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아래, 오문영 ③ 우리의 자립생활

<지난 이야기>

1962년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난 오문영은 세 살 때 소아마비를 앓은 뒤 20여년 동안 외출하지 못했다. 선교회 교인들의 도움을 받아 첫 외출을 하게 된 그는 집을 떠나 세상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을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알게 된 전주의 한 시설에서 다른 장애인들과 어울려 살면서 도장 새기는 기술을 배웠다. 그러다 전주에서 만난 친구의 제안으로 서울 상경을 결정하게 된다. 수동휠체어 한 대, 보따리 하나만 들고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오문영 센터장이 인터뷰하면서 환하게 웃고 있다. ⓒ 박시몬
오문영 센터장이 인터뷰하면서 환하게 웃고 있다. ⓒ 박시몬

# 6PM: 서울 구파발 장애인 교회와 도장가게 예랑사

저녁 6시, 오문영 햇살아래 장애인자립생활센터(이하 햇살아래) 센터장은 다른 장애인 자립센터 동료들과 오랜만에 만나 함께 식사했다. 삼계탕을 먹었다. 배변을 걱정하여 어릴 적부터 적게 먹었던 오 센터장은 이날도 닭 반 마리만 주문했다. “올해가 15주년이지?” 동료가 오 센터장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 15주년 창립 기념식도 조만간 해.” 동료는 다시 물었다. “20주년 기념식도 아니고 15주년 기념식을 왜 해?” 오 센터장은 웃으며 말했다. “아이 왜, 좋잖아.”

그는 기념식을 좋아한다. 좋은 날을 기념하는 것이 즐겁다. 오 센터장은 자신의 ‘서울 상경 10주년’ 잔치도 열었다. 1992년 8월 18일, 그는 30년 동안 살던 전북 남원의 고향집을 떠나 서울로 상경했다. 방 안에서만 지냈던 그가 자립의 첫 발을 내딛은 그 날이 오 센터장에겐 생일보다 특별하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2년 8월 18일, 그는 주변 사람들을 불러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눴다. 올해 8월이면 ‘서울 상경 30주년’이다. 다시 한번 잔치를 열까 생각하고 있다.

지난 5월 3일 서대문 햇살아래 장애인 자립센터 15주년 기념식이 진행됐다. ⓒ 오문영
지난 5월 3일 서대문 햇살아래 장애인 자립센터 15주년 기념식이 진행됐다. ⓒ 오문영

- 8월 18일을 매년 챙기나요.

“1992년 8월 18일. 이날 나는 새로 태어났어요. 매년 8월 18일이면 그날을 기념해서 보내요. 올해 벌써 딱 30주년인데, 오죽하면 10주년일 때에는 주변 친구나 지인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열 정도였어요.”

고향 집을 떠나 ‘새로 태어난 날’ 이후, 오 센터장은 서울 구파발의 한 교회에서 만든 장애인 시설에 입소했다. 장애인 목사가 만든 장애인을 위한 교회였다. 교인 40~50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장애인이었다. 교회에서 만든 장애인 시설에는 4~5명이 함께 살았다. 교회로부터 한 골목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장애인이 이용하기 편하도록 화장실을 개조한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집이었다. 방은 세 개였다. 2006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곳을 ‘성민 재활원’이라고 불렀다.

- 서울 생활에 적응하기 어렵진 않았나요.

“만약 적응하지 못한다면 9월 추석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작정이었어요. 그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잘 지냈죠. 무엇보다 나는 30년간 외로움과 고독에 사무쳐 있었잖아요. 갈망했던 생활이었기 때문에 쉽게 적응했죠. 다시 시골로 내려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어요. 시골집은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재밌게 지냈어요.”

오 센터장은 그곳에서 다양한 업무를 맡았다. 남성 전도회 모임의 회장도 맡았다. 회비를 걷거나 행사를 진행하고, 사람들을 통솔하는 역할을 했다. 서울 전역에 있는 장애인을 집결시키는 계획을 짜거나 회계 업무도 맡았다. 3년간 교회에서 나름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다들 나를 좋아했어요. 말하자면 시골에서 ‘똘똘한 장애인’이 올라온 것이지.”

