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대학교 새내기 장옥순 할머니의 현대사

충청북도 제천시에는 51번 버스가 다닌다. 51번 버스는 시내와 대원대학교를 연결한다. 오전 7시 30분 시내에 있는 주유소 앞 정류장에서 한 할머니가 버스에 올랐다. 새하얀 곱슬머리의 할머니는 책가방을 메고 있다. 할머니 이름은 장옥순. 그는 지난 3월 대원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22학번 새내기인 장 씨의 나이는 86세다.

오전 7시 30분 장옥순 씨는 51번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간다. ⓒ 서현재
오전 7시 30분 장옥순 씨는 51번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간다. ⓒ 서현재

버스는 대원대학교 정문에서 멈춘다. 정문에서 강의실까지 거리는 약 300m다. 왼쪽 무릎과 허리가 아픈 86세 새내기에게는 먼 길이다. “(강의실에)오다가 앉았다, 오다가 앉았다, 한 2m도 못 걸어요.” 다른 학생들이 5분 만에 가는 길을 장 씨는 15분 넘게 걷는다. 그래도 장 씨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매일 오전 7시 30분마다 51번 버스에 올라 같은 길을 걸어 등교한다.

51번 버스는 대원대학교 정문에서 멈춘다. 장옥순 씨는 정문부터 강의실까지 걷는다. 무릎과 허리가 좋지 않아 수시로 앉아서 쉰다. ⓒ 서현재
51번 버스는 대원대학교 정문에서 멈춘다. 장옥순 씨는 정문부터 강의실까지 걷는다. 무릎과 허리가 좋지 않아 수시로 앉아서 쉰다. ⓒ 서현재

장옥순의 굴곡진 한국현대사

오전 9시, 1교시가 시작된다. 장옥순 씨에게 수업을 따라가는 일은 쉽지 않다. 나이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 청력이 떨어졌다. 보청기를 착용하지만, 교수의 목소리를 놓칠 때가 많다. 20대인 입학 동기들의 도움을 받아야 수업 내용을 겨우 따라잡을 수 있다. 그 내용을 기억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지만, 그래도 재밌다. "교수님 말씀하시는 게 머리에 입력은 안 되지만 재미가 있어요. 공부하는 게 그렇게 재미가 있을 수가 없어."

장옥순 씨는 매번 강의실 맨 앞자리에서 수업을 듣는다. 다른 행동은 하지 않고 수업에만 집중한다. ⓒ 서현재
장옥순 씨는 매번 강의실 맨 앞자리에서 수업을 듣는다. 다른 행동은 하지 않고 수업에만 집중한다. ⓒ 서현재

장 씨는 일제강점기였던 1938년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났다. 6살 무렵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일제는 한국인을 포섭할 의도로 근대 교육을 확대하고 있었다. 여성에 대한 교육 기회도 덩달아 늘어났다. 다만 일제가 가르친 것은 한글이 아닌 히라가나였다. 해방 직후에야 한글을 배웠다. 그 이상의 교육은 받지 못했다. 띄엄띄엄 다녔던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한국전쟁이 터졌다. 장 씨는 가족과 함께 피난을 가야 했다. 이후 70여 년 동안 학교에 가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뒤 아버지가 병에 걸렸다. “돌아가실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제천에 방 한 칸 얻었다며 이사를 가자더라고.” 병을 이겨낸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일곱 식구를 데리고 먼 친척이 있는 제천으로 갔다. 집안은 가난해졌다. 방 한 칸에서 일곱 식구가 살았다. 다섯 자매 중 둘째였던 장 씨는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채소 장사를 시작했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장 씨는 중학교 대신 양재학원에 들어갔다. 양재학원이 전국 곳곳에 생겨나던 시절이었다. 김미선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연구원 연구원은 연구논문 <양장점을 통해 본 전후 1950년대 여성 자영업주의 탄생>에서 1950년대 이후 60년대까지 옷 만드는 양재기술을 배울 것을 국가가 여성에게 장려했다고 설명했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장 씨는 양재학원에서 옷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미련은 가시지 않았다. “또래들이 중학교 교복 입고 다니는 거 보면 부러웠죠. 지금도 그래.”

