난민 심사 인터뷰는 ‘범죄자를 심문하는 자리에 가까웠다’고 티기스트는 회상한다. 박시몬 기자
난민인정 신청 후 1년 8개월 만에 받은 난민 심사 인터뷰는 ‘범죄자를 심문하는 자리에 가까웠다’고 티기스트는 회상한다. 박시몬 기자

괴로웠던 심사 끝에 티기스트가 받아든 결과는 ‘난민 불인정’이었다. 바늘구멍 같은 한국의 난민 인정률에 대해서는 이미 수없이 들어온 터라 기대가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난민 인정을 거절당한 이유는 충격적이었다.

“난민 인정을 거절당한 이유 중 하나는 내가 강간을 당했던 일이 단 한 번뿐이었다는 거였어요. 내가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강간당하기를 바라는 건가요? 난민 심사 과정에서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티기스트는 G-1-5 비자를 받았다. 안정적인 난민 지위를 바라지만, 난민 심사를 재신청하기는 두렵다. 심사를 다시 받는 과정에서 자신을 강간한 부족 출신에게 그 피해를 설명하는 일을 또 겪고 싶지는 않다.

티기스트는 난민 인정을 거절당했지만 최소한 한국에서는 안전하게 살 수 있어 감사한다고 말한다. 박시몬 기자
티기스트는 난민 인정을 거절당했지만 최소한 한국에서는 안전하게 살 수 있어 감사한다고 말한다. 박시몬 기자

[한국] 가족의 안정적인 삶을 위한 분투

티기스트는 난민 신청 후 넉 달 동안 월 40만 원의 정부 지원금을 받았다. 그 돈으로는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돈을 벌고 싶어도 난민 신청 이후 6개월 동안 취업이 금지됐다. 결국 난민지원단체인 ‘피난처’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 체류 6개월 만에 처음으로 구한 일은 피자가게 직원이었다. 하지만 오래 일하지는 못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근무 시간이 점점 줄어들어 그만둬야 했다. 이후 김치 공장, 가구 공장, 봉제 공장 등을 거쳤지만 익숙지 않은 육체노동을 오래 이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티기스트는 한국에서 일하며 임금을 주지 않으려는 고용주를 만난 적도 있다. 티기스트가 일하던 한 공장의 사장은 “외국인인 데다 난민인 사람에게 왜 한국 사람과 같은 임금을 지급해야 하냐”고 말했다. 4~5개월 동안 씨름을 벌인 끝에 한국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 밀린 임금을 받아냈다. 가장 최근에 일했던 동대문의 봉제 공장에서는 아픈 딸을 돌보기 위해 휴가를 냈다가 잘렸다.

법무부는 G-1 비자 소지자에게 단순노무직만 허용하고 있다. 티기스트는 이러한 취업규정 때문에 한국에 온 후로 여러 공장을 전전하며 육체노동을 이어가야 했다. 박시몬 기자
법무부는 G-1 비자 소지자에게 단순노무직만 허용하고 있다. 티기스트는 이러한 취업규정 때문에 한국에 온 후로 여러 공장을 전전하며 육체노동을 이어가야 했다. 박시몬 기자

티기스트는 한국에서 고국 출신의 남편을 만났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남편을 쏙 빼닮은 딸을 출산했다. 약 6년째 한국에 살고 있는 티기스트의 남편도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심지어 3년 전에는 비자 연장을 받을 이유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외국인등록증을 압수당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강제 퇴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3개월마다 체류허가를 받아야 한다.

육체노동 외에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티기스트는 취업조차 할 수 없는 남편을 건사해야 한다. 이들의 불안정한 지위는 딸에게도 이어졌다. G-1 비자를 가지고 있는 딸은 아직 여권도 만들지 못했다. 출입국청을 방문할 때마다 직원들은 티기스트에게 왜 딸이 여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반복해서 물었다.

“여권을 만들려면 에티오피아 대사관에 가야 하는데, 도망쳐온 나라의 대사관을 어떻게 제 발로 찾아갈 수 있겠어요? 아무리 설명해도 출입국청 직원들은 매번 같은 질문을 반복했어요. 제가 범죄자인 마냥 소리 지르는 직원도 있었죠. 이건 학대 아닌가요?”

티기스트가 난민 심사 과정을 설명하며 자주 반복한 단어는 ‘abusing’(학대)이다. 박시몬 기자
티기스트가 난민 심사 과정을 설명하며 자주 반복한 단어는 ‘abusing’(학대)이다. 박시몬 기자

언어 또한 한국 적응을 막는 큰 장벽 중 하나다. 한국어 공부를 놓은 적은 없지만 불규칙한 생활 탓에 꾸준히 이어 오기가 어려웠다. 티기스트는 아직 존댓말이 익숙지 않아 나이 지긋한 어른들에게 종종 핀잔을 듣는다.

티기스트는 불규칙한 생활에도 한국어 공부를 놓지 않았다. 박시몬 기자
티기스트는 불규칙한 생활에도 한국어 공부를 놓지 않았다. 박시몬 기자

티기스트 부부는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자다. 불안한 한국 생활 가운데 종교 생활만이 안정을 준다. 매일 아침을 명상으로 시작하고, 일요일이면 함께 교회에 간다. 직접 원두를 볶아 내린 커피와 에티오피아 음악은 낯선 타국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에티오피아인들은 춤과 음악을 사랑한다. 고국에서는 매주 온 가족이 모여 춤을 추곤 했다. 그 따뜻함과 유쾌함이 티기스트는 무척 그립다.

