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자의 시선2] ‘야, 한국사회’ ➁ 노동을 저평가하는 사회

“주영아~! 주영아~!” 사람들은 동네에 다 들리게 내 이름을 불렀다. 일반 주택에서 살던 내가 슬리퍼를 질질 끌고 헐레벌떡 나가면, 옆집 아줌마가 담장 너머로 냄비를 건네줬다. 냄비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볶음탕이 담겼다. 나는 다시 엄마에게 불려갔다. 엄마는 받은 냄비에 김치전을 듬뿍 담아주며 나를 옆집으로 보냈다. 어릴 땐 귀찮았는데, 받아먹고 돌려주던 음식나눔문화가 ‘품앗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음식 품앗이는 가난하던 ‘그때 그 시절’, 어린 나이의 엄마가 본 대로 해온 것이었다. 

동등하게 ‘노동’을 교환하던 ‘품앗이’

가난한 이들이 서로를 보듬으며 가난을 공유하던 시절이 있었다. 마을마다 ‘두레’라는 작은 공동체가 있었고, 사람들은 ‘품앗이’로 노동을 교환했다. ‘품앗이’의 어원은 ‘품’이 ‘노동력’, ‘앗이’가 ‘갚음’을 뜻한다. 이웃이 도와준 것을 자기 노동력으로 다시 갚는 일이었다.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 노동을 교환하며 어려움을 함께 해결했다. 품앗이에서 남성과 여성, 장정과 소년의 노동은 동등하게 평가받았다. 곧, 인간의 노동력은 원칙적으로 대등하다는 정신에 기반을 두었다. 품앗이는 내가 가면 네가 오는 수평적 구조방식으로, 공동체가 더불어 함께 사는 자발적 노동이다. 품앗이는 상대방이 들인 시간과 노동에 감사를 표하고 보상하는 일이기도 하다. ‘동등’을 전제로 하는 노동 품앗이에는 강자나 약자, 있는 자와 없는 자, 남녀노소가 함께 살자는 인간애가 있다.

▲ 품앗이는 공동체에서 노동과 마음을 나누며 가난과 힘든 일을 나누어 이겨내는 구실을 한다. Ⓒ 픽사베이

한국은 이제 가난하지 않다.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사람들이 성실하게 노동한 덕분이었다. 1960년 출범한 원조 선진국 그룹에서 원조를 받던 한국은, 지난 2009년 24번째 개발원조그룹 회원이 되면서 개발도상국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나라가 됐다. 이제 대한민국 국내총생산(GDP)은 195개국 중 12위다. 돌아보자, 가난을 벗어난 나라에서 누가 부유해졌는지. 여전히 가난한 이들은 누구인가? 부유해진 건 기업이지 노동자가 아니었다. 2020년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는 여전히 가난하다. 가난하면서도 더이상 서로 가난을 공유하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잃어버린 ‘노동’의 가치와 정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한국 사회는 가난을 벗어났지만, 우리는 노동 가치와 정신을 잃어버렸다. 어려움을 나누는 품앗이 정신과 동등과 인간애를 기반으로 하던 ‘노동’은 ‘근로’라는 단어로 치환되었다. 헌법은 ‘근로’를 국민의 의무 중 하나로 명시하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정의하는 ‘노동’은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해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다. 노동의 주체성은 노동자에게 있다. ’근로‘는 '부지런히 일함'을 이른다. 근면성실을 강조하는 단어인 ’근로‘의 주체는 노동자에게 노동을 시키는 기업가에게 있다. 노동자에게 주어진 건 의무뿐이다. 가난을 벗어나길 꿈꾸던 사회는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이 사이의 심각한 불평등으로 양극이 뚜렷하게 나뉘었다. 한국에서 지난 50년 동안 노동자를 위한 자리는 개선되지 못했다. 노동은 공동체가 같이 살기 위한 아름다운 미덕이 아니라, 힘 있고 가진 자가 일방적으로 사고파는 착취가 되었다.

