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아래, 오문영 ① 마루에 앉아 세상을 구경하다

서울 서대문 햇살아래 장애인자립센터의 오문영 센터장은 올해 60세다. 생의 절반을 집안에서만 살았다. 그 세월 동안 외출은커녕 대문 밖도 나가지 못했다. 이제 그는 독립해서 산 지 30년이 됐다. 지난 4~5월, 두 달에 걸쳐 일주일에 한 번씩 모두 5번 그를 만났다. 혼자 사는 장애인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살아왔을까. 그의 24시간에 60년의 인생을 담아,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휠체어 타고 떠나온 고향 [햇살아래, 오문영 ② 처음으로 대문 밖을 나서다]

홀로, 그리고 함께 서는 장애인 [햇살아래, 오문영 ③ 우리의 자립생활]

 

오문영 햇살아래장애인자립생활센터 센터장이 사무실 입구 경사로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 박시몬 기자
오문영 햇살아래장애인자립생활센터 센터장이 사무실 입구 경사로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 박시몬

오문영(60) 서울 서대문 햇살아래장애인자립센터(이하 햇살아래) 센터장에겐 특별한 날이 있다. 생일보다 더 중요한 날이다. 1992년 8월 18일. 그날 그는 혼자 서울로 떠나 처음으로 독립했다. 시골집 문을 나서던 시간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오후 4시 30분이었다. 그전까지 20여 년 동안 집에서만 지냈다.

그는 1962년 12월,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났다. 장남이었다. 세 살에 소아마비를 앓았다. 후유증으로 지체 장애를 얻었다. 어릴 땐 집 안에만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도 없다고도 생각했다. 그 시절을 오 센터장은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이라고 기억한다. 20대 중반에야 그 감옥을 떠난 그는 이제 자신을 닮은 장애인들의 독립과 자립을 돕는다. 올해는 오 센터장이 자립한 지 꼭 30년이다.

# 7AM: 시골집, 서울집

오문영 센터장이 생활하는 방이다. 걸을 수 없는 오 센터장이 살기 편하게 살림살이가 낮은 높이로 놓여 있다. ⓒ 신유미 기자
오문영 센터장이 생활하는 방이다. 걸을 수 없는 오 센터장이 살기 편하게 살림살이가 낮은 높이로 놓여 있다. ⓒ 신유미

그의 하루는 아침 7시에 시작된다. 바닥에 펼친 이불은 개지 않는다. 그는 바닥 생활을 한다. 시골에서 오래 생활한 탓이다. 침대보다 바닥이 편하다. 걸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푹신한 침대 위에서는 몸을 가누거나 움직이기 힘들다. 집에서는 팔꿈치로 기어 다닌다. 굽은 왼손에는 굳은살이 배겨 있다. 오랫동안 기어 다닌 흔적이다.

오 센터장은 지어진 지 20년이 넘은 서울 홍제동의 한 아파트에 전세로 산다. 25평 남짓한 집에는 세 개의 방이 있다. 그는 주로 안방에서 생활한다. 나머지 방에는 쓰지 않는 짐들이 놓여 있다. 안방에는 텔레비전, 컴퓨터, 좌식 책상, 좌식 식탁, 작은 냉장고가 일렬로 놓여 있다.

오문영 센터장이 사는 집의 화장실 입구에는 마룻바닥에 쓰이는 목재로 만든 경사로가 있다. ⓒ 신유미 기자
오문영 센터장이 사는 집의 화장실 입구에는 마룻바닥에 쓰이는 목재로 만든 경사로가 있다. ⓒ 신유미
화장실 경사로가 변기와 수평을 이루고 있다. 씻을 땐 오른쪽에 있는 수도꼭지를 사용한다. ⓒ 신유미 기자
화장실 경사로가 변기와 수평을 이루고 있다. 씻을 땐 오른쪽에 있는 수도꼭지를 사용한다. ⓒ 신유미

잠이 깨면 화장실로 향한다. 장애인이 일반 주택이나 아파트에 살기는 힘들다. 곳곳에 문턱이 있어 이동이 힘들다. 세면대나 싱크대의 높낮이도 맞지 않다. 그래서 화장실을 개조했다. 화장실 입구에는 마룻바닥에 쓰이는 목재로 경사로를 만들었다. 경사로 높이는 변기와 수평으로 맞췄다. 변기가 놓인 방향도 살짝 틀었다. 수도꼭지도 화장실 벽면 아래 쪽에 달아놓았다.

