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자의 시선2] ‘가족’ ② 동네

‘동네’는 없다

치킨, 찜닭, 족발, 마라샹궈, 초밥까지. 경기도 재난기본소득을 받은 뒤로 초인종이 더 바빠졌다. 처음에는 코로나19 걱정에 나가기를 꺼려서였는데, 지금은 기본소득을 쓰기 위해 배달음식을 애용한다. 1인분만 시키기도 어렵고, 둘이 한 번 먹으면 3~4만원은 훌쩍 나간다. 어렵게 받은 돈, 이렇게 낭비하긴 아깝다. 식재료를 사다 해먹으면 좀 더 아낄 수 있지만, 자주 가는 홈플러스에선 기본소득을 못 쓴다. 연매출 10억 이하 ‘동네’ 가게에서만 쓸 수 있다는데 어디에, 어떤 가게가 있는지 알아야지. 대형마트, 기업형 슈퍼마켓을 가기 이전에는 어디서 물건을 샀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동네’를 잃었다. 우리 삶에 더 이상 ‘동네’는 없다.

가족이었던 ‘동네 이웃’

‘다 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라는 동요가 있었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다 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 한바퀴. 바둑이도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그랬다. 어릴 적 심부름을 가면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동네’는 놀이터이자, 이웃의 정을 나누는 마당이었다. 위쪽 세 갈래 길에는 채소와 과일을 파는 큰 슈퍼가 있었고, 그 길 너머에는 생닭도 파는 치킨집이 있었다. 정육점은 집 아래쪽, 큰 길 가는 길목에 있었다. 돼지나 소고기를 사러 가면 채소도 정육점 옆옆 과일가게에서 한꺼번에 사곤 했다. 우리 빌라 바로 맞은편에는 세탁소가 있었는데, 심부름 나갈 때나 집에 들어올 때도 세탁소 부부에게 인사했다. 그 덕에 그 집 아주머니는 우리 집 저녁 반찬이 뭔지를 훤히 알았다. 갈수록 옷 사이즈가 커진다며 조금만 먹고 살 좀 빼라는 잔소리는 덤이었고.

▲ 제천 시내에 있는 분식집과 24시간 문을 여는 편의점. 인정이 넘치는 ‘동네’ 가게가 사라지면서, ‘가족’ 같던 ‘이웃’도 사라졌다. ⓒ 김지연

큰길 나가는 골목에는 분식집이 있었다.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만두 솥단지에서 나는 하얀 김이 내 안경알을 뿌옇게 만들었다. 엄마가 맞벌이를 시작하면서 나는 그 분식집에 외상을 달고 김밥을 먹었다. 김밥 딱 한 줄. 눅눅한 김에 밥도 두껍고 질깃질깃한 시금치가 잔뜩 든 김밥이었다. 요즘은 김밥 한 줄로 배가 안 차고, 값도 한 줄에 2~3천원이 훌쩍 넘지만 천원짜리 김밥 딱 한 줄에 배가 든든했다. 맛은 별로인데도 매번 외상이 죄송해 눈칫밥을 먹었다. 엄마가 미리 말해 둔 걸 알았더라면, 더 잘 지냈을 텐데.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손만두를 빚으며 정겹게 반기던 아주머니 사장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때 김밥의 넉넉한 밥과 채소는 어머니를 대신한 아주머니의 정이었다. 이모같이 다정하고 따뜻하던 분식집 사장님, ‘동네’에는 ‘이웃’이 있었고, ‘이웃’은 ‘가족’이었다.

‘혼밥’ ‘혼술’ 하는 가난한 시대

벌써 15년도 지난 얘기다. 고등학교에 진학해, 수학과 영어 학원을 가느라 밖에서 17시간을 보내야 했다. 대학은 서울로 진학하면서, 엄마 회사 근처 신도시로 이사했다. 신도시에는 ‘동네’가 없었다. 중심가에 큰 마트 하나, 그 주변에는 먹자골목. 우리 집 주변은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여있고, 단지마다 기업형 슈퍼마켓과 미용실 등 가게 몇 개가 있다. 단지 내 가게들은 대부분 배달 위주 음식점, 아니면 편의점이다. 소득이 늘어나고, 개발이 이루어지고, 의식주가 편해진 대신, 연결이 끊어진 우리 삶은 거꾸로 팍팍해졌다.

이사 온 지 4년이 됐지만 우리 집, 403호를 아는 곳은 우리 빌라 주민들 일부, 그리고 주소가 저장된 배달음식점밖에 없다. 내가 아는 가게도 ‘배달의 민족’ 즐겨찾기에 나온 음식점들, 아니면 홈플러스 정도다. 나는 지금 사는 ‘동네’를 모르고, ‘동네’도 나를 모른다. 동네가 있던 내 마음은 텅 비었고, 그 대신 지리적 위치와 주소가 머리를 채웠다. ‘동네’가 없으니 ‘이웃’도 없다. 모두 외롭게 자신만을 바라보며 산다. 기쁨도, 슬픔도 혼자 삭이며 편의점에 들러 ‘혼밥’ ‘혼술’을 한다. 몸은 부자가 되었으나, 마음은 가난해졌다. ‘동네’를 잃어버린 결과다.

