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인터뷰] 뇌병변 장애인 길별은의 연기 인생

지난 3월 청각장애인 배우 트로이 코처가 제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코처는 영화 <코다(CODA)>에서 정상인 자녀를 둔 청각장애인 아버지를 연기했다. 시상자로 나선 배우 윤여정이 수화로 트로이 코처를 호명했다. 시상대에 선 코처는 수화로 “이 상을 모든 장애인에게 바친다”고 수상소감을 전했다. 장애인 배우에 대한 미국 영화계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지난달 23일 서울시 여의도에 있는 어느 카페에서 만난 길별은 씨가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강원
지난달 23일 서울시 여의도에 있는 어느 카페에서 만난 길별은 씨가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강원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장애인 배우의 존재감이 거의 없다. 비중이 낮은 조연이나 단역을 아주 가끔 맡을 뿐이다. 장애인 역할이 필요한 경우에도 비장애인 배우가 이를 연기한다. 주요 영화제에서 장애인 배우가 수상한 적도 없다.

이렇게 열악한 조건 속에서 뇌병변 장애인 배우 길별은(본명 길윤배·53) 씨는 2004년부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길 씨는 지난 18년 동안 4편의 영화와 3편의 드라마에 출연했고, 10편이 넘는 연극에 참여했다. 이를 인정받아 2012년 장애예술인에게 수여하는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대상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2018년 평창패럴림픽에선 성화봉송 주자로 나서기도 했다. 18년 차 장애인 배우 길 씨를 지난달 23일 서울시 여의도에 있는 어느 카페에서 만났다.

500원짜리 영화관에서 싹튼 배우의 꿈

길별은 씨는 1970년 11월 1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윤배. ‘진실을 더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길 씨는 세 살 때 가혹한 진실과 마주했다. 뇌병변 장애 2급을 진단받은 것이다. 뇌병변 장애는 뇌 손상으로 인해 신체 기능에 어려움을 겪는 장애다. 팔다리 마비, 관절 경직, 언어장애 등 여러 증상을 겪는다. 어린 길 씨는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했다. 말도 똑바로 하지 못했다. 장애의 원인은 가난이었다. 어머니가 길 씨를 임신했을 때 먹을 것이 없어 끼니를 걸렀다. 의사는 태아가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해 뇌가 손상됐다고 길 씨의 어머니에게 설명했다.

인터뷰하는 동안, 길별은 씨의 표정은 다양하게 변했다. ⓒ 이강원
인터뷰하는 동안, 길별은 씨의 표정은 다양하게 변했다. ⓒ 이강원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재활 치료도 받지 못했다. 어머니는 움직이지 못하는 어린 길 씨를 업고 다녔다. 어머니의 등에 업힌 길씨는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참담했다. 8살 때 어머니의 등에 업혀 처음으로 영화관에 갔다. 영화 <원더우먼>을 만화로 만든 만화영화 <원더공주>를 봤다. 영화를 보는 내내 길 씨는 주인공처럼 강한 힘으로 악당을 물리치는 상상을 했다. 처음으로 장애에서 벗어난 기분을 느꼈다. 이때부터 길 씨는 스크린 안에서나마 자유로운 배우가 되고 싶었다.

14살 무렵, 기적같이 몸 상태가 나아졌다. 무언가에 의지해 걸을 수 있게 됐다. 길 씨는 목발에 의지해 걸었다. 혼자 영화관에 갈 수 있게 됐다. 500원에 두 편을 볼 수 있는 영화관에 거의 매일 갔다. 목발을 잡는 길 씨의 왼팔이 안쪽으로 뒤틀렸다. 그래도 괜찮았다. 영화를 보며 배우가 되는 자신을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가는 대신 영화관에 갔다.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관찰하며 자신이 연기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고입선발고사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 비인가 학교인 한강실업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괘념치 않았다. 배우만 될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길 씨는 생각했다. 그는 영화관에서 연기를 공부했다.

황금처럼 빛날 이름, 별은

영화관에서 나오면 ‘영화배우 길윤배’는 ‘뇌병변 장애인 길윤배’로 돌아왔다. 길 씨는 멋대로 움직이는 팔다리와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하는 입을 자각했다. “이런 나를 받아줄 대학 연극 영화과는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길 씨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어느 날 교보문고에서 책을 고르다 한국예술대학교의 신입생 모집 광고 전단을 보았다. ‘누구나 입학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예술대는 지금은 사라진 비인가 학교다. 정규 대학에 입학하려면 고졸 검정고시를 준비해야 했지만, 한국예술대 입학에 그런 조건은 필요 없었다. 연기만 배울 수 있다면 정규 대학이건 아니건 상관없다고 길 씨는 생각했다.

