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 라솜(мир разом), 다함께 평화] ① 이리나가 증언하는 이리나의 죽음

2022년 2월 24일(이하 한국 시각),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각 나라 언론인들은 전쟁 현장에 달려갔다. 실체를 직접 목격해야 진실을 제대로 보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대다수 국내 언론은 외신 번역에 매달리고 있다. <단비뉴스>도 그 현장에 가진 못했다. 다만, 전쟁의 참상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담은 기사를 연재한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크라이나인들을 만나, 그들의 가족·친구·동료가 목격한 전쟁을 기록하고 보도한다. 

기부 캠페인도 시작한다. 자신의 ‘이름’과 ‘휴대전화 뒷번호 8자리’를 송금 메모에 적어, 신한은행 100-034-615484(사단법인 단비)에 기부금을 보내면, 인도적 지원을 위한 특별 모금 활동을 진행 중인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에 전달한다. 기부자의 면면과 전달 과정도 보도할 예정이다. 

<단비뉴스>는 일련의 보도와 연대 행동을 ‘메르 라솜 – 다함께 평화’라고 부르기로 했다. 우크라이나 말로 '메르'(мир, myr)는 '평화', '라솜'(разом, razom)은 '함께'를 뜻한다.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찾아오는 날까지 보도와 행동을 이어가겠다. 연재 기사 및 기부 캠페인과 관련한 제보, 제안, 문의 등은 전자우편 jennsis@naver.com에서 받고 있다. (편집자)

[메르 라솜(мир разом), 다함께 평화] 연재 보기

② 폭격에서 살아남은 우크라이나 중위

③ 정든 고향을 빼앗긴 우크라이나 역사 선생님

④ 드론전의 한복판에서 무기 기다리는 장교

⑤ 목숨 걸고 우크라이나 탈출한 고려인 알미라

⑥ 우크라이나 현장을 취재한 한국인 사진가

 

여기 두 사람의 '이리나 마치쉐브스카'가 있다. 26살의 이리나 마치쉐브스카 씨는 할머니의 이름을 받았다. 아버지가 당신 어머니의 이름을 맏딸에게 붙였다. 같은 이름의 할머니 이리나 마치쉐브스카 씨는 올해 81살이었다. 더 오래 살았을 것이다. 전쟁만 아니었다면. 할머니 이리나 씨는 지난 8일 숨졌다. 러시아 군이 발포한 포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의 죽음을 전해 들은 지 나흘 뒤인 12일 오후, 손녀는 서울 성북구 월곡동의 어느 카페에 앉았다. 그가 일하는 직장 근처였다. 꿈을 좇아 먼 나라에서 공부하고 일하는 손녀를 할머니는 자랑스럽게 여겼다. 불과 몇 달 전, 우크라이나에 찾아가 만난 할머니는 자랑스러운 손녀에게 한국의 여러 일을 물었다. 이제 손녀는 우크라이나의 여러 일을 묻는 한국의 젊은 기자 앞에 앉았다. 세상을 떠난 할머니 이리나 씨를 위해, 세상에 남은 손녀 이리나 씨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 가운데 하나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실체를 낱낱이 힘주어 들려주는 것. 

잿더미 아래 묻힌 우리들의 추억

할머니 이리나 마치쉐브스카 씨는 1941년 당시 소련에 합병돼 있던 우크라이나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엔지니어였던 그는 40년 가까이 소련 정부의 산림청에서 일하다가 60살에 은퇴했다. 퇴직 이후에도 자연에 대한 그의 사랑은 식지 않았다. 앞마당에 감자, 오이, 장미, 재스민, 라즈베리를 길렀다. 정성껏 기른 채소와 과일은 가족과 이웃에게 나눴다. "집 앞마당의 작은 정원을 정말 사랑하셨다"고 손녀 이리나 씨는 할머니의 생전을 회고했다. 

그 정원을 가꾸며 할머니는 인구 6만 명의 작은 도시, 이르핀(Irpin)에 살았다. 아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자녀들이 사는 수도 키이우(Kyiv)에서 서쪽으로 20킬로미터(km)가량 떨어진 곳이다. 자손들의 거처와 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숲과 나무도 무성했다. 자연을 아끼는 할머니가 살기에 좋았다.

러시아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작고 아름다운 도시 이르핀의 의미가 변했다. 러시아 군에게 이르핀은 수도 키이우로 진입하는 길목이었다. 반면, 우크라이나 군에게 이르핀은 수도 방어를 위한 최전선이었다. 우크라이나 군은 이르핀과 다른 지역을 잇는 유일한 경로인 이르핀 강의 다리를 폭파해버렸다. 수도를 지키려는 고육지책이었지만, 이르핀 주민 6만 여 명은 피난할 길을 잃고 고립됐다.

