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아래, 오문영 ② 처음으로 대문 밖을 나서다

<지난 이야기>
1962년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난 오문영은 세 살 때 소아마비를 앓은 후 20여년 간 외출하지 못했다. 그가 다닐 수 있는 곳은 시골집의 방과 마루가 전부였다. 하루종일 마루에 앉아 바깥세상을 구경하며 외로운 날을 보냈다. 스무 살, KBS 라디오에서 장애인을 위한 프로그램이 방송됐다. 그곳에 자신의 이야기를 편지로 써서 보냈다. 집에 갇혀 지낸 그의 사연을 방송에서 들은 사람들이 남원 시골집으로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쓰고 읽는 것이 오문영의 일과가 됐다. 그는 10년 동안 편지를 썼다. 그 편지 덕분에 시골집 대문을 떠나게 될 줄은 몰랐다.

오문영 센터장이 햇살아래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업무를 보고 있다. ⓒ 박시몬
오문영 센터장이 햇살아래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업무를 보고 있다. ⓒ 박시몬

12PM: 첫 외출의 계기가 된 편지

오전 10시 30분, 오문영 센터장은 사무실에 출근해 밀린 업무를 처리한다. 결재판을 일일이 살펴보고 도장을 찍는다. 품의서나 사업계획서, 결과보고서 따위다. 매주 월요일에는 직원들과 주간 회의를 한다. 이외에도 수시로 직원들과 소통하며 업무를 지시한다. 햇살아래는 장애인과 활동보조인을 이어주는 활동보조 중개 사업을 비롯해 장애인에게 필요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시곗바늘이 12시에 가까워지자 직원들이 하나둘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오 센터장이 갈 수 있는 식당은 한정적이다. 턱이 없는 식당으로 가야 한다. 식당 입구 곳곳에는 턱이 있다. 오 센터장은 센터 주변 식당 중 하나를 가리켰다. “저기도 가보고 싶었는데 한 번도 못 가봤어요.” 턱이 두 개 있는 식당이었다. 전동휠체어로는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오문영 센터장이 센터 근처 식당에서 국밥을 먹고 있다. 그는 남들보다 적게 먹는다. 화장실에 가기 불편했던 어린 시절에 생긴 습관이다. ⓒ 오문영
오문영 센터장이 센터 근처 식당에서 국밥을 먹고 있다. 그는 남들보다 적게 먹는다. 화장실에 가기 불편했던 어린 시절에 생긴 습관이다. ⓒ 오문영

결국 이날도 턱이 없는 동네 국밥집으로 갔다. 메뉴는 돼지국밥이다. 국밥집 사장님이 오 센터장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우리 집에 턱이 없어서 편하죠?” 자리를 잡았다. 출입문과 가장 가까운 곳이다. 전동휠체어가 들어가기 위해 바깥쪽 의자를 빼냈다. 이내 국밥이 나왔다. 팔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오 센터장은 어깨를 숙여서 먹는다. 국밥을 반절 정도만 먹고 오 센터장은 숟가락을 내려놨다. 금세 배가 부르다고 했다.

오 센터장이 적게 먹는 데엔 이유가 있다. 어릴 적 화장실에 가기 불편해 생긴 습관이다. 어릴 적 살던 남원 시골집 화장실은 마당 끝에 있었다. 마루에서 혼자 마당으로 나갈 수 없었다. 마당을 기어간다 한들 혼자 화장실에 갈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방 안에 신문지를 깔고 용변을 해결했다. 그마저도 부모님과 할머니가 도와줘야만 가능했다.

- 원래 적게 드시나 봐요.

“옛날부터 조금만 먹어 버릇하니까 먹는 양이 줄었어요. 혼자서 화장실에 못 가니까 하루걸러 용변을 해결했거든요. 웬만하면 대변을 사흘에 한 번 봤어요. 그래서 먹는 양을 줄였죠. 많이 안 먹으니까 많이 싸지 않았어요. 그 습관이 이어져서 지금까지도 적게 먹어요. 지금이야 매일같이 화장실에 가지만.”