코로나가 던진 질문, 당신은 행복한가?

평소에는 불편할 게 없었다. 집-버스-학교-홈플러스-집, 내 주된 생활권은 ‘동네’가 아니었으니까. 코로나19가 터지면서 달라졌다. 사람끼리 연결이 위험해지고, 버스와 지하철이 안전하지 않아지면서 나는 지리적 ‘동네’에 갇혔다. 아니, 집에 갇혔다. 내가 사는 화성 안에서는 갈 데가 없었다. 지역 안에서만 쓸 수 있다는 재난기본소득을 받고 나서, 엄마와 나는 고민했다. 이왕 쓰는 거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게, 그나마 좀 장사가 안 되는 가게에서 쓰자고 했다. ‘그러면 어딜 가지?’ 둘 다 할 말이 없었다. 직장에 매여 산 엄마나, 학교와 취업준비생으로 서울에 묶여 산 나나, 우리는 화성에서 붕 뜬 채 살고 있었다.

코로나 재난이 잊고 살던 ‘동네’와 ‘이웃’을 돌아보게 한다. 아무리 인터넷이 발달하고 세계가 하나가 되었다 해도, 우리는 결국 ‘동네’에 발을 딛고 사람과 연결돼 살아간다. 정을 나누고, 위험 할 때 도움을 청할 ‘이웃’이 필요하다. 이웃은 사회네트워크로 연결된 또 다른 가족이다. 그것이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공동체이고, 이미 지구 곳곳에서 공동체 회복 실험을 하고 있다. 네덜란드 데 퀘벌에서는 공동체가 지역에서 생산한 재생에너지를 가상화폐를 통해 거래하는 도시 재생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웨이스티드 프로젝트’를 통해 주민들이 서로 사귀고 배워가면서 플라스틱 쓰레기 재활용률을 높이고 자신의 플라스틱 소비를 되돌아보게 됐다. 미국 로체스터의 ‘마을을 만드는 이웃들’(Neighbors Building Neighborhood, NBN)은 몰락하는 다른 러스트벨트 지역과 달리 로체스터가 빠르게 되살아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웨이스티드 프로젝트’는 주민들의 플라스틱 재활용률을 높이기 위해 공동체 활성화와 참여에 초점을 두었다. ⓒ wastedlab.nl

해외만이 아니다. 2014년 1월, 독산4동 인근 골목에서 전봇대가 쓰러지며 단전이 됐다. 사고 이후 주민총회가 열렸고 250가구의 민원이 해소됐다. 그 뒤로 주민들은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3월에는 주민과 행정조직이 머리를 맞대고 재활용 문제 해결을 고민했다.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는 것을 막고 분리수거를 활성화하기 위해 서울시가 시범 도입한 ‘재활용 정거장’은 독산 4동의 ‘도시 광부’를 만나 꽃을 피웠다. 쓰레기가 사라진 자리에는 벤치가 생기고 꽃이 생겼다. 주민들이 스스로 가꾼 것이다. 도시 광부는 쓰레기와 주민과 행정조직을 연결했다. 어느 집이 어려운지, 살펴봐야하는지 센터에 넌지시 전달하기도 했다.

이 실험들은 말해준다, 공동체 회복이 곧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 해결과 맞닿아 있다고. 그리고 코로나19가 제 가족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아등바등거리는, 지금 우리가 사는 방식에 관해 묻는다, 아침에 일어나 한 바퀴 돌 당신의 ‘동네’는 어디냐고, 당신과 인사를 나누고 함께 수다를 떨 ‘이웃’이 있느냐고. 당신은 지금 잘 살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


지난 가을학기에 연재한 [청년기자들의 시선]이 하나의 현상과 주제에 관한 다양한 시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봄학기 [청년기자의 시선2]는 현상들 사이(Between) 관계에 주목해 현상의 본질을 더 천착하고, 충돌하는 현상 사이의 갈등과 대립 너머(Beyond) 새로운 비전을 모색한다. 이번 주제는 ‘가족’이다. ‘가족’은 사회공동체의 기본 구성단위이자 인간관계의 1차적 연결구조다. 과거 방식과 단절하고, ‘뉴노멀’을 요구하는 코로나 시대는 삶의 기본요소인 가족의 개념과 의미에 다른 시선을 요청한다. ‘이름, 동네, 숨결, 일’의 키워드로 코로나 시대 가족을 주목한다. (편집자) 

편집 : 최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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