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흔든 책] 이문열의 ‘선택’

24년 전 페미니즘에 관한 논쟁이 일었다. 이문열 소설 <선택>이 중심에 있었다. 당시 이문열은 “천박한 페미니즘”을 비판하고자 소설을 썼다고 밝혔다. 오늘날 여성들이 자기성취에 연연하느라 내조와 양육을 경시하는 세태를 지적했다. 여성들이 내조와 양육을 통해 사회에 헌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봤다. <선택>은 정부인 안동장씨의 목소리로 여성의 미덕을 전달하는 지침서다.

▲ <선택> 표지. ⓒ 민음사

주인공 장씨부인은 대학자 이현일의 어머니로서 자녀를 훌륭하게 키운 조선시대 대표 현모양처로 유명하다. 장씨부인은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알 만큼 총명한 인물이었다. 어렸을 때 성인들도 어려워하는 책을 읽었고 웬만한 문장가보다 나은 글을 지었다. 10대 시절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여성으로서 사회적 위치를 자각하고 재령이씨 집안에 후처로 들어갔다. 이후 그는 여성에게 부여된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남편을 보필하고 자녀를 교육했다.

장씨부인은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끊임없이 강조한다. 유교의 이치에 맞기에, 여성의 마땅한 도리이기에, 어머니의 의무이기에 등의 이유를 댄다. 가부장제 논리와 함께 작가 이문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내 착각일 수 있겠지만, 이에 관한 논의는 여기서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어쩌면 소설 속 장씨부인과 실제 장씨부인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치가 정체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위치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결정한다. 영문학과 소설 수업에서 존 쿳시의 <추락>을 읽으면서 혼란에 빠진 적이 있다. 주인공 데이비드 루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사는 백인 남성이다. 극단적 흑인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라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더라도 특권계층이다. 직업은 대학교수로 사회적 지위도 높다. 그는 제자 성추행 파문에 휩싸여 대학에서 쫓겨난다. 제자는 유색인종 여대생이다. 나는 수업 시간에 주인공을 내쫓은 게 정당하냐는 토론에서 주인공을 옹호했다. 성관계를 할 때 여대생이 거부의사를 보이지 않았다는 근거를 댔다. 권력형 성범죄에서 가해자 쪽이 펼치는 전형적인 논리였다. 변명을 하자면, 소설은 주인공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성관계 장면도 주인공의 시점에서 다뤄졌다.

나는 변명의 이유를 영미시 수업에서 찾을 수 있었다. 50대 후반 여자 교수가 하는 수업이었는데, 교수는 엘리엇의 ‘J.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를 읽다 말고 자기고백을 했다. 참고로 시는 소심한 대머리 남자의 관점으로 진행된다. 그 교수는 어릴 적부터 영미문학을 탐독하면서 어느 순간 자기가 ‘남성중심사고’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고 했다. 위대하다고 불리는 작품은 남자 작가의 것이 대부분이다. 교수는 그들의 생각을 자기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이다. 마지막에 나이든 여성 교수는 작품에 동화하기보다는 비판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있다고 조언했다. 

이문열의 <선택>은 현대 여성인 내가 공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고민할 시간을 줬다. 장씨부인은 자신의 선택을 진짜 선택으로 생각했을까? 장씨부인의 사회적 위치는 어디인가? 그에 따른 정체성은 무엇인가?

장씨부인은 자신의 선택이 자율적 선택이라고 믿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가부장제 논리를 체화한 인물이다. 소설에서도 자기 소개를 하면서 아버지, 시아버지, 남편 등 집안 사람들 소개를 더 많이 한다. 그리고 가족 얘기보다는 집안 얘기를 더 많이 한다. 그 속에서 그의 정체성은 부인이자 어머니다. 개인은 없다.

사실 장씨부인은 야심가였다. 결혼한 이유는 불멸하기 위해서였다. 역사에 기억되려면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 최고봉에 오르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이를 낳지 않겠는 현대 여성들에게는 재생산이 여성이 집안에 기여할 수 있는 “자기확대 또는 집단적 성취”라고 말했다. 일흔이 넘어 쓴 조리서 <음식디미방>이나 시집에서도 야망이 느껴진다. 기억되고 싶어서 기록한 것이다. 장씨부인이 남성으로 태어났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 거라고 믿는다. 자식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떨친 것 이상으로 조정에서 높은 자리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다. 여성이라는 사회적 위치에서 이룩할 수 있는 야망을 펼쳤을 뿐이다. 선택했던 걸까, 한계에 부딪힌 걸까?

장씨부인의 본명은 장계향(張桂香)이다. 계수나무 향기라는 뜻이다.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임금이 하사한 계수나무 꽃을 모자에 꽂고 의기양양하게 금의환향하였다. 계수나무를 꺾었다는 말은 과거에 합격했다는 뜻이었다. 계향은 훌륭한 자식들을 길러낸 장씨부인에게 어울리는 이름으로 볼 수도 있지만, 내게는 사회제약 속에 야망을 펼치지 못한 여인의 이름으로 보인다.

<선택>은 ‘억울하다’는 이문열의 호소와 달리 반페미니즘 소설이 맞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한 목적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문학사적으로 의미 있는 소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고 몸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목은 <선택>보다 <선택?>이라고 의문부호를 붙이는 건 어땠을까? 


편집: 임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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