- 마루 밖에 나가기 어려운데 편지는 어떻게 보냈어요?

“둘째 여동생이 학교 가는 길에 내가 쓴 편지를 우체통에 넣어줬어요. 다섯 살 아래인 둘째 여동생이랑 가장 친했거든. 내가 그 애 숙제도 대신 해주기도 하고, 서로 도왔죠. 집으로 오는 편지는 내가 마루에 앉아 있다가 배달부한테 직접 받았고요.”

오문영 센터장은 방 안에서 편지를 쓰며 20대를 보냈다. ⓒ 김은송
오문영 센터장은 방 안에서 편지를 쓰며 20대를 보냈다. ⓒ 김은송

그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었으므로 20대의 오 센터장은 매일 바닥에 엎드려 편지를 썼다. 앉아서는 쓰지 못했다. 왼손 팔꿈치를 땅에 대야 글씨를 쓸 수 있었다. 편지를 보낸 후엔 답장을 기다렸다. 10년 내내 매일같이 편지를 썼다. 편지를 주고받던 사람 가운데 누군가가 남원에 있는 어느 선교회를 소개해줬다. 그 선교회는 장애인들을 위한 ‘송년회의 밤’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집으로 전화가 왔다. 남원 선교회 사람들이었다. 행사에 나오라고 권유했다. 오 센터장은 겁이 났다. 나가기 무섭고 두려웠다. 거절했다. 선교회 사람들은 집으로 찾아왔다. 다시 권했다. 내가 어떻게 나가겠냐고 다시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뭐가 어때서 그러느냐, 충분히 나갈 수 있다고 그들은 또 권했다. 오 센터장은 용기를 냈다.

만 25살이 되던 해인 1987년 12월 27일이었다. 소아마비를 앓았던 3살 이후 처음으로 이날 오 센터장은 대문 밖에 나섰다. 집에 찾아왔던 선교회 교인 두 명이 그를 데리러 왔다. 그 시절 오 센터장에겐 휠체어가 없었다. 방과 마루만 오가는 그에게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다. 선교회 사람들은 오 센터장을 업었다. 타고 온 자가용 뒷좌석에 태웠다. 차를 타고 20여 분을 달렸다. 남원 시내에 도착했다. 그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오문영 센터장의 고향집에 있던 텔레비전. 하루종일 라디오를 듣거나 텔레비전을 보며 그는 세상을 구경했다. ⓒ 오문영
오문영 센터장의 고향집에 있던 텔레비전. 하루종일 라디오를 듣거나 텔레비전을 보며 그는 세상을 구경했다. ⓒ 오문영

20여년 동안 오 센터장은 세상을 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만 접했다. 직접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어리둥절했다. 야광 네온사인과 간판 불빛들이 빛났다. 휘황찬란했다. 사람들도 만났다. 교회 강당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지역 국회의원도 있었다. 그동안 오 센터장이 대면한 사람들은 할머니, 부모님, 동생, 동생의 친구들, 그리고 편지를 전해주는 우편배달부가 전부였다. 사람들 틈에서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왜인지 기가 눌렸다. “시장에 내다 파는 닭이 된 기분이었죠.” 그날을 떠올리며 오 센터장이 말했다.

처음 시작한 외출은 점점 잦아졌다. 이듬해부터 한 달에 한 번씩 나갔다. 선교회는 한 달에 한 번 장애인을 위한 행사를 열었다. 스무 명 안팎의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밥도 먹었다. 선교회 사람들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오 센터장을 데리러 남원 시골집에 왔다.

외출할 땐 최대한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집에서 용변을 해결한 뒤 나가려고 애썼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질까봐 물도 적게 마셨다. 아주 가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소변을 해결했다. 그래도 웬만하면 참았다. 남에게 도와달라고 하기 민망했다. 대변을 보는 일은 절대 없었다. 그때도 밥은 적게 먹었다.

