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에서 벌어다가 이승에서 쓴다.” 제주 해녀 사이에서 회자되는 말이다. 해녀는 바다 밑에서 숨을 참아 해산물을 길어 올린다. 그들은 바다를 일구어 제주를 지켜왔다. 그들의 곁을 묵묵히 지켜온 사람이 있다. 50년째 해녀복을 만들고 있는 정부미자(86) 씨다. 제주 해녀들은 그를 ‘잠수복 언니’라 부른다. 그가 만든 해녀복으로 오늘도 제주 해녀는 물질(바닷속에서 해산물을 따는 일)을 한다. <단비뉴스>는 지난 6월 20일 제주도 구좌읍 세화리에서 정 씨를 만났다. 평생을 해녀복과 함께해 온 그의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전한다.

정부미자(86) 씨가 해녀복을 만든 후 환하게 웃고 있다. © 박시몬
정부미자(86) 씨가 해녀복을 만든 후 환하게 웃고 있다. © 박시몬

제주 해녀의 든든한 ‘잠수복 언니’

일제 시기 그의 아버지와 두 남동생은 생계를 위해 정기연락선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를 타고 제주에서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 정 씨는 1937년 3월 일본 오사카 중부 스이타시(吹田市)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과 친지들은 그를 ‘화자(花子, 하나꼬)’라 불렀다.

해방 후 9살이 되던 1946년, 정 씨는 할아버지가 사는 제주도 구좌면 김녕리에 왔다. 그는 김녕국민학교 졸업 후 호적에 등록된 이름이 '정부미자'(鄭富美子)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의 할아버지가 후미꼬(富美子·ふみこ)라는 일본식 이름을 호적에 올렸기 때문이다. 부모의 농사일을 돕던 10대에 그가 제주에서 먹고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물질이었다. 그는 16살에 제주 김녕리 마을 바다에 들어가기 시작해 18살이 되던 1955년부터 본격적으로 물질을 시작했다.

정 씨가 본을 재차 확인하면서 원단 위에 초크로 본을 뜨고 있다. ⓒ 박시몬
정 씨가 본을 재차 확인하면서 원단 위에 초크로 본을 뜨고 있다. ⓒ 박시몬
정 씨가 원단 위에 본을 대고 초크로 모양을 뜨고 있다. ⓒ 박시몬
정 씨가 원단 위에 본을 대고 초크로 모양을 뜨고 있다. ⓒ 박시몬
정 씨가 원단의 길이를 재기 위해 목에 두른 줄 자를 펼치고 있다. ⓒ 박시몬
정 씨가 원단의 길이를 재기 위해 목에 두른 줄 자를 펼치고 있다. ⓒ 박시몬

결혼 후 26살이 되던 1963년에는 ‘출가 해녀’가 됐다. 제주를 떠나 육지의 바닷가에서 물질하는 해녀를 출가해녀라 불렀다. 당시 제주에는 마땅한 해산물 판로가 없어 다수의 해녀가 뭍으로 물질하러 나갔다. 정 씨도 고향을 떠나 포항 구룡포로 갔다. 처음에는 나무 판자집을 전전하다 나중에 셋방을 얻어 생활했다.

그는 ‘상군 해녀’였다. 해녀는 물질의 기량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구분한다. 호흡, 잠수, 수확 모두에서 뛰어났던 덕에 그는 타지 생활도 견뎌냈다. 당시 구룡포에서 천초(우뭇가사리)를 많이 채취해 108명의 해녀 가운데 5명 안에 들기도 했다. 3월부터 8월 사이 그는 물건(해산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구룡포를 비롯해 울산, 거제도, 통영, 몽돌개, 충남 외연도 등이 모두 그의 일터였다. 동해안은 물이 맑았고 물건이 많았지만, 전라도의 펄 물은 어두워 물질이 힘들었다.

정 씨는 원단을 가위질할 때 한 호흡으로 자른다. 짧게 끊어 자르면 구멍이 생겨 물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 박시몬
정 씨는 원단을 가위질할 때 한 호흡으로 자른다. 짧게 끊어 자르면 구멍이 생겨 물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 박시몬
정 씨가 해녀복의 팔을 만들기 위해 재단한 원단을 자신의 팔 위에 올려놓았다. ⓒ 박시몬
정 씨가 해녀복의 팔을 만들기 위해 재단한 원단을 자신의 팔 위에 올려놓았다. ⓒ 박시몬

정 씨가 물질하던 당시 해녀들은 무명천과 광목천으로 만든 ‘물옷’을 직접 지어 입었다. 상의는 물적삼, 하의는 물소중기라 불렀다. 정 씨도 시장 포목점에서 천을 구해 직접 물옷을 만들었다.