손이 닿지 않아 세면대는 이용하지 않는다. 아래쪽에 달아놓은 수도꼭지를 틀어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씻는다. 머리를 감을 때는 왼손을 바닥에 댄다. 장애로 인해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지만, 간단히 씻는 일이 불가능하진 않다. 다만 요즘 들어 화장실까지 기어 다니는 것도 힘들어졌다. 나이가 들어서 그렇다고 오 센터장은 생각한다.

오문영 센터장은 방에 있는 조그마한 좌식 식탁에서 식사한다. 방 안에는 전기밥솥과 가스버너, 작은 냉장고가 있다. ⓒ 신유미 기자
오문영 센터장은 방에 있는 조그마한 좌식 식탁에서 식사한다. 방 안에는 전기밥솥과 가스버너, 작은 냉장고가 있다. ⓒ 신유미

씻고 난 후 아침을 먹는다. 주방에 큰 냉장고가 있지만 이용하지 않는다. 이 냉장고는 활동지원사가 관리한다. 대신 안방에도 작은 냉장고가 하나 있다. 가스버너도 있다.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낸다. 전날 활동 지원사가 넣어둔 것이다. 반찬은 서너 가지다. 계란찜이나 김치류다. 주메뉴는 찌개다. 생선찌개나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이다. 가스버너에 찌개를 데우고, 전기밥솥에서 밥을 반 공기 정도 퍼서 간단하게 상을 차려 먹는다. 식사를 마친 식기류는 식탁에 그대로 둔다. 손에 힘이 없어 싱크대까지 식기를 옮길 수가 없다. 활동지원사가 늦게 오면 설거지거리가 쌓이기도 한다.

그래도 어린 시절 나고 자란 시골집보다는 낫다.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시골집은 초가집이었다. 1970년대 중반에야 지붕에 기와를 올렸다. 방은 두 개였다. 친할머니, 부모님, 그리고 다섯 동생들과 함께 살았다. 동생들마다 두세살씩 차이가 난다. 첫째 동생과는 3살 차이가 나고, 막냇동생과는 12살 차이 난다. 동생들이 많이 태어나 마당에 방을 두 개 더 짓기 전까지, 그가 스무 살이 넘을 때까지, 오 센터장을 포함한 아홉 식구는 방 두 칸짜리 시골집에서 살았다.

오문영 센터장이 살던 전북 남원의 시골집. 왼쪽부터 어머니, 조카들, 오 센터장, 아버지이다. 땅과 마루가 떨어져 있어 오 센터장은 마루 밖으로 나가기 힘들었다고 한다. ⓒ 오문영
오문영 센터장이 살던 전북 남원의 시골집. 왼쪽부터 어머니, 조카들, 오 센터장, 아버지이다. 땅과 마루가 떨어져 있어 오 센터장은 마루 밖으로 나가기 힘들었다고 한다. ⓒ 오문영

- 그 시골집에서 살 때는 어땠나요?

“말 그대로 시골이다 보니까 장애인이 살기에는 힘들었죠.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마루랑 방이 전부였어요. 사투리로는 ‘뚤방’(토방·방에 들어가는 문 앞에다 약간 높고 편평하게 다져 놓은 흙바닥)이라고 하는 게 있어요. 마당에서 마루로 올라가기 전에 계단식으로 흙을 다져놓은 턱 같은 거예요. 턱이 있으니까 마당으로 나갈 수가 없죠. 화장실은 시골이니까 푸세식이었죠. 마당 가운데, 방 하고 떨어져 있었어요. 그래서 화장실을 못 갔죠. 대소변을 받아낸 거지. 요강이나 신문지 같은 거에. 할머니와 부모님이 주로 받아냈지. 동생들도 하고. 아기 때는 화장실에 안고 가는 게 가능하기도 했어요. 크면서 더 이상 그렇게 할 수가 없으니까 그냥 방 안에서 볼일 본 거지.”

- 어떻게 씻었어요?

“할머니가 대야에 물을 떠서 마루에다 올려뒀어요. 그 물로 세수하고 머리를 감았지요. 딱 그 정도였어요. 목욕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큰 대야에다 물을 떠서 할머니가 씻겨줬어요. 부모님보다도 할머니가 주로 해줬어요. 부모님은 밭일하러 가셨어요. 할머니는 집안일을 했어요. 때때로 바깥일을 하기도 했죠. 내 수발을 할머니가 다 들어줬어요.”

