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발언대]

▲ 윤재영 PD

나는 비영리 대안매체 <단비뉴스> PD로 활동하고 있다. 취재를 위해 만난 교수나 활동가들은 말을 잘했다. 그들의 말은 청산유수와 같았다. 말하면서도 비문을 거의 쓰지 않았다. 적절한 비유를 들어 논증했다. 그들을 만나면 편하게 기사를 쓸 수 있었다.

그러다 지난해 가을, 문장을 완성해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침출수 처리장에서 일하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산업재해를 신청한 50대 무기 계약직 노동자였다. 그는 까다로웠다. 한 번도 상대해본 적 없는 유형의 인물이었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 <단비뉴스>의 동료들과 함께 그를 만나러 갔다. 그는 작은 시골마을에 살고 있었다.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우리는 마을 삼거리의 편의점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에게 전화가 왔다. “아직 해가 안 저물었어요. 해 저물면 만납시다.” 해가 산을 넘어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 외출을 극도로 꺼렸다. 낮에는 집 밖으로 아예 나오지 않았다.

그는 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검은 바지에 검은 점퍼를 입고 있었다. 어둠에 묻힐 것만 같았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마을 공원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요청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간혹 사람이 지나가면 그는 모자를 더 눌러 쓰고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곳으로 몸을 옮겼다.

주변의 교회, 음식점 등을 백방으로 뛰어다니다 작은 모텔을 발견했다. 실내에 들어가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 직장 상사 A로부터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했다고 그는 말했다. 임금을 받지 못했고 폭행당했으며 욕설을 들었다고 말했다.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자살 시도를 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괴롭힘은 해가 갈수록 심해졌다. 다른 직원이 잘못해도 상사는 그를 혼냈다. 상사는 쉬는 날에도, 새벽에도 불러내어 일을 시켰다. 직장 생활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은 바지에 오줌을 쌌다. 밤에는 불안해서 하루 2시간씩밖에 잠을 못 잤다. 언젠가 정규직 전환이 될 거라는 희망만 품고 7년을 버텼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됐다. 한편으로는 그의 말에 과장된 것은 없는지 생각했다. 그는 어눌하게 말했다. 그의 말에는 목적어가 없었다. 생각의 흐름에 따라 말을 쏟아냈다. 말 한마디 할 때마다 한숨을 내뱉었다. 눈을 맞춰 이야기하다가도 이내 초점 없는 눈빛으로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이 쪼그라든다고 말했다. 가족 누구에게도 직장에서 겪은 어려움을 얘기를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도 다툼과 갈등이 생겼다. 직장에서는 직장 눈치, 집에서는 집 눈치를 봐야만 했다고 그는 말했다.

문장 하나를 완성하여 말하지 못하는 그의 이야기를 긴장하여 듣다가 절로 숨이 막히는 순간이 있었다. 그가 일한 곳에는 작은 우리가 있었다. 개와 닭을 키웠다. 어느 날 개 한 마리가 닭을 물어 죽였다. 화가 난 직장 상사 A는 삽자루로 개를 팼다. “개를 반쯤 죽여 놓았다”고 그는 그 장면을 회상했다. 삽자루로 맞은 개는 오줌도 싸고 똥도 쌌다.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개들은 처음에는 짖다가 나중에는 엎드렸다. 그 뒤로 개들은 A가 나타나기만 해도 기어 다니며 낑낑댔다. 그날의 일을 말하면서 그는 “꿈을 꾼다”고 말했다. 개들이 있던 우리 안에 자신이 갇혀있는 꿈이라고 했다.

춤을 좋아했던 그가 젊은 시절엔 전국을 다니며 댄서로 일했다는 것을 이야기 나누며 알게 됐다. 그러다 부모님 곁에 있으려고 고향에 돌아와 지금의 일자리를 얻었다는 것이었다. 힘들게 마련한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동안, 그에게 도움을 주는 이는 없었다. 그가 처한 상황은 정말이지 우리에 갇힌 개의 상황과 똑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뒤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산업재해 피해자들을 만났다. 산업재해를 겪은 이들은 사람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두려움 뒤에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전기 설비를 하다가 척추뼈가 골절된 30대 전기공은 밤마다 악몽을 꿨다. 엘리베이터에 자신이 끼이는 꿈이었다. 그는 언젠가 복직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없는 자리에서 그의 동료들은 그가 복직이 힘들 것이라 얘기했다. 사고 후유증이 심했기 때문이다. 30대 청년은 더 이상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매번 취재할 때마다 나는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만 그들에게 말했다. 너무 안타까웠지만, 위로의 말을 쉽게 건넬 수 없었다. “힘내라”라거나 “괜찮아질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상투적인 말은 그들에게 더욱 상처가 될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일은 그들의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마이크를 내미는 사람은 없었고, 나라도 그 역할을 하고 싶었다.

▲ 사회적 약자들은 목소리가 작아서 그들에게 '마이크'를 쥐여줘야 들을 수 있다. “연약한 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단비뉴스>에 들어오면서 새긴 내 좌우명을 다시 곱씹게 된다. ⓒ unsplash

나는 산업재해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 ‘불안정 노동자 두 번 울리는 산재보험’이라는 제목으로 탐사보도 영상을 제작했다. 우리 팀은 뉴스통신진흥회의 탐사·심층·르포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다. <연합뉴스>에도 보도되고, 여러 신문을 통해 많이 알려졌다.

그랬어도 그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보도 이후 나는 그에게 전화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그는 고향을 이제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법적 절차가 끝나는 대로 아무도 없는 산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 그는 부모님과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를 괴롭힌 사람은 남고, 괴롭힘으로 고통 받은 사람은 자신의 터전을 떠나게 된 것이다.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 산업재해 피해자 한 사람이 나에게 말했었다. “누군가 죽어야만 언론이 왔는데, 일부러 우리 이야기를 들으러 와줘서 고마워요.” 소외된 사람들은 말을 더듬거나, 문법에 맞지 않게 말하거나, 하나의 문장조차 완성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들은 어눌하고 서툰 자신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뒤의 세상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일부러 찾아와 이야기 들어주는 고마운 사람’을 기다리는 이들이 세상 곳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을 찾아가 마이크를 건네는 언론인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져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알게 되었다.


편집 : 유재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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