오문영 센터장은 서울 상경 이후 도장가게 예랑사를 운영했다. ⓒ 오문영
오문영 센터장은 서울 상경 이후 도장가게 예랑사를 운영했다. ⓒ 오문영

서울 상경 2년 뒤인 1994년, 오 센터장은 본격적인 ‘경제 활동’도 시작했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 언덕이 되어주겠다. 기술을 갖고 자립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가게를 내주겠다”며 교회 목사가 5평 남짓한 작은 공간을 마련해줬다. 오 센터장은 재활원에서 함께 지내던 친구와 동업하여 도장 가게를 열었다. 이름은 ‘예랑사’라 지었다. 고향 남원의 부모님이 비용도 보태주었다. 오 센터장은 도장을 새기고, 친구는 복사와 편집을 맡았다.

동업자는 2~3년 뒤 비장애인 여성을 만나 결혼했다. 이후 오 센터장은 혼자 가게를 꾸렸다. 친구와 동업한 기간을 포함해 약 12년 동안 도장 가게를 운영했다. “많이 벌지는 못했지만 용돈 벌이 정도는 할 수 있었다”고 오 센터장은 그 시절을 돌아봤다. 가게 월세 30만 원에 관리비까지 낼 수 있는 돈을 벌었다. 당시 오 센터장은 기초생활 수급자였다. 생활비는 그 돈으로 해결했다.

# 7PM: 장애인 콜택시

오문영 센터장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장애인 콜택시에 타고 있다. ⓒ 신유미
오문영 센터장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장애인 콜택시에 타고 있다. ⓒ 신유미

오 센터장은 식사 중에도 계속 시간을 확인했다. 장애인 콜택시를 언제 불러야 할지 고민했다. 식사를 마칠 즈음 전화했다. “여기 강서구 가양동이고요. 집으로 갈 거예요.” 장애인콜택시 앱에는 오 센터장의 연락처와 집 주소가 등록돼있다. 대기인원도 알려준다. 2022년 현재, 서울시가 운영하는 장애인 콜택시 차량은 모두 631대다. 5km까지 기본요금 1500원, 10km까지 2900원이 발생한다. 10km가 초과되면 km당 추가 요금 70원이 붙는다. 이날 강서구 가양동에서 오 센터장의 집 홍제동까지는 3400원 정도의 요금이 나왔다.

오 센터장은 장애인 콜택시를 기다리며 건물 복도에 앉아 잠시 쉬었다. “다리 좀 테이블 위에 올려줄래요? 미안해요.” 오 센터장이 짧은 다리를 뻗어 테이블 위에 뒀다. 종일 휠체어를 타면 피가 안 통한다는 것이다. 그는 보기 흉하지 않냐며 멋쩍어했다. 오 센터장은 서울에 상경하고도 오랜 기간 신발을 신지 않았다. 5년 쯤 지난 어느 날 장애인 구두점에서 구두를 맞췄다. 모양새가 썩 괜찮았다. 이후로는 늘 신발을 신는다. 그 신발은 아직 땅을 밟아본 적이 없다. 땅을 디딜 일 없는 밤색의 구두는 항상 새 것이다.

호출 30분 뒤에 장애인 콜택시가 도착했다. 운전기사가 내려와 오 센터장을 태우고 출발했다. 여러 번 갈아타야 하고, 엘리베이터를 찾아다녀야 하는 지하철과 달리 콜택시는 편하다. 부르기만 하면 제 자리에서 목적지까지 데려다준다. 그래도 자주 이용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장애인 콜택시를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짐작하기 어렵다. 바로 잡힐 때도 있지만, 대부분 30분 정도 기다린다.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약속시간을 맞춰야 하는 경우에는 지하철을 이용한다.

# 8 PM: 은평구 뉴타운 개발로 흩어진 자립공동체

오문영 센터장의 집에서 활동지원사가 가사 지원을 하고 있다. ⓒ 신유미
오문영 센터장의 집에서 활동지원사가 가사 지원을 하고 있다. ⓒ 신유미

집에 도착한 오 센터장은 이날 처음으로 휠체어에서 내렸다. 신발을 벗어 휠체어 발판에 뒀다. 마루 한편에 놓인 리프트를 이용해 바닥으로 내려왔다. 집에는 활동 지원사가 와 있었다. 활동 지원사는 청소와 빨래 등 집안일을 해주고 저녁 식사도 준비한다.

