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 라솜(мир разом), 다함께 평화] ⑩ 에필로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6개월에 접어들었다. 개전 초기 러시아는 20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동원해 우크라이나 동·남·북 쪽으로 진격하며 수도 키이우(Kyiv)로 향했다. 키이우로 들어서기 위해 인근 도시 부차(Bucha)와 이르핀(Irpin)을 통과해야 했는데, 이때 러시아군은 군사 시설은 물론 많은 민간 시설을 공격했다.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의 패퇴를 전망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군인과 시민들은 결사항전했다. 러시아는 수도 점령에 실패했다.
4월 중순, 러시아는 전략을 바꿔 동부 지역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공세를 퍼부었다. 루한시크(Luhansk) 주와 도네츠크(Donetsk) 주를 일컫는 돈바스(Donbas) 지역에서 교전이 시작됐다. 동남부 지역은 2014년 러시아가 강제 합병한 크름반도와 이어지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러나 서방의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는 돈바스 지역에서도 반격을 가했다. 교착상태에 빠진 전쟁은 장기전으로 접어들었다. 유엔(UN)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약 5500명의 우크라이나 민간인이 사망했고, 700만 명 이상이 피난길에 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난민이다.
현재까지 러시아는 한반도 면적에 달하는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을 점령했다. 하지만 볼로디미르 젤렌스키(Volodymyr Zelenskyy)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독립기념일을 하루 앞둔 지난 8월 23일, 러시아를 밀어내고 빼앗긴 동남부 영토까지 되찾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크름반도와 맞닿아 있는 헤르손 지역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의 수복 작전이 벌어지고 있다.
<단비뉴스>는 올해 3월부터 전쟁과 직간접적으로 얽힌 우크라이나의 시민, 군인, 한국인 등 8명의 이야기를 보도했다.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그들의 근황을 다시 물었다.
한국에서 만난 우크라이나인들
6월 26일, 서울 정동교회 앞에서 열린 반전 집회에서 이리나 마치쉐브스카(Iryna Martsishevska) 씨를 만났다. 지난 3월 만났을 때와 똑같은 전통복 비시반카(Vyshyvanka)를 입고 있었다. 이리나 씨는 전쟁 발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르핀에 살던 할머니를 잃었다. 할머니의 이름을 물려받은 손녀는 할머니의 삶을 <단비뉴스>에 전했었다.
이제 어머니와 여동생 셋은 프랑스로 피난을 갔고, 아버지는 고향에 남아 집을 지키고 있다. 고향 마을은 포격 등으로 무너지고 망가졌다. 다행히 아버지는 무사하다. 아버지는 자신과 이웃의 지붕, 창문 등을 직접 고치며 마을을 복구하는 데 힘쓰고 있다. 이리나 씨는 그간 만든 집회 포스터가 스무 장쯤 된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무사히 치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어요. 아버지는 마음을 추스르고 망가진 것들을 고쳐나가고 있어요. 엄마와 여동생 셋은 안전해요. 첫째와 둘째는 아버지 곁으로 돌아갔고, 엄마와 셋째 동생은 아직 그곳에 있는 편이 좋은 것 같아요.”
6월에 만났던 광주 고려인 마을의 새날학교 교사 안드레이 리트비노프(Andrei Litvinov) 씨도 한국에서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안드레이 씨는 한국인 아내, 그리고 자녀 다섯 명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전쟁이 발발하자 나이가 많은 아버지, 그리고 형이 군에 동원됐고 안드레이 씨도 폴란드로 피난 간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돕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그간 폴란드의 우크라이나 난민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고 그는 전했다. 많은 난민이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그곳에 정착해 살아가고 있다. 난민을 돕느라 가족에 소홀해졌다는 안드레이 씨는 당분간 한국 생활에 집중할 생각이다. “한국에서 교사로 그리고 통·번역가로 일하며 가정을 챙기겠다”고 그는 말했다.
한국으로 피난 온 이들도 있었다. 4월에 만난 고려인 알미라 텐(Almira Ten) 씨와 6월에 만난 마리아 티모셴코(Mariia Tymoshenko) 씨다. 알미라 씨는 손자들과 함께 3월에 입국했다. 올해 예순인 알미라 씨는 아직 휴대전화가 없으며 안산의 한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그의 손녀 리사(Liza) 씨가 텔레그램을 통해 알려왔다. 할머니와는 잘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이지만 6월 25일에는 알미라 씨의 생일잔치를 한국에서 치렀다고 리사 씨가 말했다.
마리아 씨도 지난 4월 아들과 함께 남편이 있는 충남 천안시 직산으로 왔다. 부차(Bucha) 민간인 학살이 있기 직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부차의 시민들은 힘을 합쳐 도시를 복구하는 데 힘쓰고 있다고 마리아 씨가 전했다. 마리아 씨의 아들은 9월부터 온라인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다니던 학교 수업에 임하기 시작했다. 그곳의 학생들도 아직 안전하지 않아 전부 온라인으로 공부하고 있다.