몇 년이 흘러, 오 센터장은 매주 외출했다. 교회에 나갔다. 선교회 사람들과도 친해졌다. 더 욕심이 생겼다. 어떻게 하면 한 번이라도 더 세상에 나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을까. 20대 후반의 오 센터장에겐 그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

# 2PM: 나의 발, 휠체어

햇살아래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떡볶이를 나눠 먹고 있다. ⓒ 신유미
햇살아래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떡볶이를 나눠 먹고 있다. ⓒ 신유미

점심 식사 후, 오 센터장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오 센터장은 자리에 앉아있기보다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직원들과 소통한다. 업무 진행 상황을 확인하거나 행사 및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행사나 자조 모임 등을 위해 센터로 찾아오는 사람들과 회의도 자주 한다.

오후가 되자 오 센터장은 사회적 협동조합 ‘인권과 문화 예술’의 정기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센터를 나섰다. 인권과 문화 예술 사무실은 서울 강서구에 있다. 지하철로는 9호선 증미역 근처다. 햇살아래 사무실이 있는 무악재역에서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야 한다. “산 넘고 물 건너 가야 하는 여정”이라고 오 센터장은 말했다.

오문영 센터장이 주말 경복궁역 앞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엘리베이터 상단에는 ‘교통약자 우선탑승’이라는 표시가 있다. ⓒ 신유미
오문영 센터장이 주말 경복궁역 앞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엘리베이터 상단에는 ‘교통약자 우선탑승’이라는 표시가 있다. ⓒ 신유미

전동휠체어를 타고 지하철을 이용하는 일의 절반은 ‘엘리베이터 타기’다. 지하철 입구에 들어갈 때 한번, 입구에서 카드 찍고 열차를 타러 가기 위해 또 한 번, 환승할 때 한 번, 지하철에서 나올 때도 한 번씩 타야 한다. 장애인은 물론 비장애인도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이날 을지로3가역 엘리베이터 앞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오 센터장이 줄을 서자 앞서 있던 노인들이 먼저 타라고 손짓했다. 오 센터장은 사양했다. “먼저 오셨으니 먼저 타세요.”

순서대로만 타면 된다고 오 센터장은 생각한다. ‘교통약자 우선’이라는 표시가 엘리베이터에 붙어있지만, 배려는 바라지 않는다. 그저 순서만 지키면 된다. 그런데 장애인을 제치고 새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날 어떤 할아버지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오 센터장을 밀쳤다. 그러곤 자신이 탔다. 황당했지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날 먼저 배려하지 않아도 돼요. 순서만 지켜주면 좋겠어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오 센터장이 기자에게 말했다.

2호선 을지로3가역 열차에 탑승객이 많아 오문영 센터장이 다음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 박시몬
2호선 을지로3가역 열차에 탑승객이 많아 오문영 센터장이 다음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 박시몬

열차 안에서 오 센터장은 휠체어 전용칸이 아닌 일반 좌석 옆에 자리를 잡았다. 왜 전용칸으로 가지 않는지 물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꼭 휠체어 전용칸으로 가야하나요. 그냥 내가 있고 싶은 자리에 있는 거죠.” 그래도 출퇴근 시간에는 있고 싶은 자리를 찾기가 힘들다. 승객이 많으면 전동휠체어가 들어설 공간이 없다. 그럴 때는 열차를 한두대 보내고서야 탑승한다.

혼자 힘으로는 열차에 오르기 힘든 역도 있다. 플랫폼보다 열차 높이가 더 높을 때다. 서울 3호선 경복궁역이 그렇다. 보조자가 있는 힘껏 전동휠체어 앞바퀴를 들어올려야 올라탈 수 있다. 동행인이 없으면 주변 승객에게 부탁하거나 역무원을 부르기도 한다고 오 센터장은 설명했다. 서울 도심 한복판의 지하철 역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 휠체어는 언제부터 탔나요?

