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자의 시선2]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⑤ 전태일 다시 세우기

전태일의 고향, 대구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이 온몸을 던져 분신하며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그는 한국 노동사의 상징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전태일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하나의 역사다.

전태일은 1948년 대구 중구 동산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대구에서 태어났고, 대구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잠시 부산과 서울로 이주했다가 1962년에 다시 대구에 내려와 야간학교인 청옥고등공민학교에 다녔다. <전태일 평전>과 그와 관련된 기록물에서는 청옥고등공민학교에 다녔던 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 일과 학급 학우들의 공부를 도왔는데, 전태일은 그때가 행복했다고 썼다. 전태일이 청옥고등공민학교 동창생들에게 남긴 편지 형식의 유서는 당시 급우들과 자신이 하나라고 전한다. 1970년 11월 13일 분신 직전, 청옥고등공민학교 시절 동창들 앞으로 남긴 마지막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 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 1969년 청옥고등공민학교 시절 친구들과 남산에 오르던 날 맨 왼쪽이 전태일이다. 그에게 청옥 시절 동창들은 한 몸과 같은 존재였고 대구 시절은 그의 짧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된다. Ⓒ 전태일재단

잊혀졌던 전태일의 고향, 대구에서 전태일을 기억하기 위한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대구문화재단에서 발간한 <대구에서 전태일을 기억하기>가 운동의 첫 결실이다. 책은 전태일이 대구에서 머물던 흔적을 추적해 생생하게 기록했다. 전태일과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전태일 일대기를 쓴 인권변호사 조영래는 모두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전태일을 기억하기>는 이들의 생애와 활동도 잘 정리돼있다. 책은 전태일 50주기를 맞아 대구와 전태일 사이에 끊어진 다리를 잇는 노력이자 전태일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다. 

지금까지 전태일 기억 운동의 중심은 서울이었다. 대구에서 시작된 전태일 기억하기 운동은 대구 곳곳에 남은 전태일의 흔적을 대구시민에게 상기하고, 전태일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태일 정신을 새롭게 공유하려고 한다. 지금은 기억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이 만들어지고, 시민모금으로 전태일기념관 설립 계획도 추진되고 있다. '전태일의 친구들'은 대구전태일기념관 설립을 목표로 지난해 3월 출범했다. 

전태일기념관이 기억하는 전태일 

지난해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기념관’이 개관했다. 기념관은 22살의 그가 분신 항거했던 평화시장이라는 장소가 가진 역사적 의미를 되살려냈다. 노동이란 단어와 노동운동에 부정적이던 우리 사회에서 전태일을 기리는 일은 용기가 필요했다. 전태일기념관은 전태일에 이어 몸으로 노동운동을 해온 이들의 피와 땀의 결과다. 

지난 50년 동안 이름없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싸우면서 노동운동을 이어왔다.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앞두고 노동계와 시민사회가 전태일기념관을 건립한 의미는 다시 전태일 정신을 기리고, 열악한 노동현장을 방치해 노동자들이 죽어 나가는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각오를 새롭게 다지는 데 있다. 건물 외벽 전면에는 1969년 12월 19일 ‘전태일이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편지’가 새겨져 있다. 

‘근로감독관님께.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께서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번영을 이룬 것이 과연 어떤 층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여러분의 애써 이루신 상업기술의 결과라고 생각하시겠습니다만은 여기에는 숨은 희생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즉, 여러분 자녀들의 힘이 큰 것입니다.’

‘성장해가는 여러분의 어린 자녀들은 하루 15시간의 고된 작업으로 경제 발전을 위한 생산계통에서 밑거름이 되어 왔습니다. 특히 의류계통에서 종사하는 어린 여공들은 평균연령이 18세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러분들의 전체의 일부입니까? 가장 잘 가꾸어야 할 가장 잘 보살펴야 할 시기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어느 면에서나 성장기의 제일 어려운 고비인 것입니다.’ 

외벽에 적힌 편지 내용 중 일부이지만 전태일은 우리 경제발전의 이면에 어린 여공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잊지 말라 강조한다. 나아가, 어린 여공들이 여러분의 자녀임을 강조한다.

▲ 지난해 '노동자의 날'을 하루 앞둔 4월 30일 개관한 전태일기념관. 그가 분신 항거한 청계천에 건립된 전태일기념관 전면 외벽에는 전태일이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편지가 새겨져 있다. Ⓒ <연합뉴스>

기념관 외벽에 적힌 전태일의 호소처럼, 지난 경제성장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헌신과 희생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50년 전과 다르지 않은 열악한 노동현장과 매일 6명씩 죽어 나가는 노동자들의 참상이 오늘의 현실이다. 전태일기념관 건립은 그동안 세상이 외면해 온 열악한 노동현장의 개선뿐 아니라,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란 존재의 의미를 다시 일깨운다는 의미가 있다. 

