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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과 한국 자본주의, 결정적 순간
[제정임 칼럼]
2021년 07월 28일 (수) 21:38:35 제정임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jaesay@gmail.com
   
▲ 제정임 원장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몇 해 전 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 <상속자들>이 구호로 쓴 셰익스피어의 경구다. 재벌 등 특권 가문 이야기를 만화적 설정으로 풀어간 이 드라마는 화려한 성채 안에서 ‘왕관의 무게’에 짓눌리는 ‘금수저들’의 불행을 그려 눈길을 끌었다.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서 ‘왕관의 무게’에 시달리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찾는다면 아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일 것이다. 그는 30대 초반이던 2000년 법학교수 40여 명이 ‘회사 재산을 자녀에게 편법 증여한 혐의’로 이건희 당시 삼성 회장을 고발하면서, 대중의 눈총이 쏟아지는 무대에 등장했다. 이른바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발행 사건이다. ‘왕관을 쓰려는 자’의 ‘고통 시작’이었다. 그는 2007년 삼성 법무팀장 출신의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비자금 사건’의 등장인물로 다시 그 무대에 소환됐다.

그런데 당시 비자금 사건의 ‘주범’이던 이건희 회장은 수조 원의 차명계좌, 1000억 원대 탈세 등이 드러났지만 구속도, 징역형도 겪지 않았다. 그는 집행유예를 거쳐 이명박 대통령의 ‘원포인트’ 사면을 받았고, 경영에 복귀했다. ‘대한민국 1등 재벌’은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각인시켰다. 이 회장이 수사와 재판, 사면을 받는 동안 대다수 언론은 범죄 사실을 모른 척하거나 ‘국가 경제와 올림픽 유치를 위해 사면하라’고 외치며 부쩍 늘어난 삼성 광고를 챙겼다. 반면 비판적 보도를 이어간 <경향신문> <한겨레>는 삼성 광고가 뚝 끊겨 ‘월급 줄 돈을 걱정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삼성공화국’이라는 한탄이 퍼져나갔다.

지금 이재용 부회장이 국정농단 사건으로 실형을 사는 것은 개인적으로 불행한 일이지만, 이 나라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는 의미 있는 진전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드디어 ‘1등 재벌도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나라’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거세지는 사면 혹은 가석방론은 이런 성취를 위협한다. ‘재벌의 부패 범죄를 엄벌하고 사면권을 제한하겠다’고 한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 풍전등화가 되고 있다. 경제정의를 내세우던 여야 정치인과 각료들이 사면·가석방 필요성을 떠벌리고 여러 언론이 북과 장구를 치는 모습은 ‘금권정치’(plutocracy)의 교과서를 보는 듯하다. 글로벌 반도체 전쟁에서 이겨야 하니까 석방하자고? 그건 ‘돈이 아~주 많으면 벌을 면할 수 있다’는 ‘유전무죄’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 지난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면·가석방 반대 기자회견에서 전국 노동·종교·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이 부회장의 복역은 ‘1등 재벌도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나라’가 됐다는 의미에서 한국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중대한 진전으로 볼 수 있다. ⓒ 연합뉴스

이재용 부회장은 무엇보다 자신과 삼성을 위해 2년6개월의 형기를 채워야 한다. 그는 국정농단 재판 과정에서 ‘삼성 준법감시위원회’를 만들고 법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최종심의 선고를 존중하는 것은 이 약속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일이다. 많은 이들은 지금 삼성이 정치권을, 정부를, 언론을 총체적으로 움직여 사면 혹은 가석방을 얻어내려 한다고 의심한다. 이 부회장이 풀려나면 “역시 삼성공화국이었어” “삼성은 대한민국을 뒤집을 수 있어” 하는 인식이 굳어질 것이다. 

그러면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재판 등 다른 곳에서 ‘더 강한 응징 요구’가 이어지고, 삼성 계열사의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도 위선으로 치부될 것이다. 이 부회장이 지금이라도 “사면이나 가석방을 바라지 않으며, 형기를 채우겠다”고 선언하면 어떨까. 앞으로는 대주주로서, 어떤 임직원도 교도소에 보내지 않을 윤리적 기업을 만드는 데 전념하겠다고 다짐하면 어떨까. 그것이 자신의 미래에 ‘왕관의 무게’로 인한 고통을 덜고, ‘법의 지배’를 요구하는 이 땅의 자본주의도 살리는 길이 될 텐데.

문재인 대통령은 재벌개혁과 법치 존중의 공약을 지켜야 한다. 잘하려던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은 이해해도, 핵심 가치를 내던지는 것까지 용납할 지지자는 없다. 지난 6일 1056개 시민단체가 이재용 사면·가석방 반대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박정은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이 정부가 ‘마지막 강’을 건너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지난 18일 지식인 781명은 사면·가석방이 ‘법치주의의 근간과 공정의 시대가치를 무너뜨리는 처사’라고 일갈했다. 자칫하면 개혁 지지층이 거리로 나설 수도 있다. 법무부의 8·15 가석방 심사 대상에 이 부회장이 포함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재용과 문재인, 한국 자본주의가 지금 결정적 순간을 맞고 있다.


* 이 글은 <한겨레> 7월 27일자에 실린 [제정임 칼럼]을 신문사의 허락을 구하고 전재한 것입니다. 

편집 : 김동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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