- 방 두 개 있는 집에서 아홉 식구가 함께 살았던 거네요. 불편하지 않았나요?

“동생들이 더 태어나면서 마당에 건물을 지어 방을 추가로 두 개 만들긴 했어요. 내가 20대 때예요. 그전에는 방 두 개 있는 집에서 살았죠. 불편하진 않았어요. 시골에서는 원래 그래. 자기 방이 따로 없었어요. 그래도 자식들 잘만 낳았지. 그만큼 옛날이었던 거죠.”

오 센터장에겐 부모님보다 할머니가 더 각별했다. 오 센터장이 서울로 상경하기 전까지 모든 수발을 할머니가 들어주셨다. 할머니는 집을 비우는 일도 힘들어했다. 1~2년에 한 번씩 서울 작은아들 집에 가서 지냈는데, 그때도 얼마 가지 않아 남원 집으로 내려왔다. 오 센터장도 할머니 곁을 좋아했다. 할머니가 서울로 떠나면 울기도 했다. 나중에 할머니는 기력을 잃었다. 할머니가 했던 일을 어머니가 대신 했다. 어머니는 엄하셨다. 눈치가 보였다.

이제 목욕이나 가사를 도와줄 부모님도, 할머니도 없지만, 오 센터장은 혼자 산다. 그 자리를 ‘활동보조사’가 대신한다. 활동보조서비스시간은 월 239시간이다. 주 3회 정도 방문하는 활동지원사는 식사 준비, 설거지, 빨래, 청소 등 주로 가사노동을 돕는다. 목욕은 한 달에 두 번 정도 한다. 중증장애인을 위해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이동목욕서비스가 있다. 목욕 시설이 갖춰져 있는 이동목욕차량을 타고 활동가 두세 명이 아파트 주차장에 오면, 오 센터장은 휠체어를 타고 그 차에 가서 목욕한다.

그는 활동지원서비스가 감사하다. 자신을 위해 생기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활동지원서비스가 없었다면 서울에서 혼자 지내는 일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 10AM: 그늘에 살던 27년

식사를 마친 후에는 잠시 좌식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로 업무를 본다. 왼손은 바닥에 지탱한다. 오른손으로 키보드 자판을 친다. 왼손은 장애로 변형됐다. 평생 왼손으로 몸을 지탱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왼손 연골에 물이 찼다. 얼마 전 병원을 찾았다. 큰 이상은 없다고 했다. 다만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오문영 센터장의 방 앞에 리프트가 있다. 이 리프트를 이용해 휠체어에 오르내린다. ⓒ 신유미 기자
오문영 센터장의 방 앞에 리프트가 있다. 이 리프트를 이용해 휠체어에 오르내린다. ⓒ 신유미

오전 10시, 센터로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선다. 휠체어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안방 문 앞에 있는 ‘방석형 리프트’를 이용한다.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정도의 크기다. 리프트에 앉아 버튼을 누르면 바닥에 있던 리프트가 휠체어 높이까지 올라간다. 그다음 휠체어에 올라탄다. 이 리프트는 약 25년 전 함께 살던 친구들과 함께 직접 주문 제작했다. 휠체어에 앉으면, 왼쪽 손잡이에 걸린 베레모를 쓴다. 휠체어를 타고 움직이는 동안 바람에 날려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질 여력이 없다. 모자는 외출을 위한 필수품이다.

아파트는 복도식이다. 집은 2층,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다. 집에서 사무실까지 거리는 1600m. 지하철 한 정거장 정도 거리다. 집은 홍제역 근처, 사무실은 무악재역 근처다. 멀지 않으니, 굳이 지하철을 이용하지는 않는다. 다만, 비나 눈이 오는 날에는 웬만하면 집 밖에 나가지 않는다. 옷에 눈비가 묻어 불편하고, 길이 미끄러워 더욱 위험하다. 추운 날도 힘들다. 추울 때는 옷을 두껍게 입어야 한다. 가뜩이나 부자유스러운 몸이 더 둔해진다. 그런 날에 꼭 외출해야 한다면, 활동지원사와 동행한다. 센터 직원의 도움을 받아 차를 타고 움직일 때도 있다. 요즘같은 여름은 오히려 낫다. 가볍게 입을 수 있다. 행동 제약도 크게 없다.