”휠체어는 내 발이에요. 내가 선교회 사람들을 통해 밖에 처음 나갈 때만 해도 휠체어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외출할 때마다 나를 업으러 왔지. 그러다가 선교회 사람을 통해서 1988년 처음으로 수동 휠체어를 받았어요. 26살 때였죠. 손에 힘이 안 들어가니까 내가 직접 밀지는 못했어요. 동생들이랑 동네 아이들이 밀고 끌면서 동네 한 바퀴를 돌았죠. 방송 프로그램 중에 <동물의 왕국>이라고 알아요? 그걸 보면 미어캣이 수구리고 있다가 허리를 쭈욱 펴고 일어나잖아. 논밭에서 일하던 동네 사람들이 내가 가는 곳마다 미어캣처럼 허리를 쭈욱 펴고 일어났어요. 이쪽 고랑에서 쭈욱 일어나고, 저쪽 고랑에서 쭈욱 일어나고. ‘아이고 누구네 큰아들이 나왔네. 잘했네’ 하면서 나름대로 격려를 해준 것이지.“

- 그럼 휠체어가 생긴 뒤로는 자주 외출했겠네요.

”처음에는 자주 나가고 싶었어요. 주말마다 동생이랑 나왔지. 그런데 나는 눈치가 100단이에요. 안 그런다고 겉으로 말해도 동네 사람들이 나를 불쌍하게, 안타깝게 보는 그런 동정적인 시선들이 느껴지는 거예요. 나는 괜찮아요.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성격이거든. 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마음이 안 좋으시겠어. 그러니까 휠체어가 있어도 잘 안 나가게 됐죠.“

오문영 센터장의 발과 휠체어. 오 센터장은 ‘휠체어는 내 발’이라고 말했다. ⓒ 박시몬
오문영 센터장의 발과 휠체어. 오 센터장은 ‘휠체어는 내 발’이라고 말했다. ⓒ 박시몬

이듬해에는 전동휠체어를 얻었다. 남원 선교회를 통해 알게 된 사람에게 중고로 구매했다. 5.18 광주항쟁 당시 사고를 당한 유공자였다. 걸을 수 없게 된 그는 정부로부터 전동휠체어를 받았다. 전동 휠체어가 귀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는 자가용도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수동 휠체어만으로 충분하다는 그로부터 전동휠체어를 구매했다. 그 해에 아버지가 송아지 한 마리를 판 돈 100만원에 찹쌀을 판 돈 30만원을 보탰다. 전동휠체어는 혼자 탈 수 있었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었다. 누가 밀어주지 않아도 혼자 힘으로 충분했다. “아, 정말, 그보다 더 기쁠 수가 없었어요.”

# 4PM: 미완의 독립 생활

오 센터장은 ‘마당발’이다. 아는 사람이 많다. 장애인 인권 행사에도 자주 불려 다닌다. 사무실에 오 센터장을 찾으러 오는 동료들도 많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외향적인 성격이다. 이야기하는 것을 즐긴다. 햇살아래 직원들도 “센터장님은 이야기꾼”이라고 입을 모은다.

젊은 시절 오문영 센터장(오른쪽)과 막냇동생이 시골집에서 턱을 괴고 웃고 있다. ⓒ 오문영
젊은 시절 오문영 센터장(오른쪽)과 막냇동생이 시골집에서 턱을 괴고 웃고 있다. ⓒ 오문영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오 센터장은 지금처럼 사람들과 어울리며 이야기하는 날을 항상 갈망했다. 어떻게 하면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기회가 1990년 6월에 오 센터장을 찾아왔다. 그의 나이 28살이었다.

- 집을 나와서 사람들과 어울려 산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내일은 푸른하늘> 라디오 방송을 듣는데 전주에서 장애인을 모집한다고 하더라고요. 장애인들한테 숙식을 제공하면서 도장을 새기는 기술을 알려준다는 거예요. 그 당시만 해도 전부 다 인감도장을 사용하던 때였어요. 도장 기술을 배우면 꽤 많이 벌 수 있었어요. 방송에서 알려준 전화번호를 적어뒀다가 전화를 걸었죠. ‘중증 장애의 이런 몸인데 가도 될까요?’ 하니까 수화기 건너편에서 일단 와보라고 하더라고.”