▲ 12일 오후, 서울시 성북구 월곡동의 한 카페에서 <단비뉴스>와 인터뷰하는 이리나 씨. ⓒ 박시몬

한국의 이리나 씨는 매일 고국의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월 24일 이후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수도 키이우에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이르핀에 있는 할머니의 안부를 확인했다. 

3월의 첫 토요일이었던 지난 5일, 영상 10도까지 기온이 올라 봄볕이 따뜻했던 날, 우크라이나에 있는 할머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가족도 할머니의 안부를 알지 못했다. 꼬박 사흘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난 8일 밤 9시, 퇴근한 이리나 씨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이르핀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던 고모였다.

"러시아 군이 마을을 덮쳤어. 할머니가 돌아가셨어.” 

8일 새벽,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향하던 러시아 군은 이르핀을 향해 포탄 공격을 퍼부었다. 민간인들이 사는 마을에도 포탄이 쏟아졌다. 그 포탄으로 할머니의 집이 무너졌다. 전쟁 발발 이후, 할머니는 앞마당의 정원도 제대로 가꾸지 못하고 꼼짝없이 집 안에만 머물고 있었다. 포탄을 맞아 무너진 건물에 할머니가 쓰러졌다.

▲ 러시아 군에게 포격당한 이후인 3월 11일의 이르핀. 상가 건물이 무너지고 길거리에 잔해들이 뒹굴고 있다. ⓒ 연합뉴스

과일과 채소를 나눠 먹던 이웃들이 할머니를 구출하여 병원으로 옮기려 했다. 할머니는 살아 병원에 도착하지 못했다. "병원으로 옮기던 중에 돌아가셨다”고 고모는 전화기 너머에서 이야기했다. 무너진 집을 나온 고모는 다리가 끊어진 강을 크게 돌아 겨우 키이우에 도착했다. 그제야 한국의 이리나 씨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할머니의 시신은 여전히 이르핀에 있다. 병원 영안실에 잠들어 있다. 키이우에 사는 가족들은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그럴 방법이 없다. 이르핀의 병원 영안실에 찾아갈 길은 모두 막혔다. 

▲ 고향의 사진과 지도 등을 보여주고 있는 이리나 씨(오른쪽). ⓒ 박시몬
▲ 수도 키이우(Kyiv)로부터 서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거리에 이르핀(Irpin)이 있다. 이리나 씨의 할머니가 살았던 마을은 이르핀에서 키이우로 가는 다리 인근에 위치해 있다. ⓒ 유제니

할머니가 숨진 과정을 들려주던 이리나 씨는 기자에게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였다. 곰 인형이었다. 할머니의 이름을 받은 손녀가 3살이 되던 무렵, 할머니는 손녀에게 갈색 곰 인형을 선물했다. 손녀 이리나는 세상 무엇보다 그 인형을 아꼈다. 한국에 유학 오던 3년 전에도 소중하게 챙겨 왔다. 작은 방 구석,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곰 인형을 보며 할머니를 생각했다. 예쁜 정원과 비밀스런 지하실을 오가며 어린 시절의 여름방학을 보낸 할머니의 집도 떠올렸다. 

이리나 씨는 또 다른 사진도 보여줬다. 포격 직후의 이르핀을 촬영한 <뉴욕타임스>의 보도 사진이었다. 사진에는 어느 교회가 있었다. 매년 부활절이 되면, 할머니를 따라 찾아갔던 교회였다. 러시아 군은 그 교회도 포격했다. 사진 속의 교회는 콘크리트 잔해로 뒤덮여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할머니, 할머니의 집과 정원,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거닐던 교회까지 무너져버렸다. 

▲ 이리나 씨가 3살 생일 때 할머니로부터 선물로 받은 곰 인형. 지금은 이리나 씨의 서울 자취방 책상에 올려져 있다. ⓒ 이리나 마치쉐브스카

‘사랑해’ 문자 이후 연락 끊긴 가족

이리나 씨는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지난 겨울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코로나 등으로 인해 3년 만에 고국을 찾았다. 한국에서 준비해간 황제 버섯과 인삼을 할머니에게 선물했다. 할머니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할머니는 너무 기뻐하셨다. 손녀가 자랑스럽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이리나 씨는 생각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준 인형이 아직 내 방에 있는데, 작별 인사도 못했는데, 다신 할머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요.” 

