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굿바이, 편집장

굿바이, 편집장/고경태/한겨레출판/2만원

▲ <굿바이, 편집장> 책 표지 ⓒ 한겨레출판

“편집자에서 동그라미 하나 그리면 편집장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편집장을 이렇게 정의한다. ‘편집하는 사람들의 우두머리로서 편집 업무 전체를 관할하는 사람.’ 동그라미 하나의 차이는 무섭다. 편집장은 우두머리다. 취재에서 사진까지 최종결정권을 쥔 두목이라는 뜻이다. 끝없이 결정하고 승인한다.” (<굿바이, 편집장>, 17쪽)

먼지 가득한 종이 냄새를 맡으며 신문을 만들어 본 적 있다. 대학생 때였다. 학보사에 들어가 취재를 하고 기사를 썼다. 재미를 느낄 때쯤 편집국장이 됐다. 편집국장이 하는 일은 꽤 많았다. 학보에 있는 모든 기사를 신경 써야 했다. 제목부터 디자인, 기사 마감, 취재 과정에서 발생하는 마찰까지. 순간마다 판단을 내리고 결정을 해야 했다. 언론사도 아닌 대학교에서 8면짜리 학보 하나 만드는 데 쉬운 일이 없었다. 편집장의 뚝심이 매체 스타일을 좌우한다고 느꼈다.

책 <굿바이, 편집장>의 저자 고경태 편집장은 본인만의 철학으로 편집장 역할을 뚝심 있게 해냈다. 그는 <한겨레21> 창간팀 막내 멤버로 들어와 30여 년을 기자로, 그중 10년을 편집장으로 살아온 ‘콘텐츠 리더’다. 아이템 선정부터 보도까지, 편집장의 손길이 닿는 모든 곳에서 일어난 일이 이 책에 담겨있다. 그의 판단과 결정에 얽힌 이야기를 읽으며 편집장의 시선을 배울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개인 에세이인 동시에 편집장 매뉴얼이다.

기존 뉴스 문법에 질린 편집장

고경태 편집장은 변화를 만들어 내는데 신중을 기하면서도 과감하다. 2011년 <한겨레> 토요판 창간 편집장을 맡은 그는 본인의 철학을 고수하며 새로운 시도를 했다. 당시 <한겨레> 토요일자는 평일판에 비해 구독률이 낮았다.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 맞춰 지면을 개편할 필요도 있었다. 토요판 창간 준비를 맡은 그는 15개 면의 스트레이트 지면을 4개 면으로 대폭 줄이는 개편안을 내놓았다. 대신, 그 자리를 기획과 사진 등 읽을거리로 가득 채울 계획이었다. 스트레이트 뉴스를 중시하는 관성에서 벗어나 피처 뉴스 위주로 전환하는 시도였다.

신문사 내부 구성원들은 어색함을 느꼈다. 토요일자 신문이라도 스트레이트 뉴스에 지면을 더 할애해야 한다며 걱정했다. 더구나 토요판을 준비하던 2012년은 대선의 해였다. 정치 분야의 이슈가 많아질 시기였다. 고경태 편집장은 이들의 의견을 충분히 숙고하면서도 자신의 철학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인터넷과 모바일로 뉴스를 보는 시대에 토요일만이라도 ‘속보’에 덜 집착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대신 ‘단독’을 노렸다. 남들보다 한두 시간 먼저 쓰는 것을 자랑하는 ‘시간차 단독’이 아니라, ‘진짜 단독’을 앞세우려 했다. 다른 언론사에서 한 번도 다루지 않은 인물, 그러면서도 대중이 궁금해할 인물을 인터뷰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읽을거리가 많으면서도 묵직하다는 평을 들었다. <한겨레> 토요판이 성공적으로 출범하자, 다른 신문사들도 앞다퉈 토요판을 내놓았다. 

고경태 편집장은 이후에도 본인의 뉴스 철학을 밀고 나갔다. 2012년 3월 토요판 커버스토리 ‘제돌이의 운명’ 기사가 대표적이다. 제돌이는 제주도에서 온 돌고래다. 한 수족관 업자에 의해 제주 앞바다에서 불법 포획됐다. 재판 결과에 따라 방사 여부가 결정될 예정이었다. 고경태 편집장은 이 재판이 한국동물복지운동의 발전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남종영 기자가 작성한 제돌이 기사를 1면 커버스토리로 다루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정치적 현안은 ‘청와대 행정관의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이었다. 어느 것을 커버스토리로 다룰지 논란이 일었다. 시의성 있는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을 다루는 게 더 적절하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고 편집장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사안을 과감히 먼저 보도하는 것도 뉴스의 역할이라고 반박했다.