천으로 만든 물옷을 입고 추운 물속에 오래 있기는 어려웠다. 20분 물질을 하다가 볕으로 나와 마른 옷을 입고 몸을 말린 뒤, 다시 물에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물옷을 입고 머리에 물수건을 두르고, 쇠로 만든 물안경을 쓰고, 물건을 담는 테왁망사리와 채집 도구인 호미와 까꾸리를 들고 차가운 바다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일이 1960년대 제주 해녀의 일상이었다.

1991년 정 씨가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生野區) 나카가와(中川)에 있는 (주)야마모토화학공업을 방문해 일행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앞줄의 오른쪽에 앉아있는 이가 정 씨다. 정 씨는 이 공장의 고무로 해녀복을 만들어왔다. © 정부미자
1991년 정 씨가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生野區) 나카가와(中川)에 있는 (주)야마모토화학공업을 방문해 일행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앞줄의 오른쪽에 앉아있는 이가 정 씨다. 정 씨는 이 공장의 고무로 해녀복을 만들어왔다. © 정부미자
야마모토화학공업 사장이 1972년 포항 구룡포에서 고무 해녀복을 만들 때 사용한 본이다. 정 씨가 50년째 고무해녀복의 본을 뜨는 데 사용하고 있다. 본 위에 적힌 숫자는 치수를 나타내는 호수다. 크기별로 3호부터 6호까지 구분돼 있다. ⓒ 박시몬
야마모토화학공업 사장이 1972년 포항 구룡포에서 고무 해녀복을 만들 때 사용한 본이다. 정 씨가 50년째 고무해녀복의 본을 뜨는 데 사용하고 있다. 본 위에 적힌 숫자는 치수를 나타내는 호수다. 크기별로 3호부터 6호까지 구분돼 있다. ⓒ 박시몬

무명과 광목으로 지은 물옷으로 차가운 바다를 누비던 정 씨에게 고무 해녀복을 처음 소개해준 이는 작은아버지였다. 당시 일본 오사카시(大阪市) 나카가와(中川)에 살던 작은아버지는 고치현(高知縣)의 바다에서 우뭇가사리를 캐서 올리는 일을 돕고 있었다. 그는 바다에서 고무옷을 입고 작업하는 일본 해녀들을 보았다. 일본 사람들은 그 옷을 ‘스폰지 옷’이라고 불렀다. 어렵게 물질하며 사는 정 씨의 사정을 알았던 그는 정 씨에게 물었다.

“족은 년아. 일본서는 이 스폰지 옷 입어가 춥지도 안아고 물건들 막 많이들 잡고 하는디, 이디서도 니가 만들어 보라, 해질탸?” (막내야. 일본에서는 이 스펀지 옷을 입어서 춥지 않게 해산물을 많이 잡는데, 여기서도 네가 직접 만들어 봐, 할 수 있겠니?) 정 씨는 선뜻 나섰다. “고라만주면 내가 해쿠다.”(알려만 주시면 제가 할게요.)

정 씨는 1972년부터 지금까지 (주)야마모토화학공업의 고무로 해녀복을 만든다. 국내산 인공고무 가격의 2배이지만, 정 씨는 장기간 고무의 특성이 유지되는 일본산 원단을 사용한다. © 박시몬
정 씨는 1972년부터 지금까지 (주)야마모토화학공업의 고무로 해녀복을 만든다. 국내산 인공고무 가격의 2배이지만, 정 씨는 장기간 고무의 특성이 유지되는 일본산 원단을 사용한다. © 박시몬
원단의 안감은 네오프렌(neoprene)이라는 합성고무로, 천연고무보다 보온과 방수에 우수하다. 겉감에는 고무 재질을 덧입혔다. © 박시몬
원단의 안감은 네오프렌(neoprene)이라는 합성고무로, 천연고무보다 보온과 방수에 우수하다. 겉감에는 고무 재질을 덧입혔다. © 박시몬
원단을 오랜 시간 보관하면 변질될 수 있어 1년에 4차례에 나눠서 주문한다. 2012년부터는 해녀의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서 밝은 주황색 원단도 함께 주문한다. © 박시몬
원단을 오랜 시간 보관하면 변질될 수 있어 1년에 4차례에 나눠서 주문한다. 2012년부터는 해녀의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서 밝은 주황색 원단도 함께 주문한다. © 박시몬

