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자의 시선2] 코로나 이후 ③ 사회적 돌봄

요양원에서 맞은 팔순

올해 팔순. 통풍이 심해져 요양원에 들어온 지 5년이다. 평생 살면서 요즘만큼 쓸쓸한 적이 없다. 코로나 이전에는 가족이 일주일에 한번은 찾아와 요양원 생활이 외롭다 생각하진 않았다. 요양원에서 지내며 가장 즐거운 시간은 가족들이 면회 와서 함께 얼굴보고 이야기할 때다. 자식도 자식이지만, “할아버지” 하고 매달리는 손주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 코로나19 사태로 면회가 금지돼 그 예쁘고 귀여운 손주들을 3개월째 못 봤다. 눈을 떠도, 감아도 손주들이 눈에 밟힌다. 내 품에 안겼던 손주들의 체온과 앙증맞은 몸부림이 생생한데, 현실은 냉엄하다. 코로나가 잠잠해질 때까진 앞으로도 가족들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어버이날에도 아들과 딸, 며느리, 손자, 손녀의 얼굴을 영상으로 보고 잠깐 통화를 한 게 전부다. 보고 싶다. 가족의 따뜻한 손 체온이 너무 그립다.

▲ 코로나로 면회가 금지돼 창문 유리를 사이에 두고 만나 애타게 손을 마주한 가족. 사회적 거리두기가 만들어낸 이번 어린이날 요양원 풍경이다. ⓒ <연합뉴스>

우울증은 사치겠지요?

그 누구보다 씩씩하게 요양원 생활을 견뎌왔는데 요즘은 외롭고 우울증까지 왔다. 나는 통풍으로 거동이 좀 불편하지만 정신적 문제는 없었다. 요양원 직원들과 대화도 잘했고 함께 생활하는 노인들과 관계도 좋았다. 코로나로 가족 면회 금지가 길어지면서 달라졌다. 가슴이 답답하고, 문득문득 나락으로 쿵 떨어지는 느낌 속에 빠지면서 호흡까지 가빠졌다. 함께 있는 노인들과 대화도 안 하고 멍하니 TV만 본다. 식욕도 없어 밥도 거의 못 먹는다. 밤이 되면 가위에 눌리고, 종일 가족 걱정으로 가득하다. 지금 일상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족과 눈을 마주보며 서로 일상 이야기를 하던 때를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 누워 있으면 가족들과 살아온 지난 날이 천정에 떠오른다. 평생 가족을 위해 일했고, 자식 키우고, 손자보는 재미에 살았다. 코로나로 가족은 물론 세상과 단절돼 있다. 코로나는 가족과 세상을 나로부터 갈라 놓았다. 

내 옆 병상 할아버지는 코로나 사태 이후 치매 증상이 한층 심해졌다. 자꾸만 어린이처럼 엄마를 찾는다. 딸을 “엄마”라 부르며 통화하는 내내 “보고싶다, 무섭다, 힘들다”며 눈물짓는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여기저기 침도 뱉는다. 혼자서는 화장실도 가지 못한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 이 할아버지는 이러지 않았다. 가족이 면회오면 싱글벙글 웃던 모습이 머릿속에 선하다. 더 이상 웃는 모습을 볼 수 없다. 내 방에는 80대 노인 10명이 있다. 우리가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모두 나처럼 평생 일만 하며 이 땅에 경제를 살리고, 민주화를 이룩한 세대인데, 생애 마지막 순간이 이렇게 비참하다니!

새벽부터 마지막 한 사람이 잠들 때까지 켜져 있는 TV는 연일 요양원 집단감염 소식을 전한다. 대구 한사랑요양병원을 비롯해 전국의 요양원, 요양병원, 정신병원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했고, 기저질환이 있는 면역력 약한 노인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는 뉴스다. 나와 비슷한 공간에 있던, 내 연배의, 가족과 떨어져 외롭게 지내던 노인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될 것 같아 겁난다. TV에 나오듯 나와 가족이 요양원에서 집단감염돼 내가 세상을 떠난다면, 부모 장례도 치르지 못하는 가족의 마음은 얼마나 미어터질까? 그렇다고 미국처럼 온라인으로 장례를 치르기는 싫다. 지금도 외로운데, 죽음마저 쓸쓸하게 맞고 싶지는 않다. 면회가 가능하다 해도 오라고 말하기 망설여진다. 그래, 내가 지금 가족을 그리워할 때가 아니지. 가족이 요양원에 왔다 그 이쁜 손주가 코로나에 감염이라도 되면 어떡해. 내 외로움은 사치야, 우울증조차 내가 홀로 견뎌야 해.