길 씨는 곧바로 지원했고, 1990년 한국예술대에 입학했다. 기대에 부풀었지만 이내 실망했다. 영화학 같은 이론만 가르칠 뿐 실제 연기를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등록금도 감당할 수 없었다. 1년 만에 자퇴했다. “나는 언어장애도 있고 걷는 것도 이상한데, 그냥 포기하자 생각했지요.”

이후 길 씨는 농인 고아를 대상으로 하는 어느 교회의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농인 아이들과 대화하기 위해 수화도 배웠다. 1991년 어느 날, 교회 사람들이 길 씨에게 연극 출연을 부탁했다. 농인 아이들에게 연극을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작은 연극이었지만, 길 씨에겐 첫 연기 무대였다. 즐거웠다. 길 씨는 다시 배우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배역을 얻을 수 없었다. 교회가 주최하는 아마추어 공연에서 아마추어 배우로 간간이 연기하는 것 말고는 무대에 오를 길이 없었다. 벌이도 없었다. 길 씨는 부모님과 함께 살며, 장애 수당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 2004년 12월 어느 지하철에서 길 씨는 국공립예술단체인 서울예술단이 낸 공고를 봤다. 연극 <크리스마스 캐럴>에 출연할 장애인 배우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지원했어요.” 길 씨는 당시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다.

5명을 뽑는데 장애인 90명이 지원했다. 너무 높은 경쟁률이었다. 게다가 직원의 실수로 대본도 미리 받지 못했다는 것을 오디션 날에야 알게 됐다. “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냥 감독 앞에서 막춤을 추며 노래했지요.” 길 씨가 웃으며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래도 감독은 길 씨를 뽑았다. 이름도 대사도 없는 배역이지만, 길 씨에겐 전문 배우로서 내딛은 첫걸음이었다.

길별은 씨의 친필 사인이다. 길 씨는 오랫동안 빛나는 배우가 되려는 마음을 담아 예명을 ‘길별은’으로 지었다. ⓒ 길별은
길별은 씨의 친필 사인이다. 길 씨는 오랫동안 빛나는 배우가 되려는 마음을 담아 예명을 ‘길별은’으로 지었다. ⓒ 길별은

<크리스마스 캐럴>은 영국 대문호 찰스 디킨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연극이다. 길 씨는 스크루지 영감과 만나는 유령 역할을 맡았다. 길 씨의 장애가 연기에 도움이 됐다. 뇌병변 장애 때문에 뒤뚱거리며 걸었는데, 실감 나는 유령 연기가 된 것이다. 공연장 바깥에서 어떤 관객이 유령 분장을 벗은 길 씨를 알아보고 그의 유령 연기를 칭찬했다.

그렇게 길 씨는 교회의 작은 무대에 오른 지 13년 만인 2004년 12월, 관객의 격려와 정식 출연료를 받는 정식 배우가 됐다. 전문 배우의 길을 걷게 됐으니 예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황금이라는 뜻의 '별은'(別銀)으로 새 이름을 지었다. 길이 황금처럼 빛나는 배우가 되겠다는 소망을 이름에 담았다.

장애인도 연기를 할 수 있어?

소망과 달리, 그 뒤의 사정이 크게 변하진 않았다. 길별은 씨는 데뷔 후 6년 동안 소속사 없이 연극 무대를 전전했다. 수소문 끝에 2010년 장애인 전문 소속사 ‘디앤지스타’에 들어갔다. ‘디앤지스타’는 KTF(현 KT)가 장애인 배우를 육성할 목적으로 2004년에 설립한 기업이다. 그런데 수익이 나지 않아 2011년 폐업했다. 그로부터 1년 뒤 ‘디앤지스타’의 경영에 참여했던 이들이 다시 모여 ‘피플지컴퍼니’를 설립했다. 이 회사 역시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2021년 폐업했다. 그래도 장애인 연기자를 키우겠다는 사람들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피플지컴퍼니’에 참여했던 김은경 한국장애인방송연기자협회 이사가 뜻이 맞는 사람을 모아 올해 ‘프로316’이라는 매니지먼트 회사를 설립했다. 길 씨는 현재 ‘프로316’에 소속돼 있다.

