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난민이 아닌가요] ⑥ 예멘

프롤로그 : 죽을 고비를 넘어 한국에 왔지만

전편 : ① 독재에 저항한 교사 수민우

② 내전의 아비규환에서 탈출한 티기스트

③ 정부 탄압에 맞선 소수 민족의 청년 아웅사

④ 군부를 피해 민주주의를 찾아온 하산

⑤ 내전으로 가족과 이별한 하산

이스마일은 내전이 격화된 고국 예멘을 떠나 난민이 됐다. 박시몬 기자
이스마일은 내전이 격화된 고국 예멘을 떠나 난민이 됐다. 박시몬 기자

[고국] 하루아침에 난민이 된 22살 청년

고국을 떠나오기 전 알파란 이스마일 모하메드 알리(Alfarran Ismail Mohammed Ali·32)는 평범한 22살 청년이었다. 예멘의 수도 사나(Sanaa)에서 나고 자란 이스마일은 고향에 있는 대학에서 정보통신(IT)을 전공했다. 회계사로 오래 일한 아버지로부터 회계 일도 배웠다.

고국을 떠날 당시 이스마일은 대학을 갓 졸업한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이스마일 제공
고국을 떠날 당시 이스마일은 대학을 갓 졸업한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이스마일 제공

대학 졸업을 앞둔 2014년 11월, 이스마일은 인도로 유학을 떠났다. 6개월간 영어 공부를 하고 돌아올 계획이었다. 대학 졸업장과 영어 구사 능력이 있으면 예멘으로 돌아와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것이 영영 고국을 떠나는 길이 될 줄은 몰랐다.

이스마일이 인도에 머무는 동안 고국의 내전이 격화됐다. 사우디아라비아 국경 인근 지역에서 일어난 분쟁이 예멘 전체를 덮쳤다. 이스마일의 고향 사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매일 같은 공중 폭격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죽고 다쳤다. 아이들은 부모를 잃고 길가를 떠돌았다. 이스마일의 이웃은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던 중 폭격을 당했다. 그 자리에서 부부와 아이 6명 모두 즉사했다.

2015년 3월 이후 이스마일의 고향은 폭탄이 터지는 전쟁터로 변했다. 이스마일의 이웃을 포함해 많은 시민이 죽거나 다쳤다. 박시몬 기자
2015년 3월 이후 이스마일의 고향은 폭탄이 터지는 전쟁터로 변했다. 이스마일의 이웃을 포함해 많은 시민이 죽거나 다쳤다. 박시몬 기자

인도에 올 때 예매해둔 귀국 비행기 표는 무용지물이 됐다. 고국에 남아있는 가족이 걱정됐지만, 폭탄이 터지는 예멘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비자 만료 기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예멘인을 받아주는 다른 나라를 찾아야 했다. 비자 만료 이틀 전, 이스마일은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말레이시아로 떠났다.

[이주] 타지를 전전하는 삶의 시작

말레이시아에서 일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3개월 만에 간신히 취업한 회사에서 이스마일은 회계사로 일했다. 하지만 월급이 턱없이 적었다. 2년 반 동안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았다. 300~400달러의 월급으로는 집세와 식비 같은 기본적 생계를 해결하기도 어려웠다.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나야 했다. 이스마일은 한국을 택했다. 제주도라는 작은 섬에 가면, 비자 없는 예멘인을 받아준다고 했다.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018년 1월, 이스마일은 제주공항에 첫발을 내디뎠다. 어깨에 걸친 배낭 안에는 외투 두 개와 3000달러, 관광객으로 보이기 위해 구매한 중고 카메라가 들어있었다. 그런 행색과 차림을 준비한 이유를 묻자, 이스마일은 “한국에 장기체류하려 왔다는 걸 알면 바로 쫓아낼까 두려웠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랬어도 공항 출입국 직원은 그를 멈춰 세웠다. 직원은 이스마일을 방으로 데려가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를 마치 범죄자 대하듯이 했어요. 눈빛에서 느낄 수 있었죠. ‘여기서 뭐 하는 거냐.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었어요.”

낯선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이스마일은 적대감 가득한 질문들과 마주해야 했다. 박시몬 기자
낯선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이스마일은 적대감 가득한 질문들과 마주해야 했다. 박시몬 기자

그래도 이스마일은 조사관의 질문에 침착하게 답변했다. 말레이시아행 출국 비행기 표까지 확인받고 나서야 2시간가량의 조사가 끝이 났다. 공항을 나와 처음 마주한 제주는 온통 하얗게 덮여있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눈이었다. 곧 매서운 겨울바람이 얇은 반소매 티셔츠를 뚫고 들어왔다.

