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1945 히로시마

1945 히로시마/존 허시 지음/김영희 옮김/책과함께/9900원

저녁식사 자리에서 아빠는 할아버지도 히로시마에 계셨다고 말했다. 엄마와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자폭탄이 터질 때 계신 건 아니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이던 1920년, 할아버지는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계곡은 좁았고 먹을 것이 부족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히로시마로 갔다. 그 돈으로 합천에 논도 사고 밭도 샀다. 할아버지는 1945년이 되기 전에 가족들이 있는 합천으로 돌아왔다. 

살면서 맞닥뜨리는 몇몇 우연과 선택은 인생의 방향을 크게 좌우한다. 같은 정보를 갖고 히로시마로 갔던 먼 친척들은 계속 그 곳에 남아 있었다. 가난이 싫어 당도한 곳엔 재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전쟁은 오래 전 종결된 참혹한 사건이라 생각했다. <1945 히로시마>를 읽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 책에는 피부가 벗겨져 생살이 드러나거나 몸에 유리조각이 박히거나 구역질을 하고 머리가 벗겨지는 피폭자들의 생생한 고통이 기록돼 있다. 상상력은 그림보다 잘 묘사된 글을 만났을 때 빛을 발했다. <1945 히로시마>의 문장에는 영상과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에 관한 기록

▲ <1945 히로시마> 책 표지. ⓒ 책과함께

전쟁이 휩쓸고 간 곳에 존 허시(John Richard Hersey) 기자가 있었다. 1914년에 태어난 그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타임>(Time)의 전쟁기자로 활동했다. <타임앤라이프>(Time and Life)와 <뉴요커>(The New Yorker)에 기사를 기고하기도 했다. 

그가 전쟁 보도의 전설로 남은 것은 오히려 전쟁이 끝난 뒤의 취재 덕분이었다. 존 허시 기자는 종전 직후의 일본을 찾았다. 그 기사를 <뉴요커>가 전재했다. <뉴요커>는 1946년 8월 31일자 전 지면에 광고, 기고, 논설, 기사, 그림 없이 <히로시마>(Hiroshima)라는 제목을 붙인 기사만을 담았다. 잡지 역사상 가장 긴 기사였다. 당일에만 30만 부의 잡지가 팔렸다. 책으로 출간된 이후에는 두 달 만에 300만 부가 팔렸다. 

당시 <히로시마>의 취재 대상과 서술 방식은 획기적이었다. 기존의 전쟁 기사는 군사적 관심을 담았다. 원자폭탄이 어떻게 제작되었으며 투하 작전이 어떻게 실행되었고 이 작전이 냉전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보도했다. 반면, <히로시마>는 실제 히로시마에서 일어난 일과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담았다. 이후 이 기사는 1999년 뉴욕대학교 저널리즘 스쿨이 선정한 ‘20세기 미국 언론보도 100선’ 중 1위를 차지했고, 출판된 책은 <타임>이 선정한 100대 논픽션 도서에 올랐다.

지금은 알지만 그 때는 몰랐던 것

“원자폭탄은 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러나 이 여섯 사람은 살아남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왜 자신들은 살았을까, 그들은 아직도 얼떨떨할 따름이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여러 번의 소소한 우연과 결단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나열한다. 때마침 내디딘 한 걸음, 실내로 들어가기로 한 결정, 다음 전차가 아닌 바로 그 앞 전차에 올라탄 일 등등. 그 생존의 순간에 수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겼고 상상도 못한 죽음의 아비규환을 목격했음을 이제 그들은 안다. 그러나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1945 히로시마> 16쪽)

▲ 미국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존 허시. ⓒ Carl Van Vechten

존 허시 기자는 히로시마에 가고 나서야 비로소 그 참상을 알 수 있었다. <뉴요커>에서 ‘원폭 1년 후’ 특집 기사를 쓰라는 주문을 받은 그는 원폭 투하 다음해인 1946년 3월 일본 히로시마로 향했다. 3개월 간 그곳에 머물며 피폭자들의 삶을 지켜봤다. 전문가나 군인, 정치인이 아닌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만났다. 원폭이 떨어진 날 아침부터 투하 1년 후까지의 삶을 담았다. 그런 그들의 삶을 옴니버스 소설의 형식을 빌려 서술해냈다. 허시 기자는 이러한 형식을 두고 “저널리즘은 독자가 역사를 목격할 수 있도록 하지만, 픽션은 독자가 역사를 살아볼 수 있도록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 히로시마 폭심지에서 490m 떨어진 곳. ⓒ 합천원폭자료관

그가 만난 사람은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 의사 2명, 목사, 독일인 신부, 홀로 아이를 키우는 미망인 등 원폭 생존자 여섯 명이었다. 원자폭탄이 투하하는 순간과 불길이 일어 화재가 난 순간, 원폭에 대한 온갖 소문과 진실이 혼재한 순간, 그럼에도 삶이 지속돼 생명이 피어나는 순간을 기사에 담담하게 적었다. 그들의 시선에 비친 전쟁은 “눈썹이 타서 없는 사람, 얼굴과 손의 피부가 너덜너덜 떨어져 나온 사람, 통증이 너무 심해 물건을 나르는 것처럼 양손을 치켜든 사람, 걸으면서 구토를 하는 사람”이 혼재해 있는 아비규환의 사건이었다.