길변은 씨는 2014년 드라마 갑동이에 출연해 주인공 하무염의 아버지 하일식 역할을 맡았다(왼쪽). 촬영 뒤풀이 자리에서 배우 김민정과 기념 사진도 찍었다(오른쪽). ⓒ 길별은
길별은 씨는 2014년 드라마 갑동이에 출연해 주인공 하무염의 아버지 하일식 역할을 맡았다(왼쪽). 촬영 뒤풀이 자리에서 배우 김민정과 기념 사진도 찍었다(오른쪽). ⓒ 길별은

장애인 연기자를 키우려는 소속사는 계속 망하고 새로 만들어졌지만, 길 씨에겐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소속사에서 길 씨는 발성법 등 기초 연기 수업을 받았다. 연기 수업이 없을 땐 혼자 영화를 보며 연기를 공부했다. 그동안 연기 공부를 위해 살펴본 영화만 1500편이 넘는다고 길 씨는 말했다.

2014년 기회가 왔다. 종합 엔터테인먼트 채널 tvN이 연쇄살인범 갑동이를 추적하는 추리극 드라마 <갑동이>에 출연할 장애인 배우를 모집했다. 길 씨는 감독 앞에서 면접을 본 뒤 ‘주인공 하무염의 지체 장애 아버지’라는 이름 없는 단역을 얻어냈다.

길 씨가 처음 출연한 상업드라마인 <갑동이>는 20부작이다. 이 가운데 길 씨가 출연한 분량은 모두 합쳐 3분 정도였다. 비중이 낮은 배역이었지만, 자기 때문에 NG가 나서 촬영이 지연될까 길 씨는 두려웠다. 대사를 잊지 않기 위해 대본을 꼼꼼히 살폈다. 카메라 앞에선 경직된 다리를 애써 움직였다. 입이 떨어지지 않을 땐 깊게 심호흡을 한 뒤 다시 대사를 말했다. 다행히 NG는 없었다. 매일 촬영이 이뤄지는 드라마 현장에도 잘 적응했다. 길 씨의 연기를 좋게 평가한 감독은 길 씨의 배역에 이름을 붙였다. 원래 대본에는 ‘지체 장애가 있는, 주인공 아버지’로 적혀 있었지만, 길 씨의 연기 덕분에 그 아버지에게 이름이 생겼다. ‘하일식’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하일식’과 같은 정식 배역을 얻어 상업 작품에서 연기한 것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드라마 <갑동이> 이후 길 씨는 드라마나 영화 배역을 얻지 못했다. “‘배우 길별은’이라고 적어 프로필을 내면 100번 가운데 3번 정도 오디션 요청이 왔어요. 그런데 ‘장애인 배우 길별은’이라고 보내면 100번 가운데 단 한 번도 그런 요청을 안해요.” 장애인 배우를 쓰겠다는 인식 자체가 한국의 영화계와 방송계에 없다는 것이다.

효력 없는 장애예술인지원법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에도 장애인 인물이 있다. 그럴때도 한국에선 연기를 잘 하는 비장애인 배우를 출연시킨다. 이처럼 비장애인 배우가 장애인 배역을 연기하는 것을 서구에서는 ‘크리핑 업’(cripping up)이라 부른다. 장애가 있는 것처럼 연기한다는 뜻이다. 영화 <오아시스>에서 뇌병변 장애 여성을 연기한 배우 문소리, 영화 <말아톤>에서 지체 장애 마라톤 선수를 연기한 배우 조승우 등이 대표적 사례다.

왜소증 배우 피터 딘클리지는 영화 시라노에서 남자 주인공 ‘시라노’를 연기했다. 원래 대본에서 비장애인으로 묘사된 역할을 장애인 배우가 연기한 것이다. ⓒ 네이버 영화
왜소증 배우 피터 딘클리지는 영화 시라노에서 남자 주인공 ‘시라노’를 연기했다. 원래 대본에서 비장애인으로 묘사된 역할을 장애인 배우가 연기한 것이다. ⓒ 네이버 영화

이에 비해 미국에선 장애인 배역을 장애인 배우가 맡아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올해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트로이 코처가 영화 <코다>에서 농인 아버지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이러한 인식 전환이 있었다. 장애인 역할은 물론 ‘비장애인 역할’을 장애인 배우가 맡는 사례도 늘었다. 키가 132센티미터(cm)인 왜소증 배우 피터 딘클리지는 영화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서 비장애인 배역인 ‘트라스크 박사’를 연기했다. 마블 영화 <이터널스>에선 원래 대본에서 금발 남성 비장애인 캐릭터로 묘사된 ‘마카리’의 연기를 흑인 여성 청각장애인 로런 리들로프가 맡았다. 리들로프의 액션 장면은 관객의 호평을 받았다.