[비자] 거절의 연속인 한국에서의 삶

일단 제주 땅을 밟은 뒤, 이스마일은 제주출입국·외국인청에서 난민인정 신청을 했다. 난민신청자에게 부여되는 G-1-5 비자로 약 1년간 생활했다. 두 번의 인터뷰 끝에 난민 인정은 거절당했고 인도적 체류 허가인 G-1-6 비자를 받았다.

난민심사관은 이스마일에게 “가족이 예멘에 남아있으니 고국으로 돌아가도 위험하지 않은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스마일은 “인터넷에 ‘예멘 내전’을 검색해 보기만 해도 금방 알 수 있는데, 왜 실제 존재하는 것에 대해 내가 거짓말을 하겠느냐”라고 되물었다.

그랬어도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제 이스마일은 1년마다 비자를 갱신해야만 합법적으로 한국에 머물 수 있다.

지난해 7월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 서울출입국외국인청을 찾은 이스마일. 이스마일은 1년마다 비자를 갱신해야 한국에 합법적으로 머물 수 있다. 김은송 기자
지난해 7월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 서울출입국외국인청을 찾은 이스마일. 이스마일은 1년마다 비자를 갱신해야 한국에 합법적으로 머물 수 있다. 김은송 기자

한국에서의 첫 직장은 지인이 소개해 준 경북 구미의 스티로폼 공장이었다. 하지만 이스마일을 맞이한 건 환대가 아닌 무시와 차별이었다. 공장 관리자는 툭하면 한국어로 욕을 뱉었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 네가 전쟁을 피해 온 건 내 알 바 아니야.” 길거리에서는 수없이 인종차별을 당했다.

이스마일은 곧 다른 일자리를 찾아 제주로 돌아갔다. 그러나 주어진 선택지는 고된 육체노동과 열악한 노동환경뿐이었다. 이스마일은 만화책 제조공장과 배달 기사일 등을 전전했다. 그동안 쌓아온 경력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대학 졸업장도 영어 능력도 더 나은 일자리를 얻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스마일은 한국에서 공부를 이어 나가고 싶었다. 대학원 진학을 위해 한국어 공부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거절당하고, 또 거절당했다. 학교는 이스마일에게 G-1 비자가 아닌 유학생 비자를 요구했다. 난민 비자조차 받지 못하는 데 유학생 비자를 받을 방법은 없었다. “문을 두드릴 의욕이 더 남아있지 않다”고 이스마일을 말했다.

“G-1 비자는 가장 비인격적인 비자에요. 난민들에게 알아서 살라는 거나 마찬가지죠. 마치 개 한 마리를 풀어 놓듯이 말이에요.”

[한국] 정처 없이 떠도는 삶의 끝을 꿈꾸다

이스마일은 현재 전남 영암의 조선소에서 일한다. 한국에서 구한 네 번째 직장이다. 선박 본체를 만드는 공정 중 파이프를 옮기고 조립하는 업무를 맡았다. 작업장은 7층 높이에 있다. 늘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며칠 전에는 같이 일하던 작업자가 추락해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했어요. 무섭고 힘들지만 다른 선택권이 없어요. 어렵게 구한 일자리를 쉽게 그만둘 수는 없죠”

이스마일이 근무하는 조선소 앞에 서 있다. 이스마일은 같은 회사 동료에게 중고로 구매한 자전거로 매일 출퇴근을 한다. 박시몬 기자
이스마일이 근무하는 조선소 앞에 서 있다. 이스마일은 같은 회사 동료에게 중고로 구매한 자전거로 매일 출퇴근을 한다. 박시몬 기자

영암에 오기 전 4개월간의 서울살이는 팍팍했다. 지인의 소개로 배달 기사 일을 구했지만, 서울의 물가는 이스마일이 감당하기에 너무 벅찼다. 이태원의 작은 옥탑방 한 칸이 이스마일에게 허락된 공간이었다. 요리할 수 있는 가스레인지도, 세탁기도, 에어컨도 없었다. 단열이 허술해 여름에는 벽이 뜨겁게 달궈질 정도로 열기가 올랐다. 건물 계단은 너무 좁아 새 가구를 들고 올라갈 수조차 없었다.

이스마일이 4개월 동안 머물렀던 서울 이태원의 옥탑방. 김은송 기자
이스마일이 4개월 동안 머물렀던 서울 이태원의 옥탑방. 김은송 기자

고국에 있는 가족과 가끔 통화한다. 그것만으로는 타지 생활의 외로움이 채워지지 않는다. 형제들이 간간이 보내는 조카들 사진을 볼 때면, 가족을 꾸려 미래를 계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고국에 있던 시절, 이스마일은 약혼했었다. 상대는 대학교에서 만난 여자친구였다. 하지만 예멘을 떠나온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이제 다른 사람과 결혼해 예멘에서 가정을 꾸렸다.