오문영 센터장이 서울 홍제동 거리를 지나고 있다. ⓒ 신유미 기자
오문영 센터장이 서울 홍제동 거리를 지나고 있다. ⓒ 신유미

홍제동 보행로는 울퉁불퉁하다. 길의 일부는 패였다. 오래 살았으니 지리는 익숙하다. 이리저리 잘 피해서 다닌다. 그래도 가끔 눈에 들어오지 않는 턱과 홈이 있다. 그래서 전동 휠체어의 속도를 내지 않는다. 속도를 조금 내면 전동 휠체어가 통통 튄다. 엉덩이가 아프다. 전동 휠체어가 망가지기도 한다. 아주 가끔 사람들과 부딪힐 때도 있다. 오 센터장은 반드시 먼저 사과한다. 그럼 상대방도 사과한다. 어떤 사람은 사과하지 않는다. 먼저 부딪혔는데도 그런다. 역으로 역정을 낸다. 그러면 기분이 확 나빠진다. "내가 뭘 잘못했어요?" 따지면, 상대는 대꾸 않고 그냥 가버린다.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 조심하는 한편, 골목길로 지나다니는 오토바이나 자동차도 피해야 한다. 턱과 홈이 나 있는 길 위에서 사람과 자동차를 피해다니며 20~30분 동안 휠체어를 타고 가는 출근길에 대해 오 센터장은 "그래도 다닐만 하다"고 말했다.

햇살아래장애인자립센터 사무실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경사로가 있다. ⓒ 신유미 기자
햇살아래장애인자립센터 사무실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경사로가 있다. ⓒ 신유미

햇살아래 사무실에 들어서는 입구에는 턱이나 계단이 전혀 없다. 대신 휠체어가 쉽게 드나들도록 경사로를 설치했다. 경사로 양쪽에는 직접 심은 꽃들이 있다. 꽃길을 따라 경사로를 지나면 사무실 문이 나온다. 휠체어 높이에 맞춰 낮은 곳에 달린 버튼을 누르면 문이 열린다. 센터에는 장애인 직원과 비장애인 직원이 섞여 있다. 정직원은 모두 13명이다.

오 센터장의 자리는 직원들 사이에 있다. 사무실 책상은 비장애인 기준에 맞춰져 있다. 휠체어를 탄 상태에서 책상 컴퓨터로 업무를 보는 일은 다소 불편하다. 허리가 틀어져서 더 그렇다. 휠체어에 하루종일 앉아있으면 힘들기도 하다. 집에서 업무를 보다가 출근하는 이유다.

햇살아래 센터 사무실 내부. 오문영 센터장의 자리는 직원들 자리 사이에 있다. ⓒ 신유미 기자
햇살아래 센터 사무실 내부. 오문영 센터장의 자리는 직원들 자리 사이에 있다. ⓒ 신유미

물론 작업환경에 맞게 업무공간을 개조하는 방법도 있다. 일부 장애인 자립센터는 장애인 소장을 위한 방을 따로 둔다. 어떤 사람은 업무공간에 평상을 만들어 앉거나 엎드려서 업무를 본다. 오 센터장은 그런 일을 모두 마다했다. 자신의 업무공간을 분리하지 않았고, 특별한 개조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업무공간을 분리하면 혼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집에서도 혼자 있는데 일하러 나와서까지 혼자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애시당초 오 센터장은 혼자 있는 것이 싫다. 어릴 적부터 늘 집에 혼자 있었다. 방과 마루를 오가며 하루종일 혼자 있었던 때를 그는 “그늘에 있었던 시절”이라고 말했다. ‘햇살아래’라는 센터의 이름도 거기에서 비롯했다. 사회, 가족, 심지어 장애인 스스로도 장애인을 그늘에만 두려 한다. 그 그늘을 떠나 따뜻한 햇살 아래로 나와야 한다고, 오 센터장은 생각한다.

- 그럼, 어린 시절에는 집 밖에 나오지 못했나요?