1974년 그의 작은아버지가 (주)야마모토화학공업의 사장 야마모토 케이이치(山本敬一)와 함께 구룡포로 그를 찾아왔다. 야마모토 케이이치 사장은 과학자였다. 그는 세계에서 최초로 합성고무를 원료로 지우개를 만들었다. 이후에도 합성고무로 여러 제품을 만들었는데, 해녀복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해녀복의 원단은 네오프렌(neoprene)이라는 합성고무였다. 합성고무로 만든 해녀복은 보온력이 뛰어났다. 독성이 강한 생물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도 있었다. 야마모토 사장은 정 씨에게 직접 고무 해녀복 제작과정을 보여주었다. 고무 해녀복 제작에 필요한 뼈대인 ‘본’도 만들어 주고 갔다.

정 씨는 제주도의 해녀는 물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해녀의 해녀복을 만들어왔다. 과거에 비하면 많이 줄었지만, 지금도 육지 고객이 40여 명에 이른다. 지역별, 연도별로 고객 장부를 만들어 해녀들의 치수를 적어뒀다. © 박시몬
정 씨는 제주도의 해녀는 물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해녀의 해녀복을 만들어왔다. 과거에 비하면 많이 줄었지만, 지금도 육지 고객이 40여 명에 이른다. 지역별, 연도별로 고객 장부를 만들어 해녀들의 치수를 적어뒀다. © 박시몬
처음 해녀복을 만들 때 해녀는 키, 가슴둘레, 팔길이 등 몸의 14~20곳 가깝게 치수를 잰다. 바닷속에서 작업하기 편한 해녀복을 만들기 위해서는 옷의 미세한 차이도 유심히 살펴야 한다. ⓒ 박시몬
처음 해녀복을 만들 때 해녀는 키, 가슴둘레, 팔길이 등 몸의 14~20곳 가깝게 치수를 잰다. 바닷속에서 작업하기 편한 해녀복을 만들기 위해서는 옷의 미세한 차이도 유심히 살펴야 한다. ⓒ 박시몬

34살의 정 씨가 1971년에 시작한 사업은 처음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 사업 시작 얼마 후 강원도 해녀들이 해녀복 40벌을 주문했다. 그런데 얼마 사용하지 않아 해녀복을 접착한 부분이 떼어졌다. 그는 연탄불에 해녀복을 녹여 떼어진 부분을 다시 붙였지만, 같은 일이 반복됐다. 접착원료에 특수 용액을 섞어야 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고무옷을 입으면 자궁이 좁아져 아기를 못 낳는다” “암에 걸린다” 등의 소문도 그를 힘들게 했다. 그럼에도 그는 낮에는 물질하고 밤에는 고무 해녀복을 만들며 악착같이 살았다. 1978년 그는 많은 해녀가 활동하던 제주도 구좌읍 세화리에 정식으로 가게를 열었다. ‘삼원상사’였다.

그가 만든 고무 해녀복은 해녀의 물질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고무 해녀복은 보온성이 뛰어났고 해녀의 몸을 보호해 주었다. 장시간 물질할 수 있게 되면서 어획량이 증가했다. 이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해녀의 경제력에도 도움이 됐다. 반면, 장시간 물속에 머물면서 잠수병, 두통 등이 발생해 약을 복용하는 일도 늘었다.

6월 22일 오전 9시, 제주시 하도리 서문동 해녀들이 물이 적게 들어오고 적게 빠지는 조금에 맞춰 바다에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다. 이들이 입고 있는 해녀복 모두 정 씨의 손에서 나왔다. ⓒ 박시몬
6월 22일 오전 9시, 제주시 하도리 서문동 해녀들이 물이 적게 들어오고 적게 빠지는 조금에 맞춰 바다에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다. 이들이 입고 있는 해녀복 모두 정 씨의 손에서 나왔다. ⓒ 박시몬
하도리 서문동에 사는 상군 해녀 임군자(79) 씨는 정 씨가 고무잠수복을 만들기 시작한 때부터 그가 만든 해녀복을 입었다. 정 씨가 만든 해녀복은 언제 입어도 튼튼하고 자신의 몸에 딱 맞게 만들어져 물속에서 편하게 물질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 박시몬
하도리 서문동에 사는 상군 해녀 임군자(79) 씨는 정 씨가 고무잠수복을 만들기 시작한 때부터 그가 만든 해녀복을 입었다. 정 씨가 만든 해녀복은 언제 입어도 튼튼하고 자신의 몸에 딱 맞게 만들어져 물속에서 편하게 물질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 박시몬