원폭 투하 40년 후, 다시 그들을 만나다

허시 기자는 40년 후 다시 히로시마를 찾았다. 1985년 6월 15일 <뉴요커>에는 40년 후의 삶을 취재한 후속보도 <히로시마: 그 후>(Hiroshima: The Aftermath)가 실렸고, 한국에 번역 출판된 <1945 히로시마>에도 마지막 장으로 추가됐다. 다시 찾은 그 곳에서 허시 기자는 40년 전 만났던 6명과 재회했다. 그들을 다시 일일이 찾아가 그 동안의 삶을 추적했다. 10년이 지나면 강산도 바뀐다고 했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었을 시간이다. 끔찍했던 전쟁의 기억을 뒤로 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히로시마 원폭의 경험은 어느 방향으로든 그들의 삶에 달라붙은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있었다. 

▲ 옷 무늬가 피부에 눌어붙은 여성. ⓒ 합천원폭자료관

개인 병원을 차려 비교적 잘 살아가고 있는 사사키 데루부미 박사 같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원폭이 터질 때 한쪽 다리를 잃은 사사키 도시코는 연이어 시련을 겪었다. 한 남자를 만나 약혼을 했지만, 약혼자의 집안에서 피폭된 절름발이 여자와의 혼인을 탐탁지 않아했다. 사사키는 결국 수녀원에 들어가 수녀가 됐다. 원폭 투하로부터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엄청난 양의 방사능에 노출된 피폭자들은 깊고 위험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발육 부진을 겪는 아이가 늘었고, 평균보다 머리 둘레가 더 작은 아이들이 태어났다. 이런 질병은 선택적으로 나타났고 대부분의 피폭자들은 일본 사회 내의 차별적 시선을 겪어내야만 했다. 

그리고 77년 후, 그곳에 ‘조선인’이 있었다

“전쟁은 원자폭탄과 소이탄 투하로 일본인들을 희생시켰고, 일본에게 침략당한 중국의 민간인들을 희생시켰으며, 죽을 수도 있고 불구가 될 수도 있는 전쟁에 마지못해 끌려 나온 어린 일본인 병사와 미국인 병사들을 희생시켰다. 그리고 또 일본인 매춘부와 그들이 낳은 혼혈아도 희생시켰다.” (<1945 히로시마> 207쪽)

원폭 투하 40년 후의 삶에서 만난 사사키 도시코가 한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제외된 사람이 있다. 바로 조선인들이다. 그러니 추가돼야 할 문장이 있다. ‘그리고 전쟁은 당시 일본에 있었던 수많은 조선인들도 희생시켰다’라는 문장이다. 그러나 <1945 히로시마>에는 ‘희생된 조선인’에 대한 서술이 없다. 그들은 한 구석의 지면도 차지하지 못했다. 군수 도시였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징용되어 끌려간 수많은 조선인이 있었다. 심진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은 총 74만 명의 원폭 피해자 중 한국인 피해자가 10만 여명이라고 했다. 그 중 대다수의 사람들이 합천 사람이었다. 합천이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리는 이유다.

▲ 경남 합천에 위치한 합천원폭자료관 내부 모습. ⓒ 이주연

올해는 원폭 투하 77주년이다. <1945 히로시마>의 추천사에는 ‘김형률’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원폭 피해 2세대인 그는 조선인 또는 한국인 피폭 피해자 가운데 처음 목소리를 낸 인물이다. 지금도 원폭 피폭자와 그 후손들은 건강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뉜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여전히 아물지 못한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할아버지의 먼 친척 중에는 합천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합천으로 돌아와 보상을 바라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다. 바다 건너 먼 곳의 기자 존 허시는 전쟁의 참상을 ‘사람’ 이야기로 낱낱이 보고하는 기사를 써냈다. 다만 그 참상을 겪은 한국인의 이야기를 담지는 못했다. 그 일은 허시 기자의 저널리즘 정신을 따르려는 한국 기자들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편집: 심미영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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