“소아마비에 걸린 세 살 이후로는 대문 밖에 나오지 못했죠. 아까 말했듯이 내가 움직여서 다닐 수 있는 곳은 방과 마루밖에 없었어요. 예전에는 인식 개선도 되어 있지도 않았고, 휠체어도 없었고요. 일단 부모님이 남부끄러우니까 밖에 절대 못 나가게 했어요. 집 안에만 갇혀 살았던 거죠.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할까. 마침 그 시절에 아버지가 내 머리를 바리깡으로 빡빡 깎았어요. 수감 생활 아닌 수감 생활을 했어요.”

- 업혀서도 나간 적이 없나요?

“아주 많이 어렸을 적의 기억이 흐릿하게 있긴 해요. 누군가 나를 포대기에 싸서 업고 대문 밖에 나가곤 했죠. 아기 때죠. 나중에 여섯 살 무렵, 전주의 어느 병원에 갔어요. 부모님이 나를 낫게 해보겠다고 뒤늦게 업고 간 거죠. 이미 허리도 굽고 척추가 휘어진 상태였어. 의사 선생이 척추 교정은 어떻게 해볼 수 있겠는데 걸을 수는 없다고 했어요. 부모님은 ‘어차피 걸을 수 없다는 데 무슨 의미가 있냐’ 해서 아무 치료하지 않고 다시 업고 왔지. 수술해봐야 돈만 들고 걸을 수 없으니까. 그때부터 방 안에다 방치한 거예요.”

아마도 병을 앓기 직전, 검정 고무신을 닦아 마룻가에 놓으며 ”내 신발이야“라고 말했던 기억이 오 센터장에게 있다. 어린 오문영은 그 고무신을 제대로 신지 못했다. 방 안에만 있게 된 후 더이상 신발을 신지 않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방에 갇힌 그는 대문 밖으로 나가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방 안에 있어야 하는 운명이 당연한 줄만 알았다. “이미 장애를 입은 몸, 이렇게 생긴 몸으로 어떻게 나가겠느냐 생각했지요.” 외롭고 고독했다. 동시에 덤덤했다. 받아들여야할 일이라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방과 마루에서만 지냈던 오문영 센터장은 스무살이 넘은 성인이 되어서도 홀로 마릇가에 앉아 하루를 보냈다. ⓒ 일러스트 김은송 기자
어릴 때부터 방과 마루에서만 지냈던 오문영 센터장은 스무살이 넘은 성인이 되어서도 홀로 마릇가에 앉아 하루를 보냈다. ⓒ 김은송

아침이면 동생들이 모두 학교에 갔다. 부모님도 밭일을 나갔다. 할머니와 둘이 집에 남았다. 식구들이 집을 나서면, 오 센터장은 방 문을 활짝 열고 마루로 나왔다. 시골집은 동네 어귀 첫 번째 집이었다. 낮은 담장 너머로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보였다. 마루에 앉아 사람과 세상을 가만히 쳐다보는 모습을 어머니한테 들키면 곤란했다. “뭘 꼴 자랑하려고 나와 있냐”며 어머니는 눈총을 줬다. 어머니가 집에 계시면, 오 센터장은 방 안에 있었다. 외출했던 어머니가 돌아오는 모습이 보여도, 오 센터장은 얼른 방에 들어갔다.

학교는 구경도 못 했다. 세 살 어린 바로 밑 여동생이 국민학교에 들어가면서 덩달아 한글을 깨쳤다. 11살 쯤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동생을 살살 구슬렸다.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알려달라고 했다. 더하기, 곱셈, 주산까지도 그렇게 배웠다. 동생들은 학교에서 선생님을 만난다고 했다. 선생님은 어떤 사람일까, 얼마나 특별한 사람일까, 어린 오문영은 항상 궁금했다.

학교 선생님한테 배운 것을 오빠에게 가르쳐주긴 했어도, 동생들은 친구들에게 오빠를 보여주기 싫어했다. 동생들은 친구들을 집에 잘 데려오지 않았다. 어쩌다 친구가 오면, 오 센터장에게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방에 들어가서 제 친구들과 놀았다.

