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

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송경화 지음/한겨레출판/1만 4천원

▲ <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 표지. ⓒ 한겨레출판

'부지런하다'라는 단어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겼다. 생각이 영리한 사람, 행동이 빠른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부지런함은 마음 씀씀이와 관련 있다. 나 자신을 넘어 주변 곳곳에 애정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부지런하다. 내게 ‘기자’란 직업은 그런 마음 씀씀이를 가진 사람이다. 세상의 다방면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 특히 다수가 무관심한 일에 마음을 쓰는 사람. 그것이 내가 꿈꾸는 기자의 삶이다. 

그러나 언론인 지망생들을 멈칫하게 만드는 점도 있다. 기자는 ‘워라밸’을 충분히 보장받지 못한다. 언제 사건·사고가 터질지 몰라 잠들 때도 휴대폰을 가슴에 품고 잔다는 전·현직 기자들의 말은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과연 그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며 도전해 볼 만한 직업인가? 그런 의문을 품고 있는 기자 지망생에게 현직 기자의 경험담은 후회 없는 선택을 위한 훌륭한 참고서가 될 수 있다. 

<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는 15년 차 기자가 쓴 소설이다. 송경화 <한겨레> 기자는 15년 동안 취재하며 기사에 담지 못하고 쌓아둔 취재기를 소설의 형식을 빌려 전하고자 했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됐다. 1부 경찰팀, 2부 법조팀, 그리고 3부 탐사보도팀이다. 기자 초년생 시절부터 15년 차 베테랑 기자로 거듭나기까지의 과정이 시간 순서로 담겼다. 송 기자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그에게 자유를 줬다고 책에 적었다. 가공하지 않은 사실을 전달하는 일이 사명이었던 기자에게 소설은 작가적 상상력을 허락했다. 기사에는 담지 못한 송 기자의 자기 고백이 이 소설에 담겼다. 

현실은 소설이 아니다

<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의 주인공 송가을은 “죄송한 게 너무 많은 세상에서 좀 덜 죄송하고 싶어”서 기자가 됐다. 그는 기자가 되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기사를 쓰고 싶었다. 그가 기자로서 성취감을 처음 맛본 순간은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시장에서 유아용 한복을 훔치다 붙잡힌 사건을 보도한 때였다. 여자는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며 혼자서 아이를 키웠다. 돌을 맞는 아이에게 한복을 입히고 싶어 여자는 한복을 훔쳤다. 기사가 보도되자 여자의 딱한 사정에 연민을 느낀 독자들이 모녀에게 쌀, 분유, 아기 옷 등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송가을은 ‘좋은 기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송가을이 영화감독이나 작가였다면,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이다. 아마도 모녀는 사람들의 관심을 통해 가난을 딛고 일어설 것이다. 아이는 착하고 건강하게 자라서 훌륭한 어른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기자의 맘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모녀에게로 이어지던 후원은 금세 끊겼다. 여자의 삶도 원점으로 돌아갔다. 송가을은 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느꼈다. 가난이라는 구조는 기자의 의지만으로 허물 수 없는 커다란 장벽인 것이다. 하지만 송가을은 좌절하거나 현실을 부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오늘을 성실히 살아낸다. 새로운 취잿거리를 찾아 나서고, 취재원을 만나 기사를 쓴다. 

‘내가 그때 괜한 짓을 했던 것일까.......’
목 뒤 어딘가에서 짜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사실 극단적으로 어려운 사람이 그 끝에서 헤어 나오는 게 우리 사회에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나는 어쩌면 박선하의 행복이 지속될 수 있을지 여부를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분유 냄새는 달큼한 것 같았지만 그저 상상의 대상일 뿐이었다. (<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 27-28쪽)

평범한 우리가 모여 진실을 비춘다 

송가을 기자가 계속해서 현장에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 답은 ‘사람’에 있다. 기자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기자는 입을 꼭 다문 취재원의 입을 열어야 한다. 취재 과정은 보이지 않는 미로 속에서 탈출구를 찾는 일과도 비슷하다. 취재원 한 명, 한 명은 작은 불빛이다. 그들의 뜻이 모여서 환한 등불을 만든다. 기자는 길을 밝혀주는 이들과 함께 미로를 빠져 나온다. 

▲ 기자가 하는 일은 취재원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진실로 찾아가는 미로에서 취재원은 길을 밝히는 등불과 같다. ⓒ unsplash

송가을 기자가 탐사보도팀에 있을 때 <고도일보>는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아 특별취재팀을 꾸렸다. 특별취재팀은 세월호 참사의 원인과 대통령의 7시간을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청와대는 보안상의 이유를 들어 정보 공개 청구에 불응했고, 내부 고발자도 없어 취재진은 실마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진실의 열쇠는 한 유명 배우에게 있었다. 그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던 날에 대통령이 유명한 헤어샵 디자이너에게서 올림머리를 받고 있었단 사실을 알았다. 그는 이 사실을 진보 성향의 한 국회의원에게 흘렸고, 의원의 입을 거쳐 송가을 기자에게로 전해졌다.  