▲ 경제성장 속 노동자가 헌신한 ’노동‘의 가치는 보장받지 못했다. 국가와 기업이 필요한 것은 노동자의 근면성실한 근로였고, 노동한 대가도 크지 않았다. 사진 속 글귀는 다 YH무역에서 폐업으로 농성하다 사망한 김경숙 노동 운동가의 일기에 나오는 것이다. Ⓒ KBS <역사저널 그날>

급속한 경제 발전을 지향하며 군부 개발정권이 시멘트 도로와 빌딩으로 덮어 버린 건 창피한 가난만이 아니었다. 서로 처지를 가여워하면서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공유하며 노동을 교환하던 정신도 시멘트 아래로 사라졌다. 노동에는 시간과 품이 든다. 노동사용자는 ’노동‘만 이용하고 ‘품’을 들인 사람의 가치는 제대로 되돌려주지 않았다. 지난 경제성장에서 ‘노동자의 노동’이 아니라 ‘근로자의 근로’가 필요했을 뿐이다.

노예계약서, 열정페이, 불로소득이 상징하는 것

한국 사회에서 ‘노동’이란 단어의 의미는 자기 몸을 써서 삶을 지탱하는 신성한 활동이 아니다. 사회계급에서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이들의 일거리 정도다. 온라인엔 '직장인은 곧 월급 노예', '근로계약서가 아닌 노예계약서를 썼다'는 우스갯말이 돈다. 출근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퇴근시간은 정해지지 않고 계약서를 쓰자 마자 언제든 일할 준비가 돼있어야 한다. 코로나19 이후 재택근무가 만연해지면서 직장과 집의 경계는 더 무너져 상사의 문자가 곧 일의 시작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고용이 되면 시키는 일은 무조건 감당해야 한다. 지난달 28일, 인천 영흥화력발전소에서 화물운전사 심장선 씨가 석탄재를 싣는 일을 하다가 추락사했다. 상차업무를 외주화해 제대로 인력이 분배되지 않았고 돈을 벌려면 심 씨는 그 노동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선진국 한국'에서 노동자는 여전히 일하며 가져야 할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다.

매슬로는 인간 욕구를 5단계로 나눈다. 욕구의 1단계는 생존이고, 자아실현을 그 욕구의 최고 단계인 5단계로 본다. 매슬로의 이론에서 한국은 어디에 있는가? 가난을 벗어났고 선진국에 진입했으니 5단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 청년을 보면 오늘의 현실이 보인다. 2020년 한국 사회는 청년들에게 ‘꿈’을 꾸라 외친다. 노동현장에서 ‘자아실현'하라 다그친다. 청년들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들인 자발성, 품은 다 기회비용일 뿐이다. 노동에 들어간 시간과 품보다, 노동자의 능력과 결과가 보상을 좌우한다. 

한국 사회는 ‘열정페이’라는 이름으로 청년의 노동을 이용한다. 대기업, 관공사들은 스펙 쌓기를 빌미로 각종 서포터즈, 기자단, 홍보대사 등에 대학생을 모집해 단순 작업을 시키거나 실제 직원이 해야 할 일을 보상없이 시킨다. 취업연계형 인턴으로 뽑힌 청년들은 적은 월급에도 강도 높은 업무를 수행하며 정규직을 꿈꾼다. 2017년 현장실습 중 공장기계에 짓눌려 사망한 18살 이민호 군 역시 청년이 어떻게 '자아실현'이란 이름으로 노동현장에서 보호없이 남용되는지 보여준다. 어디 청년의 노동만일까? 경제발전 과정에서 노동자의 헌신과 희생, 이들이 제공한 노동을 평가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지난 50년 동안 노동자의 노동 환경과 처우 개선은 없었다. 그 바탕에는 노동이란 단어를 천박한 직업의 몸쓰기라는 한국 사회의 인식이 뿌리깊게 박혀 있다.