▲ 2012년 3월 3일 자 <한겨레> 토요판 1면. 제돌이를 커버스토리로 다루는 걸 두고 치열한 논의가 오간 걸 알 수 있다. 오른쪽을 보면 제돌이 기사가 옆으로 밀려나 있다. ⓒ 한겨레

제돌이는 결국 1면 커버스토리로 다뤄졌다. 그리고 1년 4개월 뒤, 바다로 돌아갔다. 기사를 읽은 고 박원순 시장이 제돌이를 바다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고경태 편집장도 예측하지 못한 해피엔딩이었다. 그는 훗날 제돌이 보도를 이렇게 평했다.

“제돌이 보도는 ‘그깟 돌고래’의 ‘잉여 읽을거리’가 아니라 인권 존중으로 확장하는 기초적 동물권에 대한 의미심장한 담론이었다. 제돌이를 바다로 탈출시킴으로써 기어이 성공한 드라마를 완성해냈다. 제돌이는 동물과 인간을 기계로 여기는 세상에 구멍을 낸 동물이 되었다. 또 어떤 동물이 구멍을 낼 것인가. 또 어떤 언론이 이런 보도에 앞장설 것인가.” (<굿바이, 편집장>, 100쪽)

<한겨레> 토요판은 지금도 동물권 보도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달 19일에는 퇴역 경주마 문제를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 촬영 중 밧줄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진 ‘까미’ 이야기에서 이어진 보도다.

재미를 신봉한 편집장

고경태 편집장이 본인의 결정을 밀고 나갈 수 있던 건, 콘텐츠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다. 그는 30년간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재미’를 뉴스 기획의 핵심 기준으로 삼았다. 언론이 사회 정의를 말할 때도 재미있게 전달해야 효과적이라 믿었다. 그에게 재미란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참신한 접근과 새로운 팩트가 만날 때 재미가 탄생한다고 믿었다.

고경태 편집장이라고 기획이 늘 재밌는 일거리는 아니었다. 새로움을 탐색하는 일이 ‘귀찮은 일거리’인 적도 있었다. 그럴 때 그는 옛날 신문이나 전문지를 읽었다. 때로는 목적 없이 멍을 때렸다. 쓸데없는 생각, 유치한 생각을 마구 던지기도 했다. 일단 던지고, 해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이단적인 행동을 해보라고 제언한다. 발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기자들에게 고 편집장이 직접 꼽은 재밌는 기획 두 가지를 소개한다.

<파이 찌우 짝 니엠(2016.03.05.)>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관련 기사다. 베트남전 50주년을 맞아 한국 정부가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를 수용하고 사과와 배상에 돌입하는 단계였다. 박기용 기자가 베트남 중부에 있는 민간인 학살 지역을 평화기행단 일원으로 참여해 취재했다. ‘파이 찌우 짝 니엠’은 베트남 말로 ‘책임져라’는 뜻이다. 고경태 편집장은 생경한 외국어 제목과 학살 생존자의 표정이 많은 흥미를 끌어낸 기사라 평했다.

▲ '파이 찌우 짝 니엠' 1면 커버스토리. ⓒ 굿바이편집장

<나는 김정은이다(2016.01.30.)> 북한의 핵실험 뒤에 숨겨진 의도가 무엇인지 상상력을 발휘해 분석한 기사다. 미사일 기술 수준, 국제사회의 대응, 향후 남-북-미 관계 등 패턴이 똑같은 기사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였다. 남북·외교 전문가인 이제훈 기자가 직접 김정은이 됐다고 가정해서 썼다. 북한을 협상 파트너로 바라보고, 대내적 관점에서 북한의 역사를 살펴본 기사다.

▲ '나는 김정은이다' 1면 커버스토리. ⓒ 굿바이편집장

콘텐츠 생산자가 배워야 할 것

언론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꿈을 꾼다. 비슷한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독자들에게 재밌게 다가가는 콘텐츠는 환영받을 수밖에 없다. 책의 마지막에는 고경태 편집장이 만난 다른 매체 편집장들의 이야기도 담겨있다. <한겨레21> 편집장부터 <GQ KOREA>, <허프포스트 코리아> 편집장까지, 저마다의 철학으로 편집장이라는 자리를 설명한다. 그래도 공통점이 있다.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재미를 추구하는 열정이다. 이들의 시선과 철학을 빌리면 ‘재밌는 뉴스 콘텐츠’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마침 고 편집장이 2016년 <단비뉴스>에 연재한 글이 있으니 읽어보길 권한다.

[고경태의 유혹하는 에디터2] “이건 신문이 아니다”


편집: 최은솔 기자

저작권자 © 단비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