커피는 티기스트의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고향에서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모여 함께 커피를 내려 마시곤 했다. 박시몬 기자
커피는 티기스트의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고향에서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모여 함께 커피를 내려 마시곤 했다. 박시몬 기자

한동안은 가족들과의 통화도 쉽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에티오피아의 내전 상황으로 인터넷이 자주 끊겼기 때문이다. 티기스트는 고국에 남아있는 가족들이 걱정이다. 특히 어머니는 오로모족 사람들이 많은 지역 가까이에 살고 있어 늘 불안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그리운 사람은 아들이다. 에티오피아에서 만나던 남자친구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현재 티기스트의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15살의 아들에게는 아직 엄마가 필요하다. 혹시 아들이 분쟁에 휘말려 다칠까 봐 불안하다. 아들과 통화할 때마다 집에만 안전히 있으라며 신신당부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팩트체크] 난민 지원에 많은 국가 예산이 쓰인다? -> ‘거짓’

티기스트와 같은 난민에게 국가 예산이 낭비되고 있다는 오해가 있다. 공익법센터 ‘어필’의 이일 변호사는 “한국의 난민 지원 예산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2022년 기준, 한국 정부의 난민 관련 예산은 35억 6,200만 원으로, 정부 총예산 607조 7,000억 원의 0.0006%에 그친다. 그마저도 예산의 절반 이상은 난민 심사에 필요한 통역비나 출장비, 조사관 활동비 등 행정비용으로 쓰인다.

난민 지원 예산 가운데 난민 또는 난민신청자를 직접 지원하는 돈은 매우 부족하다. 난민신청자는 난민법에 따라 최대 6개월간 생계비를 지원받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난민신청자는 생계비 지원 제도가 있다는 걸 모르거나 신청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2020년에는 국내 난민신청자 6,684명 중 265명, 2021년에는 2,341명 중 43명만 생계비를 받았다.

생계비를 지원받는다 해도 지원액이 1인 가구 기준 월 40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 지원 기간도 평균 3개월에 그친다. 그런데 법무부는 난민 신청일로부터 6개월간 난민신청자의 취업을 금지하고 있다. 6개월 동안 스스로 돈을 벌 수도,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도 없으니, 난민신청자들은 말 그대로 극빈의 상황에 내몰린다. 6개월을 버틴다 해도, 길게는 몇 년에 걸쳐 진행되는 난민 심사가 끝날 때까지 스스로 생계를 해결해야 한다.

[나는 왜 난민이 아닌가요]는 3회로 이어진다. ‘3회-방글라데시’ 편은 소수민족 줌머인에 대한 학살과 고문을 피해 한국에 온 청년 아웅사의 이야기를 보도한다. 정부의 탄압을 피해 고국을 탈출한 뒤 15년간 여러 나라를 떠돌았던 아웅사는 이제 한국에 정착해 안정적인 삶을 꾸리길 원한다.

인터랙티브: 나는 왜 난민이 아닌가요

(취재·글·사진: 이주연 이현이 김은송 박시몬 기자 / 영상 제작: 나종인 함민균 PD / 인터랙티브 구성: 김지윤 기자)

난민은 본국에 머무르기 어려워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 뜻을 보면, 어려움(難)에 부닥친 사람들(民)이다. 하지만 어떤 이는 그들을 한국을 어지럽힐(亂) 사람들(民)로 바라보기도 한다. 2018년 예멘 난민, 2021년 아프가니스탄 난민 등이 집단 입국하면서 한국인들도 난민을 더 자주 마주하게 됐지만, 많은 난민은 한국에서 법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난민을 받기 시작한 1994년부터 2021년까지 한국에 난민 지위를 신청한 사람은 7만 3384명이다. 그중 1163명만이 난민으로 인정됐다. G20에서 유럽연합을 제외한 19개 회원국 중 18번째로 난민 인정률이 낮을 정도로 한국은 난민 지위 부여에 엄격하다. 난민으로 인정되는 기준이 무엇인지, 무엇을 어떻게 입증해야 하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단비뉴스>는 지난해 5월부터 11월까지 7개월간 한국에 있는 난민을 취재했다. 난민 인정자 비자라고 불리는 F-2 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에 집중했다. 그들은 난민 신청자 신분인 G-1-5, 또는 인도적 특별체류자인 G-1-6 비자를 가지고 있다. 바라카작은도서관, 음성외국인도움센터, 피난처, 미얀마군부독재타도위원회, 재한줌머인연대 등 여러 단체의 도움을 받아,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난민을 만났다.

그 가운데서도 6개 나라 출신 난민에 집중했다.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들 가운데 출신 국적을 따져보면, 미얀마, 에티오피아, 방글라데시, 이집트 순으로 많다. 또한 인도적 특별체류 허가를 받은 이들 가운데는 시리아와 예멘 출신이 많다. 이들 6개 나라를 떠나 한국에 왔으나 아직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한 6명을 만났다.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머나먼 한국으로 오게 됐는지,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물었다. 상처 입은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 보니, 난민이라는 이름에 가려져 있던 그들의 내면에 닿을 수 있었다. 취재한 내용을 6회에 걸쳐 보도한다.

이들은 서로 다른 길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어 한국에 도착했다. 그랬어도 난민 인정률 1%의 벽을 뚫지 못했다. 그들 모두 기자에게 되물었다. 나는 왜 난민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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