고무 해녀복이 널리 보급된 현재, 해녀는 고무 해녀복, 고무로 만든 수경, 고무로 생기는 부력으로 인해 사용하는 연철, 오리발, 테왁 등을 갖춘 채로 물질을 나간다. 2012년부터는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눈에 잘 띄는 밝은 주황 색상 잠수복 상의가 보급되고 있다.

2017년 제주해녀의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뒤부터 제주도는 1년에 1벌의 해녀복을 해녀에게 지원한다. 그전에는 가격 부담 때문에 3년에 한 벌 정도 사 입었던 제주 해녀들은 이제 해녀복을 매년 정 씨에게 주문한다.

해녀복은 치수나 색깔 외에도 고무 두께에 따라 구분된다. 제주 해녀들은 한 해에는 3mm, 그 다음해에는 4~5mm 두께의 해녀복을 번갈아 주문하여, 얇은 해녀복과 두꺼운 해녀복을 두루 갖춘다. ⓒ 박시몬
해녀복은 치수나 색깔 외에도 고무 두께에 따라 구분된다. 제주 해녀들은 한 해에는 3mm, 그 다음해에는 4~5mm 두께의 해녀복을 번갈아 주문하여, 얇은 해녀복과 두꺼운 해녀복을 두루 갖춘다. ⓒ 박시몬

해녀들은 격년 단위로 9월~12월 사이에 3mm 또는 5mm 두께의 해녀복을 번갈아 주문한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온도 상승도 해녀복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예전에는 여름에도 4mm 해녀복을 입었지만 요즘엔 3mm를 입는 경우가 늘었다. 깊은 바다에 들어가는 다이버의 잠수복은 해녀복보다 원단이 두껍다.

해녀들의 주문에 맞춰 정 씨의 1년이 흐른다. 9월부터 1월까지 해녀복을 만든다. 3월에서 8월까지 해녀복을 수선한다. 일감은 나날이 줄고 있다. 1970년대 1만4천여 명이던 제주 해녀가 2021년 현재 3437명으로 줄었다. 그 가운데 60세 이상이 3136명이다. 1년에 1천 벌 이상 만들었던 정 씨는 이제 700벌 정도만 만든다. 6곳이던 제주의 해녀복 가게 가운데 한 곳도 얼마 전에 문을 닫았다.

정 씨는 이제 다리가 아파서 오래 서 있을 수 없다. 그가 재단을 마치면 막내아들 김성삼(51) 씨가 풀을 붙여 해녀복을 마저 만든다. 김 씨는 어머니를 도와 1995년부터 가업을 잇고 있다. ⓒ 박시몬
정 씨는 이제 다리가 아파서 오래 서 있을 수 없다. 그가 재단을 마치면 막내아들 김성삼(51) 씨가 풀을 붙여 해녀복을 마저 만든다. 김 씨는 어머니를 도와 1995년부터 가업을 잇고 있다. ⓒ 박시몬
풀은 접착원료인 ‘록타이드’(본드) 한 종지에 접착액 ‘디알’을 5방울 섞어 만든다. ‘디알’을 넣지 않으면 접착된 부분이 떼어져 버린다. 길이 33cm의 붓으로 풀칠을 할 때는 원단을 누르는 납추를 사용해 고정한다. ⓒ 박시몬
풀은 접착원료인 ‘록타이드’(본드) 한 종지에 접착액 ‘디알’을 5방울 섞어 만든다. ‘디알’을 넣지 않으면 접착된 부분이 떼어져 버린다. 길이 33cm의 붓으로 풀칠을 할 때는 원단을 누르는 납추를 사용해 고정한다. ⓒ 박시몬
정 씨의 막내아들 김성삼(51) 씨가 접착면에 풀을 붙이고 있다. ⓒ 박시몬
정 씨의 막내아들 김성삼(51) 씨가 접착면에 풀을 붙이고 있다. ⓒ 박시몬
김 씨가 풀칠 후 2~3분이 지나 해녀복 상의를 붙이고 있다. 풀이 충분히 스며들어 마른 후에 원단을 붙여야 떼어지지 않는다. ⓒ 박시몬
김 씨가 풀칠 후 2~3분이 지나 해녀복 상의를 붙이고 있다. 풀이 충분히 스며들어 마른 후에 원단을 붙여야 떼어지지 않는다. ⓒ 박시몬

