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 라솜(мир разом), 다함께 평화] ③ 바실이 전하는 점령된 도시 이야기

지난 11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Volodymyr Zelensky)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한국 국회에서 화상 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에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의 민족, 문화, 언어를 없애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역사·언어 교사를 찾아내 학살하고 있다고 말했다.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학생들에게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를 <단비뉴스>가 취재했다. 23살의 그는 이름과 은신 지역이 드러나 러시아 군의 표적이 될 것을 염려했다. 이에 따라 이 기사는 그의 이름을 가명으로 적었다. 은신하고 있는 도시는 A시라고 적었다.

23살의 바실 부라소프(Vasil Buravtsov) 씨는 A시로 옮기기 전까지 헤르손(Kherson City) 시에서 지냈다. 도시의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쳤다. 러시아군이 헤르손을 점령한 이후, 정상적인 학교 수업은 불가능해졌다. 그래도 바실 씨는 수업을 접지 않았다. 러시아 군의 감시를 피해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단비뉴스>는 줌(ZOOM) 화상 회의 서비스와 온라인 메시지를 이용해 지난 4월 2일부터 4차례에 걸쳐 바실 씨와 인터뷰했다.

헤르손주(Kherson Oblast)는 우크라이나 남부와 흑해 연안에 위치한 인구 112만 명의 주(州)다.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농업지역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서 생산된 농작물은 우크라이나 전역으로 보내진다. 헤르손 시는 헤르손주의 주도(主都)이다. 우크라이나 남동부 흑해 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다. 인구 30만 명의 작은 도시지만 위로는 드니프로강과 아래로는 흑해 사이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다. 지난 3월 5일, 헤르손은 러시아 군에 점령당했다. 바실 씨의 대피 생활 10여 일 만이었다.

▲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1일 오후 국회에서 화상연설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1일 오후 국회에서 화상연설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급박했던 열흘간의 대피생활

그보다 앞선 2월 24일 새벽 5시, 바실 씨는 머리맡 스마트폰 벨 소리에 눈을 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친구의 전화였다. 철없는 장난이라는 생각에 다시 잠을 청했다. 그때 스마트폰 화면에 전쟁 속보가 떴다. 전쟁은 사실이었다. 그는 아파트 이웃들과 황급히 지하 대피소로 몸을 숨겼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대학 동기와 아파트 주인 가족 등 총 10명이 지하실로 대피했다. 그는 베개, 이불, 의자를 챙겼다. 지하실은 어둡고 추웠다. 가져온 이불과 담요로 몸을 감쌌다. 함께 내려온 이웃들과 일부러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는 가족에게 자주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스마트폰으로는 계속 속보를 확인했다. 갑작스럽게 밖에서 공습경보와 총소리가 들렸다. 공습경보가 울리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조심스럽게 윗 층에 올라가 빵, 감자, 과일, 통조림을 가져왔다. 주변을 살펴 아파트 근방의 거리로 나가보기도 했다.

전쟁 초기부터 러시아군은 헤르손 시를 포격했다. 시민들이 즐겨 찾던 파브리카 백화점과 헤르손 중앙시장이 공습으로 폐허가 됐다. 3월 5일에는 헤르손 시내에서도 총성이 울렸다. 러시아군이 도시를 점령한 것이다. 무장한 러시아 군인들이 시청을 둘러쌌다. 군인들 주변에는 탱크와 군용차들이 버티고 있었다.

▲ 전쟁 발발 직후 바실 씨는 아파트 주민들과 지하 대피소로 피난했다. ⓒ 바실 부라소프
▲ 전쟁 발발 직후 바실 씨는 아파트 주민들과 지하 대피소로 피난했다. ⓒ 바실 부라소프
▲ 헤르손 중앙시장이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전소됐다. ⓒ 바실 부라소프
▲ 헤르손 중앙시장이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전소됐다. ⓒ 바실 부라소프
▲ 헤르손 시민들이 많이 찾는 파브리카 백화점이 러시아 군의 공격으로 폐허가 됐다. ⓒ 바실 부라소프
▲ 헤르손 시민들이 많이 찾는 파브리카 백화점이 러시아 군의 공격으로 폐허가 됐다. ⓒ 바실 부라소프
▲ 러시아 군의 폭격으로 가전제품점이 파괴됐다. ⓒ 바실 부라소프
▲ 러시아 군의 폭격으로 가전제품점이 파괴됐다. ⓒ 바실 부라소프
▲ 러시아 군의 총격으로 헤르손 거리에 탄피가 떨어졌다. ⓒ 바실 부라소프
▲ 러시아 군의 총격으로 헤르손 거리에 탄피가 떨어졌다. ⓒ 바실 부라소프