- 거기까지 어떻게 갔어요?

“내 첫 외출을 도와준 선교회의 다른 집사들이 전주까지 데려다줬어요. 그중 한 명은 발달장애인 딸을 가진 비장애인 여성 집사였어요. 내가 집 밖에서 뭔가 해보겠다고 했더니 흔쾌히 도와줬어요. 남원에서 한 시간 조금 넘게 차를 타고 전주에 도착했죠. 그곳에서 5개월 정도 살았지요.”

도착한 곳의 이름은 ‘나그네의 집’. 전주에 있는 가든 형태의 커다란 음식점이었다. 주말에는 환갑잔치 같은 행사가 열리기도 하는 곳이었다. 그곳 사장은 신앙심을 가지고 좋은 일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음식점의 한 공간을 내줬다. 그곳에서 장애인들이 숙식할 수 있게 했다. 약 15명의 장애인이 함께 살았다. 뇌병변 장애인, 지적장애인, 지체장애인, 근육장애인 등 다양한 장애인들이 있었다.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게 됐다. 친구도 여럿 생겼다. 혼자서는 못 끄는 수동 휠체어를 다른 장애인들이 밀어주기도 했다. 낮에는 도장 기술을 배우고, 저녁에는 예배를 드렸다. 때때로 맛있는 음식도 잔뜩 먹었다. 공원에 놀러 가기도 했다. 즐거웠다.

오문영 센터장이 만든 도장들. 오 센터장은 전주에서 도장 새기는 기술을 배웠다. ⓒ 오문영
오문영 센터장이 만든 도장들. 오 센터장은 전주에서 도장 새기는 기술을 배웠다. ⓒ 오문영

도장 조각을 새기는 기술도 배울만 했다. 손목에 힘이 없으니 잘은 못했지만, 왼쪽 팔꿈치를 땅에 대면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뾰족한 조각칼로 도장에 일일이 이름을 새겼다. 나무 도장을 새기는 데에는 3분, 플라스틱 도장은 10~20분 정도 걸렸다. 당시 장애인은 도장 새김, 금은 세공, 시계 조립 같은 일을 주로 했다. 움직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석 달이 지나자 사장이 본심을 드러냈다. 음식점이 있는 지역은 철거구역이었다. 철거반이 오면 장애인들을 방패막이로 쓸 작정이었다. 오 센터장은 겁이 덜컥 났다. 떠나고 싶었다. 함께 살던 두 명은 먼저 떠났다. 처음 이 곳까지 데려다줬던 교회 집사들이 오 센터장을 데리러 왔다. 사장과 이야기를 하더니 조금만 더 있어 보라고 하고 다시 떠났다. 다행히 철거반이 들이닥치진 않았다. 그래도 11월이 되자 너무 추웠다. 이래저래 더 있을 곳이 아니다 싶어 집으로 돌아왔다.

# 5PM: 서울로, 햇살 아래로

오문영 센터장이 햇살아래장애인자립센터 입구 경사로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 박시몬
오문영 센터장이 햇살아래장애인자립센터 입구 경사로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 박시몬

그렇다고 그 생활이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었다. 전주에서 함께 지내며 도장 새김을 했던 친구가 있었다. 이름은 이승영이다. 그 친구가 오 센터장의 삶을 바꿨다.

- 제일 친한 친구는 누구예요?

“유년 시절에 집에만 있었으니까 뚜렷하게 친하다 할 사람은 없어요. 요즘에는 장애인 활동 동료들이 주로 나의 친구들이죠. 그중에서도 나를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올 수 있게 했던 친구, 이승영. 그 친구를 제일 친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 친구를 우리끼리 우스갯소리로 ‘오핵관(오문영 핵심 관계자)’이라고 해요. 그 친구를 전주에서 만났어요. 나를 형이라고 부르면서 잘 따랐어요. 얼마 안 가서 헤어졌는데 연락이 오더라고. 구파발 교회에서 같이 살자고. 그래서 뒤도 안 돌아보고 올라갔지.”

