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그녀가 말했다

그녀가 말했다/조디 캔터, 메건 투히/책읽는수요일/16000원 

▲ <그녀가 말했다> 책 표지. ⓒ 책읽는수요일

2017년 10월 5일 할리우드 영화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타인(Harvey Weinstein)의 성추문을 폭로하는 기사가 세상에 나왔다. ‘할리우드 거물의 위계적 성범죄 자취’(Sexual Misconduct Claims Trail a Hollywood Mogul)라는 제목이었다. 그 후 한 달 동안 21편의 후속 보도가 이어졌다. 둑이 무너지듯 전 세계 수백만 여성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들은 성적 학대 경험을 말했다. 소셜미디어에 ‘#MeToo’가 언급된 게시글 수천만 건이 올라왔다. 그렇게 2017년 ‘미투운동’은 시작됐다. 미투운동은 성폭행이나 성희롱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고발하는 사회 운동이다.

와인스타인의 성추문을 폭로한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의 조디 캔터(Jodi Kantor)와 메건 투히(Megan Twohey) 기자는 이 보도로 2018년 퓰리처상의 ‘공공서비스 부문’(Public Service)을 수상했다. 퓰리처상 선정 위원회는 ‘취재원을 세심하게 보호하면서 기사화를 설득하고, 보도를 막으려는 가해자 측의 압박에 대응하며, 전 세계적인 미투운동의 계기가 된 기사’라고 평가했다. <그녀가 말했다>(SHE SAID)는 캔터와 투히가 몇 년에 걸친 탐사보도를 성공시키기 위해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보여주는 취재기다.

‘특정성’이 만들어 낸 반향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을 <뉴욕타임스>가 처음으로 보도한 것은 아니었다. 2015년 잡지 <버라이어티>(Variety)는 와인스타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의 성추문 사건을 보도했다. 그러나 기사는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다른 피해자들 가운데 누구도 추가로 증언하지 않았다. 피해자의 용기 있는 진술에도 불구하고, 진술을 뒷받침할 증거도 없는 일방적 이야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이름도 익명으로 보도됐다. 그 결과 와인스타인이 아닌 피해자가 주목받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조디 캔터는 이러한 문제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문제를 방지하기 위한 해결책이 필요했다. 저널리즘의 영향력은 ‘특정성’에서 나온다. 구체적인 이름, 날짜, 증거, 그리고 패턴이 필요하다. 여기서 ‘패턴’이란 구조적이고 반복적인 행위를 뜻한다. <뉴욕타임스> 기사는 가해자 개개인을 넘어, 성폭력을 이토록 만연하게 하는 동시에 해결하기 어렵게 하는 구조적 요소를 짚어냈다. 와인스타인이 반복적으로 저지른 행위의 구체적 양상을 일일이 확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취재가 쉬웠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뉴욕타임스>의 하비 와인스타인 취재는 가장 기대했던 취재원이 전화통화를 거부하면서 시작됐다. 조디 캔터와 메건 투히 같은 베테랑 기자들도 피해자의 입을 여는 데 애를 먹었다. 캔터 기자는 2013년부터 기업에서 여성들이 겪는 차별을 조사한 바 있다. 투히 기자 역시 도널드 트럼프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에 관한 기사를 썼다. 그러나 처음 몇 달 동안 취재는 난항을 겪었다. 

피해자들은 문제 제기를 두려워했다. 자신들이 입을 열어도 세상이 달라질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캔터 기자와 투히 기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여성의 경험을 기록하고, 권력의 역학을 밝히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다는 말로 취재원을 설득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끈질기게 설득해야만 했다.

“제가 과거에 당신이 겪었던 일을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가 당신의 경험을 통해 함께 다른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사건에서 피해자가 썼던 합의 계약서는 와인스타인이 위법행위를 어떻게 은폐했는가를 알려주는 증거였다. 와인스타인은 문제를 제기하는 피해자에게 거액의 합의금을 줬다. 대신 이 일을 다른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는 조항이 포함된 합의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캔터 기자는 대다수의 피해자가 이와 같은 패턴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성폭력 사실을 와인스타인이 부정할지라도, 문서로 존재하는 ‘성폭력 사건 무마의 합의서’는 부정할 수 없는 물증이었다. 그래서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첫 기사의 헤드라인은 이랬다. “하비 와인스타인이 수십 년간 성폭력 고발자들에게 합의금을 지불했다.” 분명한 증거로 확인된 반복된 행위를 적시하여 보도한 것이다. 

▲ 2018년 퓰리처상 ‘공공서비스 부문’을 수상한 조디 캔터와 메건 투히를 포함한 취재팀. ⓒ 퓰리처상 누리집

세상을 바꾸는 힘
기사는 와인스타인이 애용하던 호텔에서 벌어진 세 가지 사건을 차근차근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기자들은 최소 8건의 합의, 그리고 1990년부터 2015년까지 이어진 성폭력 혐의를 보도했다. 와인스타인이 운영한 영화제작사 ‘미라맥스’의 직원 수십 명은 그의 부적절한 행위를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 직접 맞선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기사는 문제를 제기한 여성들이 이런 시스템 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했다고 설명한다. 

와인스타인의 성폭력을 고발한 이 보도는 저널리즘의 진정한 힘을 보여준다. <뉴욕타임스>가 아니었다면 권력형 성범죄는 공공연히 반복되었을 것이다. 이 보도가 있었기에 와인스타인은 징역 2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미투운동이 등장했다. 첫 기사가 보도된 뒤, 똑같은 일을 겪었다는 미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여성들이 등장했다. 뒤이어 사회 각계각층의 여성들이 비슷한 피해를 증언했고, 마침내 전 세계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2018년 1월 29일 서지현 검사가 JTBC <뉴스룸>에 출연해 검사장이었던 안태근의 성폭력을 폭로하면서 한국에서도 미투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저널리즘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은 과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2017년 10월 5일 세상에 나타난 기사 하나가 기사를 읽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꾼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생각을 바꾼 사람들이 마침내 세상을 바꿨다.


편집: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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