▲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 사망 2주기 추모 현장에서 2년 후 여전히 반복되는 산업재해를 호소하는 파사드 퍼포먼스가 국회 벽면에 뿌려졌다. Ⓒ KBS
▲ 한국에 산재로 사망한 노동자 수는 영국의 10배에 이른다. Ⓒ KBS뉴스 캡처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란 부정적 이미지로 빈곤과 아픔의 상징처럼 그려진다. 산업재해로 매년 수많은 노동자가 다치거나 사망해도 '운이 좋지 않은 불쌍한' 사람들로 여긴다. 사고나 죽음의 원인을 살피거나, 노동환경을 개선하려 애쓰지 않는다. 노동을 대하는 인식이 부정적이고 노동환경도 열악하니 당사자인 노동자조차 기업의 시장논리에 반박하거나 싸우지 않고, 자기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모두가 자신과 내 자식이 노동자로 살다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학벌을 쌓아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안정적인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한다. 몸을 쓰지 않고 많은 돈을 획득하는 게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 앉아서 돈 번다는 ‘건물주’가 초등학생들 장래희망이 된 건 ‘웃픈’ 현실이다. 더 이상 ‘노동’은 상부상조하는 공생의 문화도, 신성한 자아실현의 도구도 아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노동은 곧, 가진 것이 없음을 의미한다. 노동하지 않는 삶이 더 가치있다고 평가받는다. 불로소득을 벌 수 있는 자가 세상에서 제일이 되었다.

노동, 노동자 없이 기업도 없다

우리 사회는 경제발전에서 노동자가 숨은 공로자라는 사실을 외면했다. 한 사회를 구성하는 나와 너, 우리가 노동자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았다. 당연히 노동의 가치는 땅에 떨어졌고, 노동과 노동자를 중시하는 제도나 사회구조는 미뤄지고 만들어지지 못했다. 노동법은 미비했고, 사용자는 법을 악용해 노동자가 저항할 수 없게 노동조합을 와해시켰다.

▲ 노동시장이 유연화하면서 간접고용 노동자와 특수노동자들이 급증했지만, 법과 인식의 미비로 노동자들은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다. 사진은 특수고용자인 학교 돌봄 전담사들의 시위 장면. Ⓒ SBS

노동시장 유연화로 파견, 용역, 도급 등 간접고용 노동자가 생겨났지만 이들을 보호할 제도는 없었다. 대기업의 외주를 받는 중소기업으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구조를 이용해, 원청 대기업은 노동력을 싼값에 후려치는 횡포를 부렸다. 노동법은 사용자가 노동을 사용만 하고 책임은 회피하는 구조를 방기했다. 직무유기의 저변에는 ‘노동’이 아닌 ‘근로’로, ‘노동자’가 아닌 '근로자'로만 보는 시혜적 인식이 깔려 있다. '근로'기준법, '근로'계약서, '근로'3법이란 이름이 이를 증명한다.

노동법은 직종과 산업에 따라 노동자의 권리에 차등을 두었다. 정부는 2018년부터 주 52시간 근무제를 실시했다. 250만 특수고용노동자는 이 법과 무관하다. 주 72시간 일하다 과로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특수고용노동자가 자영업자로 분류돼, 근로기준법이 보장하는 노동기본권을 인정받지 못했고, 기업은 법의 허점을 적극 이용했다. 법과 제도의 미비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가 연대를 이루지 못하도록 이간질하고 분리했다. 먹고 살기 급급한 노동자들은 사용자에 대항할 엄두조차 못 내고, 같이 연대해야 할 을끼리, 다시 을과 병과 정으로 갈라 서로를 물고 헐뜯게 만들었다. 이제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제도와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사회를 지탱하는 모든 노동의 가치를 동등하게 존중하지 않는 나라가 민주적인 선진국이 될 수는 없다. 