기념관 전시장에는 그를 기억할 수 있는 물품과 이소선 여사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전태일 평전>을 바탕으로 어린 시절부터 사망하기까지 일대기를 시간 순으로 보여준다. 당시 미싱사들이 사용한 재봉틀을 비롯해 시다(견습공)들이 일하던 공간을 그대로 재현했다. 재현된 좁은 공간과 낮은 천장은 당시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그대로 드러낸다. 쉴 공간조차 없이 피를 토하며 약으로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버티며 일하던 어린 여공들의 아픔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가 만든 ‘바보회’의 회장 명함과 평화시장 노동환경을 조사하기 위해 만든 실태조사 설문지도 전시돼 있다. 전시물은 그가 단지 노동개선을 꿈꾼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방법까지 고민했음을 보여준다. 그가 평전에서 기록했듯이, 우산장사,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을 하며 보낸 어린 시절과 자기 버스비를 털어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다 주고, 2시간 이상 걸어 집에 가기를 반복한 기록을 중심으로 기록물이 전시돼 있다. 전태일의 삶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시청각 자료도 마련돼 있다.

▲ 전태일기념관에 재현된 당시 미싱사들 작업 공간. 관람객은 이곳을 보며 당시 열악하던 노동 환경과 이곳에서 약물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견디던 어린 여공들의 아픔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다. Ⓒ 전태일기념관

전태일이 일하던 평화시장에는 800개 작업장이 밀집돼 있었다. 1, 2층은 점포, 3, 4층은 작업장이었는데 바로 서지 못할 정도로 낮고 열악한 작업 환경이었다. 좁은 숙소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고, 제대로 씻을 공간이 없을 정도로 불결했다. 노동자 수는 2만에 이르렀지만,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으며, 노동자 중 80%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 실먼지가 심하게 날렸고, 다락방에 덧대어 허리조차 펼 수 없는 좁은 작업장에서 장시간 노동, 밤샘 야간 작업을 했다.

▲ 평화시장 미싱사들은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렸다. 근무 환경도 열악해 환풍기가 없어 폐병에 걸리기 일쑤였고, 디스크, 기저질환 등 작업장에서 생긴 각종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 KBS <역사저널 그날>

진보 노동운동의 중심이던 대구 섬유단지 

서울의 ‘아름다운 전태일기념관’과 달리 대구는 전태일을 앞으로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대구는 우선 전태일이 사람을 아끼는 마음을 가꾼 터전이라는 의미가 있다. 전태일의 어린 시절은 방황과 가난으로 점철돼 있다. 그는 가난한 노동자인 아버지의 술주정과 폭력에 시달리며 여러 차례 가출을 감행했다. 어린 시절부터 신문팔이와 구두닦이를 하는 고단한 삶 속에서도, 그는 어린 동생들에게는 강한 책임감을 가졌다. 자신보다 더 약한 이를 위하는 마음은 평화시장까지 이어진다. 가난한 삶은 그에게 연민을 키워주는 자양분이었다.

대구가 우리나라 진보 노동운동의 중심이었다는 점에서 장소가 전하는 의미도 크다. 전태일은 애증의 존재인 자기 아버지를 통해 노동조합, 노동운동 등에 눈을 뜨게 된다. 아버지 전상수 씨는 대구섬유단지 봉제공장 노동자였다. 기록물에 따르면 그는 전태일에게 폭력적인 아버지면서도, 노동 인식을 일깨워준 사람이었다. 그는 대구에서 거주할 때 전태일에게 젊은 시절 참여한 대구 방직공장 파업 이야기를 들려줬다. 전태일은 아버지를 통해 노동자의 인권에 계속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대구는 섬유도시이자 진보적인 노동운동의 도시였다. 전상수 씨는 대구의 수많은 노동자 중 한 명이었다. 당시 대구는 섬유산업이 호황이었고, 여성 노동자가 섬유산업의 중심축이었다. 봉제 노동 특성상 여성 노동자가 많았고, 이들은 산업체 학교에 다니며 일했다. 산업체 학교에서는 학비를 보조해준다는 명목으로 일반 노동자들보다 훨씬 낮은 임금으로 학생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노동자들은 휴일 근무에 동원됐으며, 교육비 명목으로 임금의 상당 부분을 떼였다. 섬유단지의 노동 환경은 열악했다. 대구 섬유 노동자가 배고픔을 달래려 담배갑 포장용 풀을 먹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대구 섬유산업은 해방 직후부터 1950년대까지 지역 군소자본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1950년을 전후로 삼호방직, 내외방직, 제일모직, 대한방직 등 대형 섬유공장이 대구에 생겨났다. 대구는 여성 노동운동사에도 큰 의미가 있다. 중소영세기업을 비롯해 제일모직, 한국경전기, 태양어패럴, 남영섬유 등과 염색공단(남선물산, 태화염공, 대하염공)을 중심으로 대구에서는 크고 작은 노동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1954년 내외방직 파업, 1955년, 1956년에 걸쳐 발생한 대한방직 쟁의가 대표적이다. 대한방직 쟁의는 경영합리화라는 명목으로 2600명 노동자를 부당해고하고 어용노조를 조직해 노동자를 탄압한 사업주와 기업에 분노한 노동자들의 투쟁이었다. 1950년대에 시작된 대구 노동운동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 1946년 9월 대구에서 열린 노동자 총파업. 대구역에서 철도 파업을 시작으로 금속공장, 대구우편국, 대구전화국, 대구중공업 등 전체 노동자가 총파업에 참여했다. Ⓒ 대구 노동운동역사자료실