돌봄 노동 60년

늦깎이 대학생 장옥순 씨가 20대의 동기들보다 잘하는 것이 있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다. “(사회복지학과에서 배우는)돌보는 거 내가 옛날부터 계속했던 거지. 그건 익숙해요.” 대학 입학 동기들은 돌봄을 책으로 배우지만, 장 씨는 평생 가족을 돌보며 살았다. 장 씨는 스무 살 때 양장점을 차렸다. 목돈이 없어도 기술만 있으면 가게를 차릴 수 있던 시절이었다. 원단값을 외상으로 치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양장점에서 번 돈으로 동생들을 학교에 보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람 부리는 게 제일 어려웠어.” 양장점을 운영하려면 직원을 고용해야 했다. 이들의 식사도 도맡았다. 동시에 집안일도 했다. 스무 살 여성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삶이었다.

몇 년 뒤, 양장점을 접고 포목점을 차렸다. 옷감만 팔면 되는 포목점은 혼자 운영할 수 있었다. 마음이 편해지고 일도 수월해졌다. 마침 옷감 장사가 잘되던 시기였다. 1960년대부터 산업화가 시작됐다. 경공업이 성장했다. 덩달아 옷감도 잘 팔렸다. 집안 형편도 나아졌다.

장옥순 씨는 1963년 봄에 남편을 만났다. 결혼한 지 30여 년이 지났을 때 남편은 당뇨병을 앓았다. 2000년 무렵 병이 악화된 남편과 사별했다. ⓒ 서현재
장옥순 씨는 1963년 봄에 남편을 만났다. 결혼한 지 30여 년이 지났을 때 남편은 당뇨병을 앓았다. 2000년 무렵 병이 악화된 남편과 사별했다. ⓒ 서현재

25살 때 친하게 지내던 옆 포목점 주인이 중매를 봤다. 강원도 정선 남자였다. 그와 봄에 만나서 가을에 결혼했다. “거리가 머니까 뭐 그냥 몇 번 만났지. 옛날에는 그랬잖아요.” 결혼한 뒤에도 장 씨는 포목점을 운영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낳아 길렀다. 두 아들을 대학까지 보냈다.

두 아들을 다 키웠을 무렵 친정어머니가 치매에 걸렸다. 1990년대 한국에는 치매 환자를 받아주는 요양원이 드물었다. 환자를 돌보는 일은 온전히 가족의 몫이었다. 남편도 아프기 시작했다. 당뇨였다. 당시에는 인슐린 치료제가 귀했다. 제천에는 이를 제공할 병원이 없었다. 친정어머니와 남편을 돌보는 삶은 고되었다. 이 무렵부터 큰며느리가 장 씨와 함께 포목점을 운영했다.

장 씨가 정성으로 보살폈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2년 사이 남편도 병을 이기지 못하고 떠났다. “이때가 참 힘들었어.” 장 씨에게는 환자를 돌보는 고충보다 가족을 떠나보낸 슬픔이 더 컸다. 포목점도 더 이상 돌보기 어려웠다. 2008년 즈음 큰며느리에게 물려줬다. 할 일이 없어졌다. 일이 없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장 씨는 밭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나를 위한 공부

오전 수업이 끝나는 11시 30분이면 조금 이른 점심을 먹는다. 장옥순 씨는 집에서 싸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는다. 학교 식당이 있지만,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 아픈 무릎으로 그곳을 오가는 대신, 장 씨는 교양관 409호 강의실에서 도시락을 먹는다. “뭐, 그냥 집에서 먹던 것들 싸 오지.” 집에서 먹던 반찬을 강의실에서 혼자 먹는다. 아주 가끔 20대 동기와 반찬을 나눠 먹기도 한다. 60여 년 동안 누군가의 밥을 했던 장 씨는 이제 자신을 위해 도시락을 만든다.