이스마일이 고국의 누나가 보내준 조카 사진을 보고 있다. 예멘을 떠난 후에 태어난 조카들을 이스마일이 직접 만난 적은 없다. 박시몬 기자
이스마일이 고국의 누나가 보내준 조카 사진을 보고 있다. 예멘을 떠난 후에 태어난 조카들을 이스마일이 직접 만난 적은 없다. 박시몬 기자

“가족을 한국에 데려올 수도 없고, 제가 예멘에 갈 수도 없습니다. 8년째 이렇게 떠돌며 살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2017년에는 고국에 계신 어머니가 병환으로 돌아가셨는데 임종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도 건강이 안 좋으신데 다시는 보지 못할까 봐 두렵습니다.”

한국에 온 지 5년이 다 되어 가도록 이스마일은 같은 자리에 멈춰있다. 그 누구도 자신을 반기지 않고 앞날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언제까지 머물 수 있을지 모른다.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예멘 사람들은 이곳에서 친구를 만들 수조차 없었어요. 예멘 사람이라고 밝히는 순간 ‘가짜 난민’이라며 도망가 버리죠. 예멘 난민 중에는 대학을 나오고 교육받은 사람들도 아주 많아요. 난민은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른 선택지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떠나온 사람들일 뿐이에요”

[팩트체크] 난민 수용하면 범죄율이 증가한다? -> ‘거짓’

2018년 제주도에 들어온 500여 명의 예멘 난민을 두고, 이들이 강간이나 강도, 테러 등 심각한 범죄를 일으킬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난민법, 무사증 입국, 난민 신청 허가 등을 폐지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70만 명 이상이 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우려했던 것과 달리, 예멘 난민이 중범죄를 저질렀다는 보고는 지금까지 없다.

이민자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온 연구소 ‘신미국경제’(New American Economy)의 자료를 보면, 2006년에서 2015년까지 미국에서 가장 많은 난민 재정착 프로그램을 진행한 지역 10곳 가운데 9곳에서 오히려 범죄율이 감소했다.

법적 지위가 불안정한 난민들은 정착하려는 국가의 법령을 충실히 따르는 경향이 있다. 범죄에 연루되면, 난민 인정이나 체류 기간 연장 등에서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다. 이미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이라 해도 형사처벌 이후에는 난민 지위를 박탈당할 수 있다.

[나는 왜 난민이 아닌가요]는 7회로 이어진다. ‘7회-에필로그’ 편은 기사에 미처 담지 못한 취재원들의 모습과 장면들을 전한다.

인터랙티브 : 나는 왜 난민이 아닌가요

(취재·글·사진: 이주연 이현이 김은송 박시몬 기자 / 영상 제작: 나종인 함민균 PD / 인터랙티브 구성: 김지윤 기자)

난민은 본국에 머무르기 어려워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 뜻을 보면, 어려움(難)에 부닥친 사람들(民)이다. 하지만 어떤 이는 그들을 한국을 어지럽힐(亂) 사람들(民)로 바라보기도 한다. 2018년 예멘 난민, 2021년 아프가니스탄 난민 등이 집단 입국하면서 한국인들도 난민을 더 자주 마주하게 됐지만, 많은 난민은 한국에서 법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난민을 받기 시작한 1994년부터 2021년까지 한국에 난민 지위를 신청한 사람은 7만 3384명이다. 그중 1163명만이 난민으로 인정됐다. G20에서 유럽연합을 제외한 19개 회원국 중 18번째로 난민 인정률이 낮을 정도로 한국은 난민 지위 부여에 엄격하다. 난민으로 인정되는 기준이 무엇인지, 무엇을 어떻게 입증해야 하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단비뉴스>는 지난해 5월부터 11월까지 7개월간 한국에 있는 난민을 취재했다. 난민 인정자 비자라고 불리는 F-2 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에 집중했다. 그들은 난민 신청자 신분인 G-1-5, 또는 인도적 특별체류자인 G-1-6 비자를 가지고 있다. 바라카작은도서관, 음성외국인도움센터, 피난처, 미얀마군부독재타도위원회, 재한줌머인연대 등 여러 단체의 도움을 받아,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난민을 만났다.

그 가운데서도 6개 나라 출신 난민에 집중했다.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들 가운데 출신 국적을 따져보면, 미얀마, 에티오피아, 방글라데시, 이집트 순으로 많다. 또한 인도적 특별체류 허가를 받은 이들 가운데는 시리아와 예멘 출신이 많다. 이들 6개 나라를 떠나 한국에 왔으나 아직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한 6명을 만났다.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머나먼 한국으로 오게 됐는지,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물었다. 상처 입은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 보니, 난민이라는 이름에 가려져 있던 그들의 내면에 닿을 수 있었다. 취재한 내용을 6회에 걸쳐 보도한다.

이들은 서로 다른 길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어 한국에 도착했다. 그랬어도 난민 인정률 1%의 벽을 뚫지 못했다. 그들 모두 기자에게 되물었다. 나는 왜 난민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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