전주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오 센터장은 완전한 독립 생활을 꿈꿨다. 도장 기술을 배웠으니 혼자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가게를 운영할 방도가 없었다. 남원 시내에서 가게를 운영하려면 방을 얻어 혼자 살아야 했다. 활동지원서비스도 없던 시절이었다. 오 센터장은 혼자 살 수 없었다.

현실의 벽에 부딪힌 그는 남원 시골 집에 틀어박혔다. 문을 걸어 잠그고 방 안에만 있었다. 그러던 중 이승영에게 연락이 왔다. 이승영은 서울 사람이었다. 서울 구파발에 있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시설이 있으니 이곳으로 오라고 했다.

“그야말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지요.” 오 센터장은 회상했다. “나는 도대체 이 처절한 외로움과 고독에서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나도 저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뭔가 열심히 일하면서 살 수는 없을까, 하며 얼마나 갈망했는지 몰라요.”

서울로 떠나기 전날, 할머니는 커다란 통에 물을 가득 담아 손자를 깨끗이 씻겨줬다. 씻는 내내 손자를 말렸다. “어떻게 이런 성치 않은 몸으로 서울을 가려 그러냐.” 그래도 오 센터장은 굳건했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싶다는 아들을 부모도 말리지 못했다.

부모님과 오문영 센터장이 지난해 10월 남원 시골집 마당에서 카메라를 향해 미소짓고 있다. ⓒ 오문영
부모님과 오문영 센터장이 지난해 10월 남원 시골집 마당에서 카메라를 향해 미소짓고 있다. ⓒ 오문영

다음 날 오전 11시, 남원 시외버스 터미널에 갔다. 배웅 나온 아버지가 오 센터장을 업어 고속버스 좌석에 앉혔다. 수동 휠체어 한 대, 옷가지를 넣은 보따리 하나도 버스에 실었다. 오 센터장의 주머니에는 7만5000원이 있었다. 할머니와 부모님이 준 꼬깃꼬깃한 지폐였다. 서울 터미널에는 그곳에 사는 동생이 마중 나와 있을 것이었다. 그 동생의 도움으로 구파발 교회까지만 가면, 정말 독립이었다.

아버지는 서울 가는 아들의 얼굴을 지켜보려 하지 않았다. 업어다 앉혀주고는 버스터미널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어머니는 곧 떠날 버스를 붙잡고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했다. 급기야 아들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울먹이며 말했다. “젊은 양반, 서울에 도착허거든, 야 동상이 나와서 기다린다고는 허는디, 혹시 모르니께, 여기, 야 좀 잘 내려주이소.”

어머니는 운전 기사에게도 같은 말을 당부했다. 그제야 버스에서 내려갔다. 어머니가 내리자 버스가 출발했다. 그렇게 남원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1992년 8월 18일, 서른이 되던 해였다. (3회에서 이어집니다.)

※ 3회 <‘우리’의 자립 생활> 편에서는 서울로 상경했던 시절부터 햇살아래장애인자립센터를 설립하던 때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구파발에서 동료 장애인들과 공동체를 꾸리며 살던 오문영은 은평구 뉴타운 개발사업으로 쫓겨나다시피 홍제동으로 이사한다. 이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장애인 자립생활 운동’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서울 서대문 햇살아래 장애인자립센터의 오문영 센터장은 올해 60세다. 생의 절반을 집안에서만 살았다. 그 세월 동안 외출은커녕 대문 밖도 나가지 못했다. 이제 그는 독립해서 산 지 30년이 됐다. 지난 4~5월, 두 달에 걸쳐 일주일에 한 번씩 모두 5번 그를 만났다. 혼자 사는 장애인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살아왔을까. 그의 24시간에 60년의 인생을 담아,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인생의 절반을 방 안에 갇혀 지낸 장애인 [햇살아래, 오문영 ① 마루에 앉아 세상을 구경하다]

홀로, 그리고 함께 서는 장애인 [햇살아래, 오문영 ③ 우리의 자립생활]

 

일러스트: 김은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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