그는 밤낮 쉬지 않고 해녀복을 만들어 6남매를 키웠다. 우도, 서귀포까지 다니며 직접 해녀들의 치수를 재고 옷을 배달했다. 그는 당시 완행버스의 노선을 지금도 일일이 꿰고 있다. 심지어 육지에 있는 완도, 청산도, 여수, 거제까지 치수를 재러 가기도 했다. 억척스럽게 살았던 그는 3번의 이사 끝에 1988년 2월 6일 지금의 자리에 ‘세화 해녀 잠수복’ 가게를 열었다.

1988년 2월 6일, 정 씨는 3차례 이사 끝에 구좌읍 세화리 1366-1번지에 해녀복을 만드는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정식 상호는 ‘삼원상사’지만, 누구나 알기 쉽게 ‘세화 해녀 잠수복’으로 간판을 달았다. ⓒ 박시몬
1988년 2월 6일, 정 씨는 3차례 이사 끝에 구좌읍 세화리 1366-1번지에 해녀복을 만드는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정식 상호는 ‘삼원상사’지만, 누구나 알기 쉽게 ‘세화 해녀 잠수복’으로 간판을 달았다. ⓒ 박시몬
정 씨가 완성된 해녀복의 팔을 힘껏 펼치고 있다. ⓒ 박시몬
정 씨가 완성된 해녀복의 팔을 힘껏 펼치고 있다. ⓒ 박시몬

해녀였던 그는 해녀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오랜 시간 해녀들과 소통하며 신뢰를 쌓았다. 그의 옷을 한 번 입어본 해녀들은 이후로도 줄곧 그가 만든 해녀복만 입는다. 그와 해녀와의 친밀한 관계는 제주 해녀 사회를 지탱하는 구심점이 됐다.

50년간 고무 해녀복을 만들어온 정 씨는 오른쪽 팔, 어깨, 다리에 많은 통증이 있다. 매주 1회 이상 팔, 다리에 주사를 맞으며 생활하고 있다. ⓒ 박시몬
50년간 고무 해녀복을 만들어온 정 씨는 오른쪽 팔, 어깨, 다리에 많은 통증이 있다. 매주 1회 이상 팔, 다리에 주사를 맞으며 생활하고 있다. ⓒ 박시몬
정 씨의 손에는 오랜 물질과 가위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 박시몬
정 씨의 손에는 오랜 물질과 가위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 박시몬

2012년 정 씨는 그가 만든 고무 해녀복을 배달해온 남편을 먼저 보냈고, 2013년에는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오랜 시간 서 있기 어려워진 정 씨는 이제 고무 원단을 재단하는 일만 한다. 그 곁에서 막내아들 김성삼 씨(51)가 원단을 풀로 붙여 마무리한다. 김 씨는 고등학생 때부터 정 씨를 도우며 해녀복 제작을 배웠다. 군 제대 후인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정 씨의 옆에서 고무 해녀복을 만들어왔다. 가위질과 풀을 붙이는 것까지 하나하나 정 씨가 손수 가르쳤다. 그 덕에 김 씨는 국내에서 가장 오랫동안 해녀복을 만들어온 정 씨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다. “어머니는 정말 밤낮 쉬지 않았어요. 독하게 일하며 살았어요.”

요즘 정 씨의 즐거움은 몇 남지 않은 또래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정 씨는 친구들과 이런 농담을 주고받는다. “윤석열이 대통령 졸업하기 전에 우리도 하나, 둘 (이 세상을) 졸업할 거라.” 그래도 정씨는 해녀복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해녀복을 더욱 열심히 만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잠수복 언니’ 정 씨는 오늘도 고무와 풀 냄새 그윽한 작업실에서 제주 해녀의 생명을 깁는다.

정화자 장인이 해녀복을 재단하는 작업대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 박시몬
정화자 장인이 해녀복을 재단하는 작업대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 박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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