그동안 시대가 변했다. 기대 수명이 늘어나는 것에 맞춰 평생교육 체계가 만들어졌다. 1980년 개정된 헌법 제29조는 국가의 평생교육 진흥 의무를 명시했다. 1982년 ‘사회교육법’이 제정됐다. 1999년에는 ‘평생교육법’으로 이름을 바꿨다. 정부는 2002년 ‘평생교육진흥기본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에 따라 평생교육원 설립, 학점은행제 도입 등 평생교육을 위한 체계가 만들어졌다.

장옥순 씨는 검정고시를 보기 위해 집 안에 공부방을 만들었다. 대학에 다니는 지금도 학교가 끝난 뒤 공부방에서 배운 내용을 복습한다. ⓒ 서현재
장옥순 씨는 검정고시를 보기 위해 집 안에 공부방을 만들었다. 대학에 다니는 지금도 학교가 끝난 뒤 공부방에서 배운 내용을 복습한다. ⓒ 서현재

2016년 기회가 왔다. 제천시 노인종합교육복지관에 검정고시반이 생겼다. 장 씨는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농사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반에 등록했다. 오전 9시에 일어나 오후 11시까지 공부했다. 2017년 중학교 졸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장 씨는 멈추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에 도전했다. 그러나 여든이 넘은 나이에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자꾸 잊어먹는다”고 장 씨는 기자에게 말했다. 몸도 아팠다. 오랫동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던 탓인지 허리 통증이 생겼다. 시험에도 번번이 떨어졌다.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하려면 평균 60점 이상을 받아야 했다. 평균 0.15점이 부족해 낙방한 적도 있었다. 고졸 검정고시에 도전한 지 5년 만인 지난해에야 합격했다. 말 그대로 4전5기였다.

더 큰 욕심이 생겼다. 대학에 가고 싶었다. 큰아들의 차를 얻어 타고 제천에 있는 세명대학교와 대원대학교를 답사했다. ‘나이도 있고, 몸도 성치 않은데 집에서 쉬시라’고 가족들은 장 씨를 말렸다. 장 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이를 더 먹기 전에 대학 졸업장을 받으려면, 4년제인 세명대보다 2년제인 대원대가 낫다고 생각했다. 장 씨는 대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수시 1차 전형에 지원했다. 누구한테도 미리 말하지 않았다. 원서 접수하던 날, 가족들에게 통보했다. 가족들도 더 만류하지 못했다.

한국 대학의 높은 문턱

대원대학교는 수시 1차 전형에서 학생부와 수능 점수, 면접점수를 종합해서 평가한다. 검정고시 출신 지원자는 검정고시 점수와 면접점수를 종합한다. 장 씨는 교수 두 명 앞에서 면접을 봤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장 씨는 자식뻘 되는 교수 앞에서 목소리를 떨었다. 보청기를 착용했지만, 그날따라 교수들의 질문이 더 안 들렸다. 3대1 정도 되는 경쟁률을 뚫지 못했다. 수시 1차 전형에서 탈락했고, 예비번호를 받았다.

당시 장 씨를 면접했던 윤경원 대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원래 검정고시 출신이 불리하다고 설명했다. 고등학교 졸업자에 대해선 학생부까지 종합해 판단하지만, 검정고시 출신에 대해선 계량화된 시험성적만 고려하게 된다. “장옥순 할머니는 면접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검정고시 점수 때문에 예비번호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윤 교수는 말했다.

이 사례는 한국 평생교육 체계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평생 공부하려는 노령층을 위한 제도적 고려가 부족한 것이다. 황영희 사회복지학 박사는 연구논문 <고령사회에 대비한 대학개방을 통한 노인교육 연구>에서 평생교육이 발달한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의 사례를 소개했다. 1968년 프랑스는 지역사회에 더 많은 교육기회를 대학이 제공해야 한다는 취지의 ‘들로르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 따라 평생교육 전문대학인 ‘UTA(The University of the Third Age)’가 설립됐고, 이 대학에선 주로 지역에 거주하는 노인을 위한 강좌를 개설했다. 학비가 저렴한 것은 물론, 연령 제한도 없다. 수강을 원하는 이들은 정규학생과정과 청강생과정 가운데 하나를 골라 편리하게 참여할 수 있다. 또한 영국의 평생교육기관에서는 대학 수준의 인문, 사회, 과학 관련 강좌를 제공한다.