기사가 나가기 위해선 배우의 용기가 필요했다. 배우는 새로 시작한 작품의 흥행으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한편 정치계에선 진보 성향의 연예인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연예계 활동을 방해했다. 배우가 용기를 낸 건 송가을 기자의 진정성 있는 모습 때문이었다. 송가을 기자는 배우를 설득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침묵하는 전화기 너머로 함께 진실을 밝혀달라고 호소했다. 배우의 용기가 기사로 전해졌다. 다른 언론사에서도 이와 관련한 사건들을 하나둘씩 밝혀냈다. 온 국민이 분노하며 한마음으로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다. 

“대체 그 시간에 우리나라 최고 지휘자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아내야 하는데요. 그러니까 그 시간이 어떤 시간이냐면요. 아이들이 배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간이거든요. 부모님들을 비롯해 우리 모두가, 지금 국가가 나서서 최선을 다해서 1분 1초를 아껴가면서 아이들을 구하고 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순간들이거든요. (중략) 기자로서 대체 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나. 그런데 죽음은 되돌릴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중략) 이게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지난 2년뿐만 아니라 평생 이 기분을 안고 살아야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에라도 진실을 밝히는 게 정말 우리 모두에겐 필요한 거거든요.” (<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 349-350쪽)

세상을 바꾸는 건 기자만의 일이 아니다. 오늘을 성실히 살아내는 평범한 이들 모두가 진실의 조각이다. 기자는 그 조각들을 엮어낸다. 가장 온전한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송가을 기자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거듭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겪으며 단단해진 마음은 말끔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했다. 눈물을 닦고 현장을 또렷이 담아내려는 송가을의 분투에서 기자는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을 나는 알게 됐다. 녹슬지 않도록 자신의 거울을 닦아내는 일이 기자의 사명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제 마무리 단계니까 너 혼자 남아서 마지막 현장, 마저 취재하고 올라와. 현장검증 처음이지? 유족들 보고 눈물 날 수 있는데, 거기서 같이 우는 게 좋은 기자는 아니야. 그 모습도 꼼꼼히 취재해서 담는 게 좋은 기자야. 우느라 눈 흐리지 말고 똑똑히 봐. 모든 장면을 놓치지 말라고.” (<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 37쪽)

가을은 뜨거운 뙤약볕에 벼가 익어가는 계절이다. 온화한 날씨만 지속되는 해는 없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도, 가뭄에 땅이 바짝 마르는 날도 있기 마련이다. 잘 익은 곡식이 나오기까지 농부는 자연의 변화를 읽어가며 벼를 보살핀다. 벼가 휩쓸리지 않도록 논에 둑을 쌓고, 토양을 비옥하게 유지하기 위해 비료를 뿌린다. 그렇게 예상치 못한 변화에 적응해가며 농부는 벼를 키우는 방법을 터득한다. 문득 바람이 차가워짐을 느끼듯, 일상을 살다 보면 가을은 어느덧 코앞에 다가와 있다. 들판에는 고개 숙인 벼들이 춤을 추며 만든 금빛 융단이 펼쳐진다. 풍성한 열매와 곡식은 농부의 한 해를 보상하는 선물이다. 

송가을 기자는 ‘세상에 도움을 주는 기자가 되겠다’는 각오로 씨앗을 뿌렸다. 베테랑 기자로 거듭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달콤한 보람은 잠시였고, 부장의 불호령에 시달리고 예상치 못한 변수와 맞서 싸우는 일의 연속이었다. 좋은 기자가 되기 위한 요령은 없었다. 추운 겨울날 취재원 집 앞 복도에서 밤을 지새우고, 혹시나 하는 가능성에도 몸을 바치는 순수한 열정이 그를 베테랑 기자로 거듭나게 했다. 소설은 송가을 기자가 안식 휴가를 마치고 정치부로 발령되며 끝이 난다. 노고 끝에 수확을 마치고, 새로운 씨앗을 뿌릴 그의 모습이 오늘을 살아내는 우리와 다를 바 없다. <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는 거듭되는 실수와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세상의 모든 ‘미생’들을 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00자평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현직 기자의 취재담을 통해 기자라는 직업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취재 아이템의 선정에서부터 기사가 나오기까지의 생생한 과정이 궁금하다면 추천. 


편집 : 김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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