활동 지원사가 일을 마치고 집을 나선 뒤, 오 센터장은 옷을 갈아입었다. 바닥을 기어 경사로를 설치한 화장실에 갔다. 바닥에 설치한 수도꼭지로 얼굴을 씻었다. 밖에서 저녁을 먹지 않는 날이면, 활동 지원사가 준비해두고 간 밥을 차려 먹는다. 안방의 작은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좌식 책상에 펼쳐놓고 먹는다. 자립생활 초창기에 먹던 식사와 비교하면 진수성찬이라고 오 센터장은 생각한다.

- 교회가 마련한 장애인 시설을 언제 떠났나요.

“2000년 즈음이었죠. 목사님이 돌아가시면서 교회에 여러 가지 운영상의 문제가 생겼어요. 우리가 살던 재활원도 닫았어요. 살 곳이 없어진 거죠. 그래서 함께 살던 장애인 서너 명과 의기투합해서 일종의 공동체를 꾸렸어요. 원래 살던 집 월세를 우리 돈으로 냈어요. 나보다 나이 많은 장애인 여성도 있었는데, 그분들이 식사를 겨우겨우 만들어서 같이 먹었어요. 식사 문제가 힘들었어요. 지금이야 활동 지원사가 있지만.”

- 생계는 어떻게 해결했나요.

“그때 우리는 기초생활 수급자였어요. 그 돈으로 한 달에 일정 금액을 각출해서 생활비로 썼어요. 그렇게 공동체 생활을 했어요. 어쨌건 시골로 다시 안 돌아가고 같이 어울려 사니까 좋았어요. 서로 의지가 되기도 했죠. 지나고 보면 그때가 다 추억이지.”

그렇게 자립공동체를 꾸린 6년 만인 2006년 6월, 서울 은평구 뉴타운 개발이 시작됐다. “한마디로 쫓겨나게 된 것”이라고 오 센터장은 말했다. 도장 가게 근처 상인들과 함께 뉴타운 개발 반대 시위도 했다. 동네 주민 70~80명이 버스를 빌려 서울주택도시공사 앞에 찾아갔다. 전동휠체어를 탄 오 센터장은 그 버스에 오르기 어려웠다. 혼자 지하철로 이동했다. 이웃 주민은 ‘오 사장님은 나오지 않아도 된다’며 말렸다. 그래도 함께 했다. 보상을 더 받는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주민들과 함께 하는 동질감이 좋았다. 피켓을 들고 노란조끼를 입고 머리에 빨간띠도 둘렀다. ‘투쟁!’ 구호도 외쳤다.

오문영 센터장이 운영했던 도장가게 ‘예랑사’는 은평 뉴타운 개발로 문을 닫게 됐다. ⓒ 오문영
오문영 센터장이 운영했던 도장가게 ‘예랑사’는 은평 뉴타운 개발로 문을 닫게 됐다. ⓒ 오문영

결국 도장 가게 ‘예랑사’도 문을 닫았다. 보상금으로 이사비용 500여만 원, 영업보상비 2500만 원을 받았다. 자립 공동체는 뿔뿔이 흩어졌다. 각자 살던 집으로 돌아갔다. 오 센터장은 그럴 수 없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도장 가게를 새로 열기에는 전망이 어두웠다. 인감 도장을 잘 사용하지 않아 산업이 하향세였다.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

# 9PM: 완전한 홀로서기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 총연합회에 따르면 전국의 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111개다. 자립생활센터는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장애인 당사자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기관이다. 상담자와 내담자가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 경험을 공유하는 동료 상담, 자립 생활에 필요한 각종 정보 제공, 사회를 바꿔나가기 위한 권익 옹호, 이동·주거서비스 지원을 비롯한 활동보조서비스 등을 제공한다. 모든 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센터장은 오 센터장처럼 장애인이다.

오문영 센터장이 2007년 동료 故김용구와 장애인 권익 옹호 활동을 하며 카메라를 보고 웃고 있다. ⓒ 오문영
오문영 센터장이 2007년 동료 故김용구와 장애인 권익 옹호 활동을 하며 카메라를 보고 웃고 있다. ⓒ 오문영

- 장애인 자립센터들이 비슷한 시기에 많이 생겼네요.