헤르손 광장으로 나간 역사교사

시청 앞 헤르손 광장도 러시아군에 포위됐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무장한 군인에 의해 점령당한 시민들이 집회를 열었다. 러시아 군이 헤르손 시를 점령했던 바로 그 날 오후 3시, 헤르손 시민들이 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시민들은 페이스북과 문자메시지를 이용해 서로 연락했다. 바실 씨도 우크라이나 국기를 몸에 두르고 광장으로 나갔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우크라이나 국기를 들고 광장에 모였다. 시위대는 완전무장한 러시아군 앞에서 우크라이나 국가와 구호를 외쳤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점령군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바실 씨는 인터뷰에서 설명했다.

▲ 3월 5일 오후, 바실 부라소프 씨가 헤르손 광장 시위에 참가했다. ⓒ 바실 부라소프
▲ 3월 5일 오후, 바실 부라소프 씨가 헤르손 광장 시위에 참가했다. ⓒ 바실 부라소프

헤르손을 점령하려는 진짜 이유

러시아군이 서둘러 헤르손을 점령한 것에는 전략적 이유가 있다. 헤르손 주에는 북크리미아 운하(Northern Crimean Canal)가 있다. 이 운하는 드니프로강의 물을 크리미아의 동쪽 끝에 위치한 항구도시 케르치(Kerch)까지 전달한다. 운하의 총 길이는 402.6km로 최대폭은 60m이고 깊이는 6~13m이다. 이 운하는 크리미아 반도(Crimea Peninsula) 전체에 물을 공급하는 원천이었다. 그런데 2014년 러시아가 크리미아를 점령한 뒤, 우크라이나는 모래주머니를 쌓아 운하의 수량을 줄였다. 러시아 점령지인 크리미아는 이때부터 고질적인 물 부족에 시달렸다. 헤르손을 점령한 뒤, 러시아 군은 가장 먼저 운하부터 복구했다.

도시를 점령한 러시아 군이 헤르손 시민들에게 ‘외형적으로’ 온건한 태도를 취하는 것에도 이런 이유가 있다고 바실 씨는 설명했다. 점령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부차(Bucha), 마리우폴(Mariupol)에서 러시아군이 저지른 집단 학살이 헤르손에서는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대신 러시아군은 시민들을 회유하고 있다. 크리미아 반도에 물을 공급하는 헤르손을 자국의 영토로 완전히 편입시키려는 속셈이 그 뒤에 깔려 있다. “도네츠크(Donetsk), 루간스크(Lugansk)처럼 헤르손을 러시아의 위성 공화국으로 만들려는 것”이라고 바실 씨는 말했다.

점령 초기부터 러시아군은 중부의 빈니차(Vinnytsia)를 통해 들어왔던 서방의 인도적 물품 공급로를 차단했다. 대신 자신들의 식량을 시민들에게 나눠주려고 했다. 그조차도 우크라이나 식료품점에서 약탈한 것이었다. 헤르손 시민들은 러시아 군의 구호 물품을 받지 않았다. ‘순순히 위성 공화국이 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시민들의 저항이었다.

현재 유튜브에는 헤르손 시민들이 러시아 군의 물품을 배급받는 영상이 나돌고 있다. “그 영상은 프로파간다”라고 바실 씨는 말했다. 러시아 군이 크리미아 지역에서 친러시아 사람들을 데려와 우호적으로 지내는 듯한 연극을 연출했다는 것이다.