한국에도 장애예술인의 예술활동을 보장하려는 법률이 있다. 2020년 12월 제정된 ‘장애예술인 문화예술 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장애예술인지원법)이다. 장애예술인지원법 제10조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장애예술인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방귀희 한국장애예술인협회 회장은 이 법의 실효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강제로 배역을 할당하는 것이 아닌 권고 수준이고, 장애인 배우를 고용한 제작자에게 지원금을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장애예술인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려면, 장애인예술인을 출연시키는 제작자에게 국가 예산으로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고 방 회장은 제안했다.

김은경 한국장애인방송연기자협회 이사는 강제 할당제 또는 인센티브 제도의 도입보다 더 중요한 과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장애인들이 전문적인 연기 수업을 받을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여러 대학에 연극영화과가 있지만, 여기에 입학하는 장애인은 거의 없다. 장애인이 공부하며 연기를 배울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자유롭게 진학해 전문적인 연기 공부를 할 수 있는 영국이나 미국의 대학과 비교된다.

장애인 배우에게 더 혹독했던 팬데믹

길별은 씨는 1년에 세 편 정도의 연극 무대에 오른다. 한 편 당 100만 원의 출연료를 받는다. 그의 평균 연봉은 300만 원 정도다. 연기자로서 가장 많은 소득을 올렸을 때는 드라마 <갑동이>를 찍었던 2014년이다. 이때 1000만 원 정도 벌었다. 소득이 적은 길 씨는 자립할 수 없었다. 지금도 길 씨는 서울 동작구에 있는 부모님 집에 살며 월 50만 원 지급되는 장애인 연금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다른 장애인 배우들의 상황도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장애예술인 실태조사를 담은 <2021 장애예술인 문화예술활동 실태조사 및 분석연구>를 보면, 2020년 장애예술인이 예술활동으로 얻은 수입은 연평균 218만 1천 원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0 예술인 소득 및 계약 현황 설문조사>를 보면, 비장애인 예술인의 연평균 소득은 약 980만 원이었다. 예술인들의 소득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지만, 그중에서도 장애예술인의 소득이 훨씬 더 열악한 것이다.

이런 처지에 놓인 장애인 배우들은 코로나19로 인해 더 힘든 시기를 겪었다. 각종 공연이 모두 연기되거나 취소됐다. 2020년 이후 2년 넘는 기간 동안, 길 씨는 딱 세 차례 배역을 얻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길 씨는 서울시에서 지급하는 예술지원금 100만 원을 받았다. 그마저도 받지 못하는 장애예술인도 있다. 예술활동을 해왔다는 ‘예술활동증명서’가 있어야 하는데, 출연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장애 예술인들이 자신의 예술활동을 증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2021 장애예술인 문화예술활동 실태조사 및 분석연구>를 보면, 장애예술인 가운데 66.5%가 코로나19 관련 정부 또는 지자체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연기 하고 싶습니다. 기회를 주십시오

길별은 씨는 2012년 즈음 소속사의 도움을 받아 프로필 사진을 찍었다. ⓒ 길별은
길별은 씨는 2012년 즈음 소속사의 도움을 받아 프로필 사진을 찍었다. ⓒ 길별은

2005년 10월 13일 길별은 씨는 영화인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온라인 커뮤니티 ‘필름메이커스 커뮤니티’에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간절히 연기를 하고 싶었던 때였다. 당시 길 씨에겐 소속사도 없었다. 직접 글을 적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길별은입니다. 3급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약간의 행동과 언어에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 장애인이라는 선입견을 조금은 제쳐주시고 저에게 연락 주십시오. 저는 연기를 꼭 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길 씨가 이 글을 쓴지 약 17년이 지났다.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장애인 배우에 관한 인식은 그대로다. 배역을 얻기 힘든 것도 예전과 같다. 그런데도 길 씨는 여전히 연기 공부를 하고 있다. 매주 목요일 소속사에서 열리는 연기 수업에 나간다. 매일 영화를 보며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분석한다. 기회가 온다면 반드시 잡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길 씨의 꿈은 피터 딘클리지 같은 대배우가 되는 것이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고 싶은 꿈도 있다. 장애인 배우도 밝은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 배우 길별은 씨는 자신을 장애인이 아니라 배우라고 생각한다. 배우 길 씨는 배역을 갈구하고 있다. “저를 캐스팅해 주신다면, 아주 백골난망 하겠습니다.” 턱 근육을 힘주어 움직이며 말하는 길 씨의 눈이 황금처럼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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