<진보와 가난>에서 헨리 조지는 임금은 결코 자본에서 발현되지 않는다고 했다. 자본 자체로는 힘이 없어 노동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할 때 이윤이 생긴다. 노동은 자본이 가치창출과 이윤창출을 구현하는 필수적 부분이라고 지적하며 자본이 임금을 만든다는 건 모순이라고 말한다. 이윤과 성장만을 앞세워 경영해온 기업주도 성장을 해온 대한민국의 정책과 노동구조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 기업의 가치는 곧 노동자의 손에서 만들어진다. 임금을 줄 노동자가 없다면 기업은 애당초 존재할 수 없다.

‘노동’하는 인간이 행복해야 세상이 행복

'노동의 가치'를 다시 세워야 한다. 2018년 국회헌법개정특별위원회 자문위원회 보고서는 노동이 의무가 아니라 권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문 정부가 들어선 이후 논의된 헌법 개정안에서 ‘노동’은 4대 의무에서 빠졌다. '노동은 의무가 아닌 권리'라는 헌법 개정안은 20대 국회가 파행하며 재논의되지 못했다. 그 이듬해 855명의 노동자가 산재사망했고 올해엔 15명의 택배노동자가 과로사하며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이 다시 드러났다. 이제 노동자의 죽음을 막기 위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 전태일3법 제정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 사업주의 책임과 처벌 강화를 촉구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하루 6명씩 죽어나가는 노동자의 죽음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된다는 절박한 노동자들의 현실을 반영한다. Ⓒ KBS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기업의 사장이 사망했다. 세상이 그를 애도할 때, 그의 기업에서 일하다 사망한 노동자를 애도하는 언론은 보기 어려웠다. 2016년 한 칼럼에서 논객은 말했다. ‘그가 눈을 감기까지 그가 죄 값을 치르는 것을 우린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노동자의 죽음엔 침묵하며 죄를 묻지 않는 2020년 한국사회. 우리 사회에서 노동의 가치는 언제 제대로 평가받고, 노동자가 대우받을 수 있을까?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무엇을 위하여 일하는지 생각해보라.’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노동의 이유를 물었다. 감사를 주고받는 행위이던 노동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지 기억해야 한다. 한강의 기적을 만든 것은 '노동자'의 이름으로 열심히 일한 한국인이었다. 열심히 일해온 우리 노동자 모두가 제대로 존중받아야 한다. 일을 놀이처럼 하는 인간이라는 뜻인 ‘호모 루덴스’가 21세기가 지향하는 노동자다. 한국의 노동에 관한 인식과 노동환경은 시대를 따라가고 있는가? 노동을 신성시하고 즐기기는 커녕,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한국사회의 노동 현실이다. 서로의 노동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사회로 제도와 구조를 혁신해야 한다. 닭볶음탕을 만드는 노동을 김치부침개를 만드는 노동으로 답례했듯, 노동은 기업가와 노동자, 국가와 개인이 서로가 윈윈하도록 존재해야 한다. ‘노동’하는 인간이 행복할 때 세상이 행복해진다. 노동자 없는 나라엔 공동체도, 성장도 없다.


[청년기자의 시선1]이 하나의 현상과 주제에 관한 다양한 시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시선2]는 현상들의 관계에 주목해 현상의 본질을 더 천착하고, 충돌하는 현상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 새로운 비전을 모색한다. 이번 주제는 '야, 한국 사회!‘ 2020년이 저물어간다. 촛불로 탄생한 개혁 정부 임기가 1년 남짓한 지금, 우리는 어디에, 어떤 얼굴로 서 있는가? 진척이 없는 개혁과제의 달성, 코로나19가 낳은 공동체 붕괴와 경제위기 극복, 뉴노멀로 상징되는 미래사회 준비 등 현안이 산적한 한국사회의 당면과제를 짚는다. (편집자)

편집 : 오동욱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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