“예전에는 ‘재활 패러다임’이라 해서 장애인을 재활시키려고 그랬어요. 소위 전문가들이 장애인은 재활, 즉 ‘정상화’해서 사회에 복귀시켜야 한다고 말했어요. 이런 것이 재활 패러다임이었죠. 그래서 예전에는 재활원이 많이 생겼어요. 재활을 시키면 조금은 나아지겠죠. 그러나 ‘정상’이 되긴 힘들어요. 그렇다면 장애인은 언제까지 재활을 해야 돼요? 죽을 때까지 해도 안 돼요. 재활, 재활하다가 그 사람은 죽어. ‘재활 패러다임은 실패했다. 이제는 자립으로 봐야 한다’ 하면서 자립 생활 운동이 시작됐어요. 1950년대 미국에서 시작해서 일본으로 넘어왔다가 우리나라까지 들어온 거죠. 노무현 참여정부 즈음부터 우리나라에서도 자립 생활 운동이 시작됐어요.”

오 센터장도 그 흐름 속에 있었다. 2006년 6월, 은평 재개발로 구파발에서 꾸린 공동체를 떠난 오 센터장은 옆 동네인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반지하방을 얻어 혼자 이사했다. 전세자금은 부모님이 대출을 받아 마련해줬다. 방 두 개에 거실 하나가 있는 빌라였다. 그의 나이 만 44살였다. 완전한 홀로서기가 시작됐다.

공교롭게도 그해 겨울부터 활동지원서비스 시범사업이 시작됐다. 오 센터장에겐 천만다행이었다. 활동지원서비스가 시작되면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활동지원사가 가사 지원을 하러 왔다. “활동지원 서비스가 정말 나를 위해서 생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감사했다. 활동지원 서비스가 아니었다면 나는 보따리 싸서 다시 시골로 돌아가야 했다”고 오 센터장은 그 시절을 돌이켰다.

# 10PM: 우리의 자립 생활

서대문햇살아래장애인자립센터 10주년 기념식. 오문영 센터장은 매 해가 감사하다고 말한다. ⓒ 오문영
서대문햇살아래장애인자립센터 10주년 기념식. 오문영 센터장은 매 해가 감사하다고 말한다. ⓒ 오문영

오 센터장은 홀로 서는 동시에 다른 장애인의 홀로 서기를 돕는 일도 시작했다. 장애인 자조모임을 통해 알게 된 독립생활연대 윤두선(61) 대표가 홍제동으로 이사 와서 자립센터를 차리기를 권유했다. 1년 동안 윤 대표에게 장애인자립생활을 ‘배웠다’. 각종 활동 및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센터를 운영하는 방법도 익혔다.

2007년 5월 4일, 마침내 서대문 햇살아래장애인 자립생활센터가 홍제동에서 개소했다. 오 센터장이 만 45세가 되던 해였다. 햇살아래를 설립한 후 2~3년 동안은 이렇다 할 활동을 펼치지 못했다. 사무실도 없어 오 센터장의 집을 사용했다. 오 센터장이 홍제동에서 얻은 빌라에 활동가를 비롯해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것을 본 집주인은 2년 임대 계약 기간이 끝나자 방을 빼주기를 요구했다. 그래서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곳을 다시 사무실로 썼다.

2009년, 처음으로 1400만 원짜리 서울시 사업에 선정됐다. 인건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었지만 이를 발판으로 하나둘 공모사업을 따내며 성장해왔다. 출범 3주년이 되던 2010년 2월, 햇살아래가 장애인 활동보조 제공기관으로 정식 등록됐다. 이후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서울시 자립 생활 지원 공모사업에도 선정됐다. 서너사람 몫의 인건비를 마련할 수 있게 됐다.

- 햇살아래가 유독 기념식을 자주한다고 들었어요.

“몇 주년 기념식 같은 것도 우리나 하지 다른 데는 잘 안 해요. 햇살아래는 매년 직원들이랑 밥이라도 먹고, 추첨이벤트도 하거든요. 매년 기념식을 해요. 좋잖아. 감사하잖아. 매년 특별해요.”

-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필요한 이유는 뭔가요?

“나를 밖으로 이끈 사람들은 비장애인이었어요. 그런데 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장애인 당사자들이 장애인들을 세상에 나오도록 이끌고 있어요. 장애인 사정은 장애인이 제일 잘 알지 않겠어요? 당사자 시선에서 밖으로 나오게 하고 활동할 수 있는 장과 기회를 마련하는 거죠."

- 보람도 많이 느꼈을 것 같아요.