오문영 센터장이 살던 전라북도 남원의 시골집(왼쪽). 시골집은 동네 어귀 첫 번째 집이었다. ⓒ 오문영
오문영 센터장이 살던 전라북도 남원의 시골집(왼쪽). 시골집은 동네 어귀 첫 번째 집이었다. ⓒ 오문영

열두 살쯤이었다. 6월 중순에서 7월 사이 초여름의 낮이었다. 농사일이 가장 바쁜 농번기였다. 할머니도 일하러 밭에 나가셨다. 집에 혼자 남았다. 여느 때처럼 마루에 앉았다. 바깥을 구경했다. 당시 국민학교에서 학생들을 동원해 마을의 농사 일손을 돕게 했다. 5~6학년 정도의 또래 학생들이 동네 논밭의 보리를 베러 왔다. 오 센터장은 사정을 알 리 없었다. 평소처럼 방문을 활짝 열어뒀다. 일손을 돕던 학생들이 마을에 기웃거렸다. 물 마실 곳을 찾는 중이었다. 마을 입구 첫 번째 집이던 이 집으로 여학생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어느새 열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였다. 오 센터장을 에워쌌다. 어린 오 센터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고개만 푹 숙였다. “야야 이거 몇 학년 몇 반 누구네 집 아니냐”하는 소리도 들렸다. 옆집 할머니가 그 광경을 발견했다. 빗자루로 아이들을 쫓아버렸다. 그 뒤로 한동안 오 센터장은 방문을 꼭 잠그고 마루에 나오지 않았다.

유일한 벗, 라디오

KBS 라디오 프로그램 '내일은 푸른하늘' 홈페이지 사진. 이 프로그램은 1981년부터 지금까지 방송 중이다. ⓒ KBS 홈페이지
KBS 라디오 프로그램 '내일은 푸른하늘' 홈페이지 사진. 이 프로그램은 1981년부터 지금까지 방송 중이다. ⓒ KBS 누리집 갈무리

- 예전 시골집에서는 하루종일 뭐 했어요?

“오늘이 내일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의미 없는 날들을 보냈죠. 참 슬프고 어두운 이야기지. 가만히 앉아서 바깥 구경을 했어요. 어릴 때는 동생들 숙제를 도와주기도 했고. 스무 살 때부터 라디오를 들었어요. 조그마한 고물 라디오가 방에 항상 있었거든. 언제 샀는지 기억은 안 나요. 어렸을 때는 들어도 감흥이 없으니까 안 들었어요. 나이가 좀 차니까 매일 라디오를 들었지. 옛날에는 텔레비전이 없었잖아. 텔레비전 방송도 밤에만 나왔어요. 그러니 라디오가 내 친구였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벗. 음악 방송을 많이 들었어요. 라디오 연속극도 즐겨들었죠. 그러다가 채널을 돌리는데 장애인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그 채널에 멈췄죠. 아나운서가 ‘내일 두 시 반에 또 만나요~’ 하더라고. 다음 날 그 시간을 기다렸어요.”

스무 살이 되던 1981년이다. <내일은 푸른하늘>이라는 KBS 라디오 프로그램이 방송됐다. 처음으로 장애인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방송이었다. 전국에 있는 장애인들 이야기를 들려줬다. 수기를 쓰면 채택해 읽어주기도 했다. 펜팔 연결도 해줬다. 오 센터장도 방송에 수기를 써서 보냈다.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썼다. 장애를 입은 후로 이렇게 혼자 외롭게 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느 날, 진행자가 오 센터장의 사연을 방송에서 읽었다. 오 센터장이 사는 시골집 주소도 또박또박 두 번 정도 불러줬다.

전국 곳곳에서 편지가 왔다. 부산, 대구, 광주, 서울 등등. 하루에 열 몇 통씩 편지가 왔다. 펜팔을 시작했다. 전국의 수많은 사람과 편지를 나눴다. 그 가운데는 교도소 수감자도 있었다. 오 센터장의 일과가 추가됐다. 편지를 기다렸다. 편지가 오면 다시 답장을 보냈다. 십 년 동안 편지를 쓰고 기다리는 일을 반복했다.

편지로 위로를 받았다. 상대를 위로해주기도 했다. 편지는 세상과 소통하는 문이었다. 그 편지 덕분에 전북 남원 시골집의 대문을 떠나게 될 줄은 몰랐다. 방 안에서만 20년 넘게 살았던 오문영은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2회에서 이어집니다)

※ 2회 <처음으로 대문 밖을 나서다> 편에서는 오문영 센터장의 첫 외출 이야기가 이어진다. 우연한 기회에 전북 남원의 시내를 구경한 이후 그는 어떻게 다시 집을 떠나 세상을 구경할 수 있을지 궁리하기 시작한다.

일러스트: 김은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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