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 조한주 기자

사람들이 자주 하는 착각 중 하나는 민주주의는 ‘지배’와 거리가 먼 정치체제라는 점이다. 민주주의의 어원인 ‘다수(demos)에 의한 지배(kratia)’에서 알 수 있듯이 민주주의도 결국 ‘누가 어떻게 지배할 것인가’의 문제다. 지배자 없는 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으며 이들은 필연적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오늘날 지배와 복종 관계는 날 것 그대로 행사하는 권력이라기보다 지배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권위 관계가 대부분이다. 적어도 민주주의 체제 아래 권위와 권력은 상호 의존 관계다. 권위는 물리적 강제력을 수반하지 않고도 명령이 지켜지도록 하는 영향력이다. 지배되는 자가 자발적으로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할 때 지배는 효율적이다. 권위는 지배자의 명령할 권리와 피지배자의 의무가 정당하다는 전제 위에서 생긴다. 근대 사회에서 법적‧공적 위치가 그 자체로 권력 행사의 정당성을 보장했다면, 오늘날 권력자들은 권위를 통해 세련된 방식으로 권력의 정당성을 설득해야 한다. 즉, 민주주의에서 행사되는 권력은 권위가 후원한다.

권위는 민주적 속성이 다분하다. 공공선을 향한 지도자의 헌신과 능력 없이는 권위가 지속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권위는 합법적이고 정의로운 권력이다. 권위보다 권력이 앞서는 ‘위계적 권력’이 무조건 복종을 요구했다면, 오늘날 각광받는 ‘설득적 권력’은 권위를 먼저 얻은 정당한 권력이다.

우리는 ‘권위 없는 권력’의 잔학함을 역사적으로 경험한 바 있다. 전통적 권위의 회복을 내건 파시즘이나 군국주의가 정작 권위보다 권력에 의존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지배자에 복종하지 않을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권위주의와 달리, 권위는 자유와 공존할 수 있는 가치다. 권위가 권력 행사의 촉매제가 될 수 있는 이유다. 바야흐로 권위 없는 권력은 ‘횡포’가 되는 시대다.

사면론의 대상으로 자주 거론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처지는 권위와 권력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는 권력을 얻자 마자 권위를 얻으려고 노력하던 자신을 잊었다. 대통령이었을 때에는 삼성에게도 권력을 행사한 그에게 민주주의가 내린 판단은 그 권력을 거두는 것이었다. 만약 군사력이나 핏줄이 권력의 기반인 사회였다면 그의 권력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 지난달 2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렸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등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에 관한 첫 재판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출석하고 있다. ⓒ KBS

대통령이라는 명패가 불명예스럽게 떼어진 그는 권위 없는 ‘수인번호 503’ 죄수일 뿐이다.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 사면론도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그의 경우 경제권력을 여전히 쥐고 있지만 재계지도자로서 권위는 추락했다. 죄는 미워하더라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모호한 말도 있지만 형벌을 감수하는 것은 속죄하는 길이고 약간이나마 권위를 회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면론자들은 그걸 방해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지도자가 되려면 직위에 따른 강제적 권력이 아니라 자발적 지지에서 비롯되는 권위가 필요하다. 최종 목적이 권위가 아니라 권력인 천박한 추종자가 넘쳐나는 요즘, 권위가 그 자취를 감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편집 : 고성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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