▲ 우크라이나 남부에 위치한 항구도시 헤르손 ⓒ 김은송
▲ 우크라이나 남부에 위치한 항구도시 헤르손 ⓒ 김은송
▲ 북크리미아 운하는 크리미아 240만 주민이 사용하는 물의 85%를 공급한다. ⓒ 김은송
▲ 북크리미아 운하는 크리미아 240만 주민이 사용하는 물의 85%를 공급한다. ⓒ 김은송

새내기 역사교사에게 찾아온 비극

그렇다고 점령군이 유화 정책만 펴는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 군이 점령지역에서 역사교육을 방해한다고 바실 씨는 말했다. 우크라이나 역사책이 발견되면 파기하고, 그런 소지품을 갖고 있는 사람을 연행한다는 것이다. 러시아 군이 점령지의 교사들에게 우크라이나어가 아닌 러시아어로 학생들을 가르치라고 강요한다고 바실 씨는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한국 국회에서 연설했던 내용처럼, 러시아군이 역사·언어 교사를 살해한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다. 바실 씨가 신변의 위협을 느낀 것은 그때부터였다.

바실 씨는 어릴 때부터 역사를 좋아했고, 헤르손 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했으며, 지난해 9월 헤르손 시의 초중고 통합학교에 역사 교사로 부임했다. 전쟁이 발발한 지난 2월 말은 새내기 역사교사가 맞은 두 번째 학기였다.

처음에는 온라인으로 학생들을 만났다. 많은 학생이 가족과 함께 헤르손을 떠났지만, 남아있는 학생들을 모아 주 3회 수업을 진행했다. 직접 만날 수 없으니, 구글미트(Google meets)를 이용해 온라인으로 인사했다. 화면으로 만나는 학생들의 표정이 어둡고 슬퍼서 바실 씨의 마음도 무거웠다.

최근에는 온라인 수업을 열지 못했다. 바실 씨는 헤르손에서 80km 떨어진 A시로 피신해 있다. 역사 교사인 그를 잡으러 러시아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학생들의 안부를 확인하고 있다. A시의 통신 상태가 좋지 못해 인터넷 연결은 힘들지만, 매일 학생들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하면서 전쟁과 관련한 이야기는 일부러 피하고 있다. 학생들을 안정시키려고, 바실 선생님은 밝고 긍정적인 이야기만 건네고 있다. 상황이 조금만 나아지면, 다시 온라인으로 역사 수업을 하게 될 거라고 학생들에게 말해주고 있다.

▲ 전운이 감돌던 2월 중순 한 학생이 교실 칠판에 '우크라이나군은 나에게 용기이고 힘이다'라는 문장을 적고 있다. 학생들 옆에 바실 씨가 서있다. ⓒ 바실 부라소프
▲ 전운이 감돌던 2월 중순 한 학생이 교실 칠판에 '우크라이나군은 나에게 용기이고 힘이다'라는 문장을 적고 있다. 학생들 옆에 바실 씨가 서있다. ⓒ 바실 부라소프

2022년 2월 24일(이하 한국 시각),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각 나라 언론인들은 전쟁 현장에 달려갔다. 실체를 직접 목격해야 진실을 제대로 보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대다수 국내 언론은 외신 번역에 매달리고 있다. 몇몇 언론이 한국 외교부의 허가를 받아 2~3일 정도 현지를 살펴 보도했지만, 전쟁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단비뉴스>도 그 현장에 가진 못했다. 다만, 다양한 방식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을 직접 접촉하여 그들과 그 가족·친구·동료가 목격한 전쟁을 기록하고 보도한다.

기부 캠페인도 시작한다. 자신의 ‘이름’과 ‘휴대전화 뒷번호 8자리’를 송금 메모에 적어, 신한은행 100-034-615484(사단법인 단비)에 기부금을 보내면, 인도적 지원을 위한 특별 모금 활동을 진행 중인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에 전달한다. 기부자의 면면과 전달 과정도 보도할 예정이다.

<단비뉴스>는 일련의 보도와 연대 행동을 ‘메르 라솜 – 다함께 평화’라고 부르기로 했다. 우크라이나 말로 '메르'(мир, myr)는 '평화', '라솜'(разом, razom)은 '함께'를 뜻한다.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찾아오는 날까지 보도와 행동을 이어가겠다. 연재 기사 및 기부 캠페인과 관련한 제보, 제안, 문의 등은 전자우편 jennsis@naver.com에서 받고 있다. (편집자)

[메르 라솜(мир разом), 다함께 평화] 연재 보기

① 포탄에 숨진 할머니, 입대하는 아버지

② 폭격에서 살아남은 우크라이나 중위

④ 드론전의 한복판에서 무기 기다리는 장교

⑤ 목숨 걸고 우크라이나 탈출한 고려인 알미라

⑥ 우크라이나 현장을 취재한 한국인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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