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자의 시선2]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③ 2020년 다른 전태일들

국토대장정 도로는 지옥이었다

2016년 6월의 끝 무렵, 버킷리스트였던 국토대장정을 하며 서울에서 포항까지 걸었다. 29일 동안 500km를 걷는 행군이었다. 지금에야 인간승리라고 포장하지만 당시를 떠올리면 아직도 몸서리가 쳐진다. 하루 평균 20-30Km를 걷는 대장정은 지옥 그 자체였다. 도로 위에서 나는 매일 징징댔다. 끝이 보이지도 않는 고속도로를 걸을 땐, 그 아득함에 주저앉고 싶었다. 

출발 전, 각 팀별로 노동가를 활용해 구호를 만들고 지칠 때마다 죽을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다 왔다, 다 왔어!” 고통을 마비시키는 주문을 악을 쓰고 외치며 한걸음씩 내디뎠다. 뙤약볕인 도로 위 기억은 선명하다.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는 뜨거운 아스팔트, 질주하는 차량이 내뿜는 매연, 매연보다 더 고약한 교관들 고함소리, 팔이 떨어질 듯 무겁게 펄럭이는 깃발...

▲ 2016년 여름 버킷리스트를 달성하기 위해 떠난 여정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우린 악을 써야 했다. Ⓒ 노스페이스

인간에게는 쉼이 필요하다

하루에 20-30km를 지글거리는 태양 아래 배낭을 메고 걷다 보면 일사병으로 쓰러지거나 다리와 발에 쥐가 났다. 너무 뜨거운 날에는 고속도로 옆을 내달리는 차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반복되는 고통은 죽음을 떠올리게 했다. 내 의지로 시작한 일이지만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엔 끝이 있다’라는 말만 떠올리며 되뇐 것 같다. 나는 꼭 돌아가야 한다. 적당한 휴식은 필수였다. 사람이 몸을 쓸 때 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그때 온몸으로 절감했다. 생수와 초코파이를 먹으며 잠시 숨을 돌리던 그 휴식이 있었기에, 장정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상상한다, 만약 국토대장정이 29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매일 지속되는 일상이었다면. 내가 지금 살아는 있을까 하고. 

2020 대한민국 도로에는 29일 국토대장정의 노동을 매일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다. 택배노동자다. <한겨레> 기사가 보도한 택배기사 김 씨의 근무시간 중 걸음 수는 하루 2만7천보였다. 1만보의 거리를 대략 10km라고 했을 때, 그가 상자를 들고 도로를 뛰어다니는 거리는 하루 평균 20-30km다. 내가 걷던 그 도로를 그가 매일 걷고 뛰는 것으로 계산하면 서울에서 포항을 찍고 다시 돌아가고도 남는다. 

까대기(분류작업)를 하는 동안 1만보를 채우고 나서야 그의 본업인 물품배송으로 다시 1만보7천보를 채운다. 휴식은 고작 20분. 곱빼기로 시킨 짜장면은 8분만에 해치운다. 하루 평균 18시간을 일했고 아파도 쉴 수도 없었다. 주어진 할당량을 그날 채우지 못하면 대리점 소장이 벌점을 물리기 때문이다. 그에게 할당된 430개 물품이 다 배송된 시간은 자정을 넘어 다음 날이었다. 그러고도 그는 새벽 5시 30분에 다시 출근을 해야 한다. 택배노동자는 기계였다. 2020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노동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과로는 죽음을 부른다. 과로사. 벌써 15번째 택배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도로 위에서 노동자가 죽어 간다

씨제이 대한유통 택배 업무 중 쓰러진 채 발견된 김원종 씨는 하루 평균 16시간을 일했다. 새벽 6시 알람을 듣고 7시에 출근을 준비하면 5시간 분류작업을 마친 뒤, 본래 업무인 배송을 마치려면 밤 10시를 넘겨야 집에 돌아갔다. 숨지기 전날도 다르지 않았다. 더 늦을 귀가 시간을 예고했던 그날, 그는 결국 아버지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본업을 제시간에 끝나기 위해 그의 동료들은 40만 원씩 모아 분류작업을 하는 아르바이트생을 구했다. 형편이 넉넉치 못한 그는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꼭 들고 있는 핸드폰에선 여전히 택배 문의가 쇄도했다. 그러나 그는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한다. 김원종 씨는 특수고용노동자였다. 물건을 받던 대리점 소장의 강요로 산재보험 적용 제외 신청서를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일감을 얻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씨제이(CJ) 대한유통으로 입직한 택배기사 중 64.1%가 산재보험 적용 제외 신청을 했다. 

▲ 씨제이(CJ) 택배노동자 김원종 씨는 업무 중 쓰러진 채로 발견됐다. 아버지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평소보다 더 늦을 거란 말이었다. Ⓒ KBS

‘저 집에 가면 5시 밥 먹고 씻고 바로 터미널 가면 한숨 못 자고 나와서 터미널에서 또 물건 정리 해야 해요. …어제도 집 도착 (새벽) 2시 오늘 (새벽) 5시 …저 너무 힘들어요.’