대구와 청계천 두 시공간을 연결하는 단어, 노동자

대구 섬유단지와 서울 평화시장이라는 두 시공간은 전상수와 전태일, 부자간에 대를 잇는 노동자의 삶을 이어준다. 대구는 전태일에게, 열악한 노동현장의 문제와 노동자로서 현실에서 매일 부딪치며 살아가야 하는 삶의 문제를 각인시켰다. 전태일은 회상 수기에서 빈곤한 서울 살이를 적고 있다. 2016년 발간된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평전>에는 당시의 고단한 삶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이소선은 일자리를 구했으나 아기를 업은 사람은 쓰지 않는다고 했다. 다행히 한 식당에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이틀 굶은 배를 움켜쥐고 거의 상해가는 고등어 배를 따는 일이었다. 품삯을 받아서는 시장으로 달려가 시래기를 샀다. 가장 손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시래기죽이었다.” 

1964년 서울에 온 전태일은 1년 가까이 구두닦이를 했다. 같은 구역 구두닦이들에게 고초를 당한다. 전태일은 미싱사가 되면 삶이 나아질 것으로 생각했다. 현실은 아니었다. 대구에 이어 서울에서 마주한 노동자의 삶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당시 평화시장 미싱사들은 저임금으로, 하루 14~16시간 노동하며 폭언과 폭력에 시달렸다. 그는 함께 일하는 어린 여성 노동자를 위해 차비로 풀빵을 사주고 걸어서 집에 갔다. 폐병과 각종 산업 재해로 병들고, 죽어가는 동료들을 지켜봤다. 

청계천 평화시장의 노동현장은 그가 아버지를 통해 경험한 대구의 노동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평화시장에서 본 착취의 뿌리는 대구였다. 전태일은 노동현장의 열악한 환경과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개선할 방법을 찾아 나선다. 그는 노동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근로기준법’을 알려준 것도 아버지였다. 그가 죽기 전에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결성한 바보회, 노동조건을 파악하기 위한 설문조사, 관련기관 진정 등 그의 모든 활동은 대구에서 청계천으로 이어진 그의 삶의 궤적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그는 자신의 몸을 던져 세상에 노동자의 아픔을 절규했다. 그리고 50년이 흘렀다.

전태일 다시 세우기

전태일이 사망한 지 50년이 지났지만, 노동자의 노동환경과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대구에서 전태일 기억하기는 청계천 평화시장의 전태일을 넘어 이름도 없이 잊혀진 대구 섬유공단 노동자를 기리는 작업이다. 대구의 전태일을 찾아 만나고 기억하는 일이다. 세상의 모든 전태일을 만나는 일이다.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주인공이었으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수많은 노동자들의 헌신과 희생을 되살리는 일이다. 

▲ 대구의 한 봉제 노동자가 일하는 모습. 지난해 대구 지역 봉제노동자 평균 월급은 128만원이었다. 섬유도시 대구의 발전 이면에는 봉제 노동자가 있었다. 대구 섬유단지에서 노동운동이 반복해 일어났지만, 여전히 노동자는 열악한 환경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 Ⓒ <연합뉴스>

대구에서 전태일을 기억하는 일은 현재 진행형이다. 시민 대상 모금 활동을 전개해 대구에 전태일기념관을 설립하려는 노력이 한창이다. 대구에서 전태일 기억하기는 전태일 정신을 안팎으로 확장하는 일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전태일이 있다. 김용균이, 여전히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갇힌 봉제 노동자들이, 죽음 앞에 놓인 수많은 비정규직과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두 전태일이다. 이는 세상의 모든 전태일이 사람 대접 받으며 노동하고,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일이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란 전태일의 사람 정신을 이 땅의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하는 일이다. 전태일 50주기에 우리가 대구 전태일 기억하기를 주목하고 전태일을 다시 세워야 하는 이유다.


[청년기자들의 시선1]이 하나의 현상과 주제에 관한 다양한 시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시선2]는 현상들의 관계에 주목해 현상의 본질을 더 천착하고, 충돌하는 현상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 새로운 비전을 모색한다. 이번 주제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다. 1970년 11월 13일 22살 청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치며 자신을 불살랐다. 그는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혹사당하는 어린 견습공들에게 풀빵을 사주며 사람이 대접받는 노동환경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났지만 노동현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또다른 ‘전태일들’이 죽음 앞에 놓인 오늘, 노동의 의미와 노동자의 삶을 기록한다. (편집자)

편집 : 이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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