낯선 땅에서 시작한 새로운 삶
갓난아기를 안고 마리우폴(Mariupol) 아조우스탈 제철소(Azovstal Steel Plant) 지하 벙커에서 두 달간 지냈던 안나 자이체바(Anna Zaitseva) 씨는 독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지난 5월, 안나 씨의 남편은 마리우폴에서 러시아군 포로로 잡혀갔다. 그 후, 남편에 대해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지난달 29일 미국 공영라디오(NPR)의 보도에 따르면, 마리우폴을 점령한 러시아군의 지휘자는 우크라이나 포로들을 재판에 회부하겠다고 발표했다. 러시아군은 마리우폴 교향악단 극장에 포로들을 수용할 수 있는 감옥을 만들고 있다. 살아 있다면, 그의 남편도 그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안나 씨는 더 이상 울지 않는다. 이제 겨우 10개월 된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이다. 아들 스브야를 위해 강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남편의 소식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어요.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어요. 그렇지만 아기는 건강하고 이곳에서 우리는 안전해요. 우리는 이제 자주 웃기도 하고, 이곳에서 함께 살아갈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고 있어요.”
헤르손의 한 학교에서 역사 교사로 일하던 바실 부라소프(Vasil Buravtsov) 씨도 새로운 일상을 찾고 있다. 헤르손이 러시아군에 점령된 후 신변에 위협을 느껴 인근 도시로 피신했던 그는 현재는 난민으로 등록돼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지대에 머물고 있다. 아버지와 조부모는 여전히 헤르손에 있지만, 안전한 곳에 은신해있다고 그는 말했다.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하루빨리 돌아가고 싶지만, 기약은 없기에 당장은 그곳에서 일상을 이어가기로 했다.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현지인들과 가끔 축구를 하고, 이곳에 함께 온 우크라이나 친구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해요. 이곳에서 학위를 따기 위해 대학 입시도 고민하고 있어요. 고향이 정말 그립지만, 조금씩 상처를 회복하고 있어요.”
현지 취재한 사진가, 여권법 위반으로 검찰에 송치
프리랜서 사진가 장진영 씨는 한국 언론인 가운데 처음으로 목숨 걸고 우크라이나에 들어갔다. 현장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였다. 그는 보름 동안 전쟁의 참상과 민간인의 눈물을 프레임에 담아 돌아왔다. 그러나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여권법 제17조를 위반한 혐의로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8월 10일 그는 여권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돼 현재 재판을 기다리는 중이다.
장 씨는 우크라이나 르비우(Lviv)에서 폴란드로 가는 기차 안에서 아이들을 만났다. 전쟁이 뭔지 모르는 아이들의 얼굴이 기억난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카메라에 담았다. 장 씨는 요즘도 가끔 그 아이들이 생각나면 사진들을 꺼내 본다. 장 씨는 ‘가장 거룩한 사도 베드로와 바울교회’에서 열린 장례미사에서 만난 사람들도 기억한다. 그러나 그들의 자세한 사연을 구체적으로 취재하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재판을 기다리면서도 그는 계속 사진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산업 재해 현장들을 돌아다니며 기록하고 있다. 장 씨는 법적 처벌이 어떻게 내려질지는 중요치 않다고 했다. 그는 언론 자유의 침해라는 구조적 문제를 계속해서 공론화하고 개선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뒤늦게 한국 언론이 우크라이나에 들어가기 시작하긴 했지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외신 등을 통해 여러 번 소개된 지역의 이야기를 뒤늦게 제약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예외적 허용이 있었던 것이지 완전한 자유가 보장된 것은 아니라고 봐요.”
별이 된 젊은 영웅
33살의 데느스 안티포우(Denys Antipov) 씨는 우크라이나 제95공수여단의 중위였다. 그는 전쟁이 시작된 지 보름 만에 폭격으로 허리에 부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했었다. 동료를 여럿 잃었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그는 병원에 있던 3월부터 4월 말까지 <단비뉴스>와 줌(ZOOM) 화상 회의 서비스로 여러 차례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국을 사랑했던 그는 전쟁이 끝나면 다시 한국으로 올 계획이라고 말했다. 결혼을 하고 가정도 꾸리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당장은 동료들에게 미안함을 느낀다며 하루빨리 전선으로 가길 희망했다. 퇴원 직후 그는 돈바스 지역 최전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5월 11일 전투 중에 사망했다.
데느스 씨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의 선후배로 지내던 그의 친구 줄리아 스물리악(Julia Shmuliak) 씨를 6월 26일 서울 정동교회 앞에서 만났다. 그는 데느스 씨의 사진을 포스터로 만들어 집회에 참여했다. 줄리아 씨는 친구의 사망 소식에 한동안 괴로워했다. 우크라이나에 있는 데느스 씨의 아버지에게 연락을 취해 조의금을 보냈다.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이후 한국에서 열리는 반전 집회에 그의 생전 사진을 들고 참여하고 있다.
“데느스는 똑똑했고, 유머 감각도 있었죠. 우크라이나 역사 이야기에 늘 눈이 반짝였고 말이 많아졌어요. 그는 한국어와 영어를 잘했는데, 특히 한국을 많이 사랑했어요. 그의 유가족과 통화하면서 저는 울지 않았어요. 그들의 슬픔에 제 슬픔까지 보태고 싶지 않았거든요.”
올해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단비뉴스>는 현지에 가지 않고도 전쟁을 취재할 방법을 고민했다. 전쟁이 발발하고 지난 3월부터 약 50명의 취재원을 직접 또는 화상 회의를 통해 만났다. 그렇게 10화에 걸쳐 ‘메르 라솜 – 다함께 평화’ 연재에 그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았다. 전쟁을 다루는 언론의 보도가 뜸해졌다. 그러나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단비뉴스>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우크라이나에 대한 관심과 보도를 이어가겠다. (편집자)
[메르 라솜(мир разом), 다함께 평화] 연재 보기
⑩ 우크라이나, 더 이상 울지 않아요
단비뉴스 청년부, 소셜전략팀 유제니입니다.
구조를 관찰하고,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사람에 집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