▲ 코로나 팬데믹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자, 스페인은 장례식을 드라이브 스루로 5분 만에 절차를 끝냈다. 코로나 팬데믹 피해자의 대부분은 기저질환이 있는 노약자들이었다. ⓒ KBS

일본에선 의사가 집으로 방문한다는데…

한 달 전 우리 방에 신참이 들어왔다. 몸 한쪽이 마비된 일흔 살 할머니다. 그는 혼자 이동할 수가 없어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야 한다. 집에서는 가족의 보살핌과 방문 요양서비스를 함께 받았다. 코로나가 터지자 할머니 가족은 여러 곳을 다니는 방문요양보호사가 가족에게 코로나를 감염시킬까 불안해했다. 할머니는 집에서 치료와 요양서비스 받기를 원했다. 요양보호사와 간호사가 와서 진료해주면 사랑하는 아들 집에서 지낼 수 있을 텐데, 하고 바랬다. 하지만 가족이 코로나에 감염될 수 있다는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나도 그랬다. 방문 요양서비스 받으면서 가족과 집에서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방문요양 서비스 받으려면 기준이 까다롭다. 노인 10명 중 1명도 받을까 말까다. 대상자가 돼도 요양보호사가 방문해 노인을 돌봐 주는 시간이 하루 최대 4시간이다. 그 외 시간을 가족이 감당할 수 없어 나는 요양원에 올 수밖에 없었다. 

복지사에게 일본의 요양복지제도에 관해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은 우리보다 20년 앞서 초고령화 사회를 경험한 나라다. 일본은 돌봄이 필요한 노인을 시설에 넣기보다 지역사회에서 함께 산다. 일본은 노인 열에 둘이 정부에서 제공하는 재택 의료와 방문요양 서비스를 함께 받는다.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아프기 전에 미리 예방 차원에서도 방문 서비스를 제공한다. 재택의료만 하는 의사 집단이 따로 있으며 지자체와 함께 운영한다. 일본에서는 담당 주치의가 집으로 방문한다. 그래서 집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는 노인이 많다. 요양원에 들어가더라도 항상 문이 열려 있어 손자가 학교 끝나고 요양원에 들러 같이 차도 마신다고 했다. 

얼마나 부러웠던지. 일본처럼 지역사회 돌봄이 가능하고 방문요양 서비스가 갖춰져 있다면 노인들이 죽음 앞에서 덜 외로울 텐데. 이내 고개를 가로젓는다. 문제는 코로나야. 우리나라 사정이 유럽이나 미국보다 안정돼 있고, 아직까지 우리 요양원에 감염자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야. 이제 곧 가족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 일본은 중증 치매 할머니들이 한 가정에 모여 살며 환자와 간병인 관계가 아닌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지낸다. 요양보호사와 간호사가 함께 거주하고 의사가 정기적으로 진료해준다. 그룹 홈은 월 20만원으로 싸면서도 질적 만족도는 높아 이용 대기자가 많다. ⓒ SBS

‘마음만은 항상 곁에’라는 슬픈 구호

오늘도 손주 사진을 보며 외로움과 그리움을 달랜다. 이태원 클럽이나 학교의 집단감염 소식을 보며, 언제까지 코로나 시대가 지속될지 가족을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예측조차 하기 어렵다. 하지만 견뎌야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 마음만은 항상 곁에’란 구호가 안쓰럽게 다가온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세상의 미덕이 되었다. 요양원 사정은 반대다. 요양원은 병상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밖에는 서로 거리두기를 한다는데 우리는 여전히 붙어 지낸다. 요양원 전체가 코로나에 감염되는 사고를 보고도 우리는 한 방에서 10명이 지낸다. 아예 사회와 단절시켜 놨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돈을 더 내서 병실을 옮기라는 건가? 월 70만원도 자식들에게 큰 부담이다. 

코로나 때문에, 아니 앞으로 지속될 바이러스 시대에 요양원과 요양병원에서 생활하는 노인이 더 늘어날 것이다. 본격적인 노령화 시대, 바이러스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 지금 노인요양 시스템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인지 내가 머물고 있는 요양원이 증명한다. 그나마 요양원에 수용된 우린 다행이다. 홀로, 세상의 외면 속에서, 힘들게 차가운 셋방에서 지내다, 죽어가는 노인들은 얼마나 많은가? ‘가족이 그립다’는, ‘코로나에 갇혀 우울증에 빠졌다’는 이 생각조차 사치다. 하지만 세상에 말하고 싶다. 

“세월은 잠깐이다. 자식들도 금방 나이 든다. 요양원에 갇혀 가족을 그리워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내 지금 일상이 내 자식의 미래가 되어선 안 된다.”


지난 가을학기에 연재한 [청년기자들의 시선]이 하나의 현상과 주제에 관한 다양한 시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봄학기 [청년기자의 시선2]는 현상들 사이(Between) 관계에 주목해 현상의 본질을 더 천착하고, 충돌하는 현상 사이의 갈등과 대립 너머(Beyond) 새로운 비전을 모색한다. 코로나 팬데믹이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미래를 한 치도 예측하기 힘든 오늘, 분명한 건 코로나가 이전과 이후 시대를 나누었다는 사실이다. ‘뉴노멀’ ‘언택트’ 시대라는 새로운 용어가 상징하듯, 코로나 시대 이후 세상은 새로운 가치와 행동을 요구한다. 세계 석학들이 이후 세계가 어떻게 바뀔지 전망이 분분한 가운데, 단비 청년기자들이 ‘코로나 이후’에 주목했다. (편집자)

편집 : 신지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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