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자의 시선 2] ‘가족’ ③ 숨결

사진에는 ‘숨결’이 있다

밤 12시가 다 되어 혼자 기숙사로 돌아올 때면 가족 생각이 난다. 밥 먹을 때도, 공부할 때도 안 그런데 혼자 터벅터벅 걸으며 하루를 마칠 때 갑자기 그리워진다. 21개월 군 생활도 버텼고, 고향을 떠나 타지 대학원 생활도 2년이 다 되어 가지만 혼자 지낸다는 건 익숙하지 않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다가 문득 혼자라는 게 느껴질 때 사진은 버팀목이다.

사진에는 ‘숨결’이 있다. 지갑에서 9년 전 대학 입학식 때 찍은 가족사진을 꺼내면 어머니의 잔소리가 들린다. “끼니는 제때 챙겨 먹어라.” “힘들어도 담배는 피우지 마라.” 아버지의 수다는 정겹다. 웃고 있는 미소 속에 오늘은 어땠냐고, 요즘 학교생활은 어떠냐고 묻고 있다. 무슨 얘기인지 혼자 유튜브를 보며 낄낄거리는 동생 웃음소리는 밉상이다. 모두 활짝 웃고 있다. 

사진을 다시 지갑에 넣고 밤하늘을 보면 미소 짓는 가족 얼굴 잔상이 하늘에 남아 있다. 어머니 표 소고기 김치찌개 냄새가 스쳐간다. 아버지와 함께 북극성을 찾던 어린 시절 추억이 지나간다. 동생에게 “라면 좀 끓여 달라”고 타박하던 시간이 갑자기 떠오른다. 사진 속에는 가족의 ‘숨결’이 생생하다.

▲ 사진에는 숨결이 있다. 어린 시절 찍은 가족사진은 시간이 지나도 냄새와 소리,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가족이 소중한 이유다. © 임지윤

부모님은 수시로 사소한 일상을 사진에 담아 보낸다. 며칠 전에는 성지 순례 다녀오며 근처 꽃밭에서 찍은 사진이 도착했다. 두 분은 마주 보며 웃고 있다. 어두운 밤에 넓은 꽃밭에서 마스크를 쓰고 찍은 사진인데도, 감긴 눈과 올라간 볼에서 웃는 표정이 그려진다. 내가 오랜만에 집에서 자고 잠에서 깰 때 두 볼을 만지는 어머니 손길도, 웃으며 “막걸리 한 잔 안 하겠냐”는 아버지 물음도, 아르바이트 끝난 뒤 집에 와 자기가 먹는 라면 건드리지 말라는 동생 경고도 ‘숨결’이 돼 전해온다. 그 숨결이 힘들었던 하루를 버티게 한다.

’숨결’을 가슴에 품은 이들

나는 장례식장이 싫다. 외할머니 빈소에 모셔진 영정사진 속에서 할머니 숨결을 더듬으며 울었다. 명절마다 외갓집에 찾아가면 ‘아이고, 지윤이 왔나’ 하며 몇 분 동안 부둥켜안던 외할머니 체온이 잊히지 않는다. 명절이 끝나면 집 냉장고는 항상 할머니가 만들어 준 깻잎전으로 가득했다. 점점 쇠약해져 모든 기억이 뒤죽박죽됐을 때도 내 이름은 기억하던 할머니, 할머니는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데 더 이상 할머니의 숨결을 호흡할 수 없다니.

가족을 잃는다는 건 ‘숨결’과 헤어지는 일이다. 의료사고로 아들을 잃고 8년간 법정 다툼 중인 아버지를 만났을 때도, 세월호 참사로 동생을 잃은 언니에게 세월호 6주기를 맞아 추모 앨범을 보낼 때도, 이들의 고통을 느끼기 어려웠다. 어려운 부탁을 했다. 생전 사진을 보여달라고. 사진 속 죽은 이는 환하게 웃고 있다. 하지만 유가족은 더 이상 이들의 숨결을 만질 수가 없다. 취재였지만, 유가족의 마지막 버팀목을 내가 너무도 쉽게 무너뜨렸다는 죄책감이 가슴을 찔렀다.