‘디지털 이방인’을 위한 도움 필요

장옥순 씨는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한다. 컴퓨터를 다뤄야 하는 수업 시간에는 컴퓨터를 잘하는 동기의 도움을 받는다. ⓒ 서현재
장옥순 씨는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한다. 컴퓨터를 다뤄야 하는 수업 시간에는 컴퓨터를 잘하는 동기의 도움을 받는다. ⓒ 서현재

평생 교육의 또 다른 걸림돌은 디지털이다. 매일 수업을 들으러 대원대학교에 오는 장옥순 씨에게 가장 힘든 날은 목요일이다. 매주 목요일 오후 2시 ‘정보능력’ 강의를 듣는다. 이 수업이 가장 어렵다. 컴퓨터를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굳은 손가락으로 타자하기 어려웠다. 한글 파일을 저장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엑셀 프로그램은 생소했다. 두 시간 수업 내내 컴퓨터를 잘 다루는 동기가 옆에서 도와준다.

다른 교수와 동기들도 장 씨를 돕는다. 원래 수업자료는 대학교의 학습관리시스템(LMS)에 게시된다. 컴퓨터에 익숙하지 못한 장 씨는 수업 자료를 준비하는 것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교수들은 장 씨를 위해 수업 자료를 따로 준비해 줬다. 어느 2학년 선배는 집까지 찾아와 수업 내용을 타자로 옮겨줬다.

공부하려는 한국의 노인이 주변의 호의에 의존하는 반면, 선진국에서는 공부를 돕는 체계를 제공한다. 황영희 사회복지학 박사는 연구논문 <고령사회에 대비한 대학개방을 통한 노인교육 연구>에서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이 노인의 평생 교육을 돕는 방법을 소개했다. 노인들이 학업의 고충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강좌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부가적인 세미나도 열고 있다. 노인들의 눈높이에 맞춘 학습동아리를 만들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어려워도 즐거운 학교생활

오후 3시 30분, 하루의 수업이 모두 끝났다. 장옥순 씨는 다시 51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간다. 가끔 큰아들이 데리러 올 때도 있다. 이때는 아들이 올 때까지 409호 강의실에서 배운 내용을 복습한다. 집에 도착하면 집안일을 한다. 예전에 비하면 할 일이 많이 줄었다. 돌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집안일을 마치면 공부방으로 들어간다. 보통 오후 10시까지 공부한다.

지난 7월 14일, 장옥순 씨의 대학 첫 학기가 끝났다. 매일 열심히 공부했지만,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잘 본 것 같지는 않다고 장 씨는 기자에게 말했다. 배운 것을 금방 잊는 기억력과 타자하기 어려운 굳은 손 때문이라고 장 씨는 생각한다. 그래도 1학기 내내 자신을 도와준 교수들과 동기들이 참 고맙다. 교수들은 요점정리를 뽑아서 장 씨에게 줬다. 동기들은 장 씨의 질문할 때마다 성의 있게 알려줬다.

종강 후 자택에서 만난 장옥순 씨는 학교에 다니는 것이 즐거웠다고 돌아봤다. 장 씨는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 고만균
종강 후 자택에서 만난 장옥순 씨는 학교에 다니는 것이 즐거웠다고 돌아봤다. 장 씨는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 고만균

1학기 내내 응원도 받았다. 교회의 또래 친구들은 자신들이 못하는 일을 해냈다고 장 씨를 자랑스러워했다. 장 씨의 사연을 접한 어느 초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장 씨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선물했다. 21학번인 손자도 할머니를 자랑스러워한다. “공부하는 게 즐거우니까 얼마나 좋아요.” 대학 생활에 적응하기 쉽지는 않았지만, 여러 사람의 도움과 응원에 힘입어 꼭 졸업장을 받겠다고 장 씨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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