전쟁 발발 이후, 이리나 씨가 믿을 수 없는 일은 계속 되고 있다. 러시아의 침공이 시작된 지 이틀 후인 지난 2월 26일 새벽, 이리나 씨는 휴대폰으로 한 통의 메시지를 받았다. 키이우에 사는 부모님과 여동생들이 보낸 문자였다. '러시아 군이 도시를 공격하고 있어. 우리는 대피소에 갈 것 같아. 사랑해.' 그 뒤로 한 시간 동안, 키이우의 가족들과 연락이 끊겼다.

“지금껏 가장 괴로운 한 시간이었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거든요.” 

▲ 왼쪽부터 이리나 씨의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어린 시절의 이리나 ⓒ 이리나 마치쉐브스카

그날 이후, 이리나 씨는 매일 키이우의 가족과 통화했다. 인터뷰하던 13일에도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아버지와 영상으로 통화했다. 아버지 곁에서 여동생 셋이 나란히 웃으며 인사했다. 각각 20살, 18살, 9살이다. 휴대폰 영상 너머의 가족들은 키이우를 떠나 피난길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 알렉산더 마치쉐브스카 씨는 또 다른 일도 준비하고 있었다. 아내와 자녀를 국경 너머로 대피시킨 뒤, 자신은 키이우로 돌아와 '시민 향토방위군'(Territorial Defense Forces)에 입대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시민 향토방위군은 자원입대한 우크라이나 시민들로 구성된 군대다. 아버지는 올해 56살이다. 가족들은 그를 걱정하면서도 그 뜻에 따르기로 했다. “나이가 많아 입대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결심한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이리나 씨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버지를 전선에 보내는 맏딸의 심정을 기자가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키이우에 남겠다는 아버지 곁에는 이제 반려묘 두 마리만 남을 예정이다. 아버지가 이리나 씨에게 보낸 고국의 사진 가운데는 그 반려묘를 찍은 것도 있었다. 이리나 씨는 사진 속 고양이 두 마리를 한참 쳐다보았다. 

▲ 이리나 씨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있는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하고 있다. ⓒ 박시몬

고향으로 돌아가 국가 재건 도울 것

이리나 씨는 현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바이오-메디컬 융합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3년째 서울에 살고 있고, 어떤 음식에도 김치를 곁들여 먹는다. 

할머니의 사망 소식을 들은 지난 8일 밤부터 그는 이불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충격에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음날이 한국의 대통령 선거일이라 출근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루 종일 침대에서 울었어요. 우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기 싫었어요.” 

그러다 이리나 씨는 이불을 박찼다. “나도 아버지처럼 할머니를 위해,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위해 지금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이리나 씨는 그 날의 결심을 말했다. 

▲ 12일 오후 1시, 주한 러시아 대사관 인근 정동제일교회 앞에서 진행된 러시아 규탄 집회에서 피켓을 들고 서있는 이리나 씨. ⓒ 서현재

러시아를 규탄하는 재한 우크라이나인 커뮤니티의 평화 촉구 반전 집회는 지난 5일부터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걸쳐, 주한 러시아 대사관이 있는 서울 정동제일교회 앞에서 열리고 있다. 이리나 씨도 매 주말마다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그의 행동은 미래를 향해 뻗어 있다. 세계 곳곳을 다니며 살고 싶다는 막연하고도 낭만적인 꿈은 접었다. 대신 학위를 취득하자마자 우크라이나로 돌아갈 생각이다. 

“지금 많은 국가가 발 벗고 나서 우크라이나를 돕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요. 전쟁이 끝나도, 나라를 복구하려면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땀과 자원이 아주 많이 필요하게 될 거예요. 그때 내 전공을 살려 국가 재건에 힘쓸 겁니다.”

▲ 직접 만든 포스터를 들고 행진을 하고 있는 이리나 씨. ⓒ 유제니

시민 향토방위군 입대하는 56살 아버지

이 기사를 마무리하던 19일, 이리나 씨와 다시 전화로 인터뷰했다. 이리나 씨는 가족의 근황을 알려줬다. 처음 만나 인터뷰 했던 12일, 키이우에 있던 가족은 폴란드 국경과 맞닿은 도시 리비우로 대피했다. 그 곳에서 일주일 정도 머문 그들은 19일 국경을 넘어 폴란드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폴란드의 도시 프셰미실로 향하는 기차였다. 다만 그 곳에 도착한 뒤의 일은 기약할 수 없다고 이리나 씨는 말했다.

“폴란드 정부는 더 이상 난민을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렸어요. 이제 가족들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금으로선 전혀 알 수 없어요.” 

전화기 너머의 이리나 씨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 기차에 아버지는 올라타지 않았다고 이리나 씨는 말했다. 81살의 어머니를 러시아 군의 포탄에 잃은 56살의 알렉산더 마치쉐브스카 씨는 키이우에서 시민 향토방위군 입대를 기다리고 있다. 


편집: 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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