▲ 세월호 유가족 남서현 씨가 아홉 살 무렵, 이제는 세상을 떠난 여섯 살 동생 지현과 강원도 강릉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 국가는 잔인하게도 언니가 호흡했을 동생의 ‘숨결’을 앗아갔다. ⓒ 남서현

유가족은 가족사진을 가슴에 품으며 세상과 싸우고 있었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이들이 요구하는 두 가지였다. 전날까지 한 집 밥상머리에서 밥을 함께 먹던 가족이었다. 단 하루 사이에 가슴이 무너졌다. 이제는 체온을 느낄 수도, 웃음을 들을 수도, 냄새도 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가족을 먼저 떠나보낸 뒤, 빈자리를 보며 평생 느끼게 되는 그 허망함과 처절함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안다. 

처음에는 내 슬픔이었고, 고통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일은 이웃의 일이 되었고, 세상의 일이 되었다. 사람이 가족의 ‘숨결’을 떠나보내는 아픔은 더 이상 계속되면 안 된다는 사명감으로 바뀌어갔다. 죽음의 공포와 홀로된다는 외로움의 트라우마는 내게서 그쳐야 한다. 유가족이 요구하는 두 가지 조건은 더 이상 희생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 조건이었다. 국가는 지극히 당연한 두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람 ‘숨결’을 앗아간 국가폭력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삶의 장례식은 ‘숨결’의 장례식이다. 국가폭력은 가족의 ‘숨결’을 앗아갔다. 유가족은 텅 빈 동굴에 갇혀, 무너진 가슴을 안고 견뎠다. 우리 현대사에서 수많은 부모가 자식 사진을 들고 거리에 나와야 했다.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 씨는 1987년 겨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 숨진 막내아들을 따라 한 평생을 민주화 운동으로 보내다가 아들 곁으로 갔다.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씨는 반독재 투쟁을 하다가 전경이 쏜 최루탄에 맞아 피 흘리며 쓰러진 아들 사진을 들고 거리의 민주투사가 되어야 했다.

“(세월호) 가족의 힘으로 이 나라가 조금 밝아질 수 있도록 힘내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끌어 달라.”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 씨가 2017년 5월, 세월호 유가족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국가폭력으로 자식을 잃고 30년간 눈물로 지샌 어머니의 호소였다. 2020년 6월 오늘, 촛불이 정권을 바꾸었으나, 가족의 슬픔은 그대로다.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가능한 공소시효도 11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그 시간이 지나면 세월호 희생자의 죽음은 또다시 죽고 만다. 지금까지 죽음이 또 죽음을 낳은 것처럼.

▲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 씨는 6·10 민주항쟁에 헌신한 공로로 올해 기념식에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민주화 30주년을 맞은 2017년 6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사진전 ‘1987년을 돌아보다’에서 사진 속 아들을 어루만지는 배은심 씨. ⓒ KBS

왜 가족을 잃은 이들이 서로 손을 맞잡아야 하나? 왜 국가와 싸워야 하나? 이들은 왜 끊임없는 모진 말과 손가락질을 견디며 지금도 거리에서 울부짖어야 하나? 죽음이 죽고, 또 다른 죽음이 반복되어서다. 가족의 ‘숨결’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상실의 고통을 반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로 컨베이어 벨트에 몸이 끼여 죽은 김용균 씨, 5.18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군인의 총에 맞아 죽은 임은택 씨, 최근 경기도 이천 물류창고 화재로 죽은 민경진 씨…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피해자 유가족은 오늘도 거리에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친다. 가해자도, 정부도 답이 없다. 

손에 든 가족사진 속 떠난 이는 웃고 있는데, 그의 숨결은 아직 가족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을 잘 떠나보내고, 더 이상의 죽음을 막는 일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우리가 이들을 기록하며 기억하고, 살아남은 이들의 ‘숨결’로 연대해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하는 이유다.


지난 가을학기에 연재한 [청년기자들의 시선]이 하나의 현상과 주제에 관한 다양한 시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봄학기 [청년기자의 시선2]는 현상들 사이(Between) 관계에 주목해 현상의 본질을 더 천착하고, 충돌하는 현상 사이의 갈등과 대립 너머(Beyond) 새로운 비전을 모색한다. 이번 주제는 ‘가족’이다. ‘가족’은 사회공동체의 기본 구성단위이자 인간관계의 1차적 연결구조다. 과거 방식과 단절하고, ‘뉴노멀’을 요구하는 코로나 시대는 삶의 기본요소인 가족의 개념과 의미에 다른 시선을 요청한다. ‘이름, 동네, 숨결, 일’의 키워드로 코로나 시대 가족을 주목한다. (편집자) 

편집 : 오동욱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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