같은 날 새벽 4시 28분, 한진 택배노동자 김모 씨는 동료에게 카톡을 보냈다. 과중한 업무를 토로하던 그는 메시지를 보내고 사흘 뒤 숨져 다시 동료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밀리는 업무량에 멈추려 해도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제어장치가 없는 노동 환경 속에 자신을 착취해야 하는 노동자였다. 한숨도 그에겐 허용되지 않았다. 나이는 36살. 다른 배송사보다 근무 범위가 넓어 그 방대한 택배량을 모두 감당한 김 씨의 죽음은 과로사였다. 그의 사망을 두고 한진택배는 과로가 아닌 지병이라며 산재를 거부하고 있다. 그가 죽고도 또, 또, 또 택배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과로사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 씨와 또다른 김 씨가, 김원종 씨와 또다른 김원종 씨가, 강 씨와 장 씨가, 장 씨와 정 씨가, 이 씨와 박 씨가 그리고 또 다른 김 씨가. 이들이 서있던 도로는 얼마나 끔찍한 곳이었던가. 매일 20-30Km를 뛰고 걷는 29일간 국토대장정보다 더한 지옥이었다. 그 도로 위를 또 다른 택배기사가 그를 대신해 오늘도 뛰어다닌다.

▲ 한진택배에서 근무하던 김모 씨는 사망하기 사흘 전 이미 동료에게 업무가 과중하다고 호소했다.Ⓒ SBS

2020 한국에서 노동자로 살아남기

지난 2월 5일 현대제철 경북 포항공장에서 30대 노동자가 1500도 쇳물이 담긴 용광로로 추락해 전신화상을 입고 사망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그는 추락 후 스스로 빠져나와 병원에 이송됐지만 몸의 절반이 극심한 화상을 입으면서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결국 숨을 거뒀다. 회사는 낙후된 설비 교체를 1년째 미룬 상황이었다. 일시적으로 용해된 쇳물을 모아두는 턴디시 위에서 작업하며 제대로 된 안전조처가 제공되지 않은 채 뛰어든 현장이었다. 사고 이후에야 회사에선 노동자가 일하던 곳에서 작업을 금지하도록 작업 표준을 추가했다. 5년 전에도 이 회사 인천공장에서 연주공정을 하던 노동자가 턴디시로 추락사했다. 회사가 겪은 첫 추락사가 결코 아니었다. 

10년 전에서도 용광로에서 비슷한 사고가 있었다. 2010년 9월 충청남도 당진의 한 철강회사에서 일하던 20대 노동자가 1600도 쇳물에 추락해 사망한 것이다. 그를 추모하며 한 누리꾼이 글을 썼고 사고당한 노동자를 기억하겠노라고 노래도 만들었다. 

그 쇳물 쓰지 마라.

광염(狂焰)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도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못을 만들지도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모두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 적 얼굴 찰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 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 보자, 하게.

비슷한 곳에서 노동자가 죽는다. 5년이 지난 뒤, 10년이 지난 뒤에도 또 같은 일이 반복됐다. 이 노래는 이제 다른 또 한 명을 기리기 위한 노래가 됐다. 

김용균도 그랬다. 그가 사망한 뒤 어머니 김미숙 씨는 ‘태안화력 비정규직 노동자 사망사고 조서 결과 공개 브리핑’에서 “그런 곳인 줄 알았더라면 어느 부모가 자식을 ‘살인병기’에 내몰겠어요”라며 오열했다. 24살 노동자 김용균이 매일 컵라면을 들고 가 일한 그곳은 살인병기였다. 유품으로 남긴 손전등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안전장치였는지 모른다. 탄 가루와 싸우며 늘 어두운 현장에서 일하는 그에게는 회사에서 지급된 헤드랜턴조차 없었다. 그가 떠나고도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살인병기에서 목숨을 잃었다. 노동을 위한 안전은 늘 뒷전이다. 일터에 나가 목숨 걸고 매일 같이 위태롭게 버텨내야 하는 것이 한국의 노동자가 마주하는 2020년의 현실이다.

다시, 전태일

기록을 세우듯 반복되는 사망자가 더 나와선 안 된다. 근로기준법은 노동자의 피다.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숨이며 노동자를 지키는 산재보험은 노동자를 지킬 살가죽이고 안전모다. 도로 위에서 온몸을 던져 노동하는 사람에게 휴식이 절실하다. 생수와 초코파이가 필요하다. 전태일 3법은 △5인 미만 사업장에도 근로기준법을 적용하고 △특수고용노동자에게 노조할 권리를 부여하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는 법안들이다. 끝없이 발생하는 노동자들 부음 앞에서 전태일 3법은 그래서 절실하다. 

▲ 전태일은 근로기준법과 함께 스스로 몸에 불을 질러 노동자의 삶을 지켜달라고 세상에 호소했다. Ⓒ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1970년 평화시장 도로 한복판에서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안고 몸을 불살랐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전태일이 당시 저임금 장시간 노동하며 죽어가던 노동자를 위해 자신의 뼈와 살과 피를 불에 던지며 외쳤던 절규. 그가 떠난 지 50년이 지났다. 대한민국에선 여전히 하루 7명의 노동자가 죽고 350만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을 보장받지 못한다. 특수고용노동자, 간접고용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 김용균이, 김 군이, 또다른 전태일이 죽어가고 있다. 내가 국토대장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 것처럼, 노동자도 노동이 끝나면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린 기계가 아닌 사람이다. 노동자들의 죽음, 전태일의 간절한 외침이 알려주고 있다. 그 죽음들이 헛되면 안 된다.


[청년기자들의 시선1]이 하나의 현상과 주제에 관한 다양한 시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시선2]는 현상들의 관계에 주목해 현상의 본질을 더 천착하고, 충돌하는 현상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 새로운 비전을 모색한다. 이번 주제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다. 1970년 11월 13일 22살 청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치며 자신을 불살랐다. 그는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혹사당하는 어린 견습공들에게 풀빵을 사주며 사람이 대접받는 노동환경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났지만 노동현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또다른 ‘전태일들’이 죽음 앞에 놓인 오늘, 노동의 의미와 노동자의 삶을 기록한다. (편집자)

편집 : 방재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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