“그전까지는 나 혼자만의 자립 생활을 한 거잖아요. 내가 살기 위해서. 그런데 자립생활 운동을 함으로써 내가 아닌 우리 이웃, 내 옆에 있는 장애인들, 나보다 더 (열악한) 시설이나 아니면 내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집에만 있는 장애인들이 집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는 점, 다른 사람을 위해 자립생활 운동을 하고 있단 것이 보람이고, 기쁨이죠.”

오문영 센터장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다. ⓒ 오문영
오문영 센터장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다. ⓒ 오문영

이제 오 센터장은 100명 앞에서 연설하는 일도 잦다. 처음에는 마이크를 잡는 일이 어색했다. 지금은 노련하게 연설한다. 활동보조사를 비롯해 센터 직원 등 많은 이들이 햇살아래 식구가 됐다. 이 정도면 나름 성공적인 삶이라고 느낀다. 어떤 이는 오 센터장을 ‘작은 거인’이라고 부른다. 고향에 돌아가면 “누구네 아들이 이제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 10PM: ‘감사맨’ 오문영

하루의 모든 일을 끝내고 돌아온 집에서 얼굴과 몸을 씻고 나면, 오 센터장은 안방 탁상에 있는 작은 거울을 보며 로션을 바른다. 오 센터장은 어릴 적 거울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 센터장이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본 건 성인이 된 직후였다. 스무 살이 된 오 센터장에게도 군대 징집 영장이 나왔다.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소명해야 했다. 직접 면사무소에 찾아가기 어려웠던 오 센터장은 사진을 찍어 보내기로 했다. 시내에서 카메라를 빌려왔다. 속옷만 입고 마루 끝에 앉았다. 마을 이장님이 속옷 차림의 오 센터장의 앞뒤 모습을 찍었다.

며칠 뒤 동생이 흑백사진을 사진관에서 인화해왔다. 오 센터장은 자신의 모습을 그때 처음 제대로 봤다. 충격적이었다. “앙상한 모습, 뼈만 남고 앙상하게 휜 모습. 아, 정말, 그때 나는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어요. 괴물 같은 나의 모습에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해봤어요.” 며칠 동안 가족과도 말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으며 울었다.

그 시절을 극복한 후 오 센터장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됐다. 이제는 크고 작은 일에 늘 감사하며 지낸다.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한다. 하루를 뒤돌아보며 감사한다. 가족과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도 한다. 오 센터장은 스스로를 ‘감사맨’이라고 부른다. 그는 지금처럼 살 수 있어 언제나 감사하다.

오문영 센터장은 혼자 생활하지만 더는 혼자가 아니다. ⓒ 김은송
오문영 센터장은 혼자 생활하지만 더는 혼자가 아니다. ⓒ 김은송

- 비장애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세상 사람들은 다양한 사연들을 갖고 있어요. 나 역시 그 다양한 사람 중 한 명이죠. 그러니 뭐 특별히 대단하다, 훌륭하다 이렇게 바라보지 말고, 그런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며 잘 견디어온 사람이구나 하고 여겨줬으면 좋겠어요. 우리 장애인들이 장애를 대단하게 극복했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각자 겪고 있는 삶이 대단한 것입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감사의 기도를 마치면 오 센터장은 잠자리에 든다. 별다른 잠버릇도 없고 꿈을 잘 꾸지도 않는다. 잠에 들며 오 센터장은 오늘과 다른 내일을 기다린다. 그는 혼자 생활하지만 더는 혼자가 아니다.

※ 지금까지 <햇살아래, 오문영>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울 서대문 햇살아래 장애인자립센터의 오문영 센터장은 올해 60세다. 생의 절반을 집안에서만 살았다. 그 세월 동안 외출은커녕 대문 밖도 나가지 못했다. 이제 그는 독립해서 산 지 30년이 됐다. 지난 4~5월, 두 달에 걸쳐 일주일에 한 번씩 모두 다섯 번 그를 만났다. 혼자 사는 장애인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살아왔을까. 그의 24시간에 60년의 인생을 담아,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인생의 절반을 방 안에 갇혀 지낸 장애인 [햇살아래, 오문영 ① 마루에 앉아 세상을 구경하다]
휠체어 타고 떠나온 고향 [햇살아래, 오문영 ② 처음으로 대문